제7권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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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곧 왕국에 도착해요.”
주안나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불안감이 이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왕국에 도착만하면….”
주안나는.
“모든 게 해결돼요.”
그 왕국이란 곳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이성의 길드장인 주형태가 숨겨둔 아들로 인한 후계 경쟁.
할머니의 끊임없는 시험.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에 삐뚤게 자라나버린 아이.
그리고.
‘이정기.’
그런 그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정기.
사실상.
‘이정기가 트리거다.’
주안나가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것들을 드러내게 된 이유는 바로 이정기 때문이었다.
이성의 또 다른 후계자, 그러면서도 주병훈처럼 음흉하지도, 김윤태처럼 멍청하지도 않다.
오히려.
‘주안나가 가장 바라는 모습.’
적당히 냉정하며, 적당히 인간적인 면모.
또한, 이정기는 주안나가 그토록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한 혈통.’
할아버지는 이건, 할머니는 최명희.
아버지는 이강이었으며 어머니는 유영아였다.
그 누구 하나 빠지는 이름이 없었으며, 그 이름들만으로 이정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대손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주안나는 달랐다.
할머니는 최명희, 아버지 또한 이성의 길드장인 주형태였지만.
‘어머니.’
주안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콤플렉스 같은 존재였다.
집안의 인정조차 받지 못한 채, 이성 저택에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한 자.
아버지라는 작자 또한 한순간의 실수로 치부하는 존재.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안인회는 주안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정기에겐 주안나를 건드리는 가장 큰 것이 따로 있었다.
가장 명확하고도 정확하며 현재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한 가지.
‘힘.’
세간에 알려지길 주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헌터로 각성하여 그 천재성을 발휘한 것처럼 알려졌으나 사실은 달랐다.
아버지의 피를 받아 헌터로 각성하기는 했으나, 그 성장세나 전투센스등은 천재란 말을 쓰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더러운 피를 가졌으면, 노력이라도 하거라.’
주형태는 그런 주안나를 철저히 무시하며 절벽으로 떠밀었다.
주안나에게 그러한 콤플렉스가 있듯, 주형태에게 또한 결코 지울 수 없는 이름 이강이 있었으니까.
주안나가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아끼지 않았던 주형태.
하지만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노력해야만 했던 주안나.
결국, 힘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올라왔다고 생각한 주안나는.
‘이정기로 인해 세상이 깨져버렸다.’
자신이 주안나라고 해도 무엇이라도 하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처음 그녀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게 된 계기.
‘왕국.’
왕국이었다.
그에 대해선 안인회도, 그 누구도 자세히 모르고 있지만, 그곳이 혼돈의 세대를 만들 수 있는 어떠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특히나 혼돈의 세대로 각성했다고 하나 그 힘이 부족한 편에 속했던 주안나가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주안나를 따라 이동한 그곳.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 우뚝 솟아나 있는 커다란 나무 하나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파르르.
긴장한 것인지, 감탄한 것인지 모를 떨림을 간직한 채 나무를 보며.
“저….”
주안나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아마조네의 후계자! 주안나가 왔습니다!”
평소 듣기 힘든 공손함과 존경심이 드러나 있는 목소리.
“문을 열어 저와 제 수하들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제 할머니에게도 보이지 않을 공손함을 간직한 채 주안나가 소리치자.
스슥.
커다란 나무에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채앵!
급히 울리는 쇳소리.
안인회를 필두로.
채채채챙!
제1 공격대의 헌터들이 다급히 무기를 꺼내 들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늦었다.
“……!”
이미 그들은 수백은 되어 보이는 특별한 존재들.
“엘…, 엘프?”
이종족이라 불리기에 마땅한 존재들에게 포위당해 있었으니까.
“아저씨. 무기를 내리세요.”
“하지만 아가씨….”
“저들이 바로….”
주안나는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마조네의 전사들입니다.”
안인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월이 흐른 아직까지도 그 비밀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혼돈의 세대와 상관있는 만큼 어느 정도 각오는 했다지만.
“아가씨 이것은….”
그것들은 말 그대로, 괴물들이었다.
* * *
멈칫.
잠시 주변을 살피던 이정기가 멈추어 몸을 떨었다.
“…….”
잠깐 눈을 감았던 이정기가 곧 눈을 떴다.
그리고.
씨익.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왜 그러십니까?”
“강민혁의 구출은 조금 더 미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진석의 말에 답해준 이정기.
원래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는지 물어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겠지만.
“그렇군요.”
이진석은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것이 이정기가 지구로 와 지금까지 쌓아온 이진석과의 관계이자 신뢰였다.
그 무엇을 하든, 그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정기의 말이 대부분 정답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다고 해도.
“…….”
잔뼈가 굵은 베테랑 헌터인 이진석조차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라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런 힘을 몇 번이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특별한 조건을 갖춘 특별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던 혼돈의 세대들이 가진 혼돈의 힘.
