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 4화
129
움찔.
주병훈이 몸을 들썩였다.
‘몸이….’
그의 동공이 점차 커져갔다.
마치 무언가에 속박당한 듯 움직이지 않는 몸.
마력을 끌어내려 해도, 마력은 제 말을 듣질 않았다.
그저 책상에 앉은 채 가만히 있던 자세로 굳어버린 주병훈.
“…….”
단언컨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이곳이 어딘가.
이성 호텔.
VIP 투숙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고 수준의 보안은 물론,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진 자라도 마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는 곳이 아닌가?
주병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까닭은 간단했다.
‘침입자.’
지금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 현상이 침입자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돋았다.
‘대체 누가…?’
도대체 누가 이성의 방비를 꿰뚫고 침입했으며.
‘어떻게?’
도대체 누가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속박할 수 있다는 것일까.
자신이 누군가.
성혈이었다.
길드 소속은 아니지만, 길드에서 실력을 쌓아 올렸으며 그룹의 힘으로 도달한 자신의 힘은 이미 제로 라인에 속해 있었다.
그런 자신을 속박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다고?
‘시엘…!’
그들이라도 움직인 것일까.
주병훈은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움직였다.
최대한도의 힘을 끌어다 쓰니, 고개가 조금 움직여 앞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최상길.
‘빨리!’
그에게 눈치를 주기 위해 한껏 인상을 찌푸린 주병훈.
그러나 최상길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이정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헛소리를 중얼대고 있었다.
녀석의 눈동자에.
“올림포스에서 나고 자란 녀석 아닙니까? 지구의 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기묘한 황금빛이 감돌고 있음을, 주병훈은 놓치지 않았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몸.
주륵.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마에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때.
스륵.
마치 장막 속에서 나타나듯,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더욱더 확대되는 주병훈의 동공.
최상길의 바로 옆에 서 있는 그 남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이… 정… 기….”
이정기.
그가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그리고 또 한 번.
스륵.
장막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
주병훈의 눈이 이정기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더 커져 있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인물.
아니 죽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민혁.
“주병훈 사장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주병훈을 향해 말했다.
* * *
꿈틀.
주병훈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신을 노렸다는 것과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이성의 무언가를 노리기 위한 적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할머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상대가 자신을 처음부터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고, 상대가 틈을 보일 때를 노리기 위해 아껴두었던 힘.
‘이정기!’
하지만 이정기와 강민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병훈은 숨겨두었던 힘마저 개방했다.
쿠쿠쿠.
주병훈이 앉아있는 책상이 들썩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병훈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 쓸데없는 짓이야.”
이정기가 옆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주병훈의 앞에 앉았다.
그 옆에 강민혁이 섰고, 최상길은 이 모든 상황을 인지조차 못 한 듯.
“제가 부족한 것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사장님.”
마치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로 라인의 랭커라 해도 그 속박을 풀어내긴 힘들어.”
너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
“너….”
모든 힘을 끌어낸 주병훈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닥치고, 들어.”
이정기가 그렇게 말하며 강민혁을 향해 손짓했다.
공손히 이정기를 향해 고갯짓한 강민혁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
혹여 그것이 자신의 목을 노리는 무기일까, 한껏 긴장했던 주병훈의 얼굴이 잠시 풀어졌다.
강민혁의 손에 들린 것은 날붙이가 아니었다.
한 무더기의 서류.
“……!”
그리고 주병훈은 다시금 눈을 치켜떴다.
“그, 그거…, 그건….”
강민혁의 손에 들린 것이 날붙이가 아니었음을 안도하고 있을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손에 들린 것은 오히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이게 뭔지 알겠지.”
타악.
책상에 내려놓은 서류.
그에 선명히 그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성의 마크였다.
“모른다고 시치미 떼봐야