이정기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자신에게 주었으며, 그의 말을 들어보면 더 많은 이들에게 그 힘을 나누어줄 수 있는 듯했다.
어디 그뿐일까.
말도 안 되는 성장세, 사람을 다루는 능력, 마력에 대한 깊은 이해도.
그 무엇하나 자신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부족한 것이 없다.
더욱이.
‘왕.’
이정기에게 힘을 받은 이후 이정기를 보며 느껴지는 경외심.
그건 어느 정도 이진석에게 혼란을 주면서도, 진심을 다해 경외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평범한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
‘이런 사람이야말로….’
영웅.
그런 것이라고.
“이미 지금쯤이면 주안나 길드장 대리는 목적했던 곳에 도착했을 거다.”
그리고 그런 이정기와 이진석을 향해 다가와 목소리를 내는 자가 있었다.
“강민혁을 구출하지 않는 건 구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건가? 아니면 쉽게 아랫사람을 내버리는 타입인가.”
백호 현성호.
그는 결국 이정기에게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그 표정을 잊지 못하지.’
이진석은 현성호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 했었다.
항상 자신감에 차 있으며, 날카롭기 그지없는 얼굴의 현성호.
그러나 이정기가 그런 현성호와 호걸의 전원을 단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쓰러트렸을 때 현성호가 지었던 표정은.
피식.
자신이 이정기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현성호는 조금 달랐다.
그 속에 짙은 그리움과 감동이 있다.
자신과 달리 현성호는 이정기에게서 누군가를 투영한 것이었다.
이성의 오랜 원로나 다름없는 존재인 만큼 그가 투영한 존재가 이건일지, 이강일지 모르지만.
‘합류하겠다.’
그것이 현성호의 마음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건….”
이진석이 무어라 항변하려 할 때.
“뭐가 됐든 관계없지. 진짜 사냥꾼은 사냥을 위해 모든 것을 도구처럼 활용할 줄 알아야 하니까.”
제멋대로 생각하는 현성호.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제안 말입니까?”
이정기의 말에 현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듣기로 주안나 길드장 대리가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지언정, 그 결과를 보려면 최소한 며칠의 시일이 걸린다고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아는 정보를 공유하는 현성호.
“그렇다면….”
그가 입가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여지없는 사냥꾼의 표정.
무슨 새로운 사냥감을 고른 것이 분명한 얼굴로….
“이성의 제3 공격대 철산을 먼저 공략하는 건 어떻지?”
“……!”
“어차피 갈아탄 배야. 탈 거면 제대로 노를 저어봐야지. 철산의 공대장 백철순은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지.”
철산의 공대장, 태산 백철순.
탱커로서는 대한민국에서 견줄 자가 없다고 알려진 최강의 방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녀석의 안에도 짙은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
“내가 이야기를 해보지, 하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씨익.
“태산을 부수는 것이 먼저다. 어때?”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 듯하지만, 현성호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쁘지 않네요.”
이미 그는 이정기가 태산을 부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 * *
퍼어억!
바닥을 나뒹굴고 한참을 굴러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자.
“허억…. 허억….”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일어나려던 남자는.
털썩.
결국, 주저앉아버렸다.
그가 바로 태산, 백철순이었다.
이성의 제3 공격대, 철산의 공대장.
대한민국 탱커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그였지만.
“커억-!”
그는 지금 제대로 숨조차 내뱉지 못한 채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터벅, 터벅.
그를 향해 다가오는 있는 남자.
백철순은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꺼먼 그림자 속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하아.”
이제야 통하기 시작한 피 때문에 어지러운 머리.
그는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환영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드는 남자.
“나는….”
백철순은 곧 말을 이었다.
“합류할 수 없다.”
자신을 찾아온 백두.
강민혁을 찾느라 시간을 쓰던 중, 차라리 잘 된 것이라 생각했던 백철순의 생각은 곧 현성호를 보자 백팔십도 변했다.
현성호, 이성 내에서 그를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 할 수 있기에 현성호가 애초부터 배신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현성호!’
그가 지금 왜 이정기의 곁에 서 있는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현성호는 언제나 그리워하는 이가 있었다.
최고의 사냥꾼, 아니 헌터.
‘이건.’
그를 동경하고 그처럼 되고자 했던 현성호.
이성에 물들어 이성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던 그는 이정기의 힘을 보고 이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성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는다.”
태산이라 불리는 그의 별명처럼 백철순은 이성의 이름을 한순간이나마 버릴 생각이 없었다.
이정기에게서 백철순 또한 그리워하던 이름.
‘이강.’
그를 떠올린 것도 맞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에게 합류하는 것은 백두의 이름을 한순간이나마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성을 가진다면….”
백철순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대답.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성의 제3 공격대는 이제 전장에서 이탈하세요.”
패자를 향한 명령.
백철순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결과도 잠시.
“손님이 왔네요.”
이정기의 고개가 훽 돌아갔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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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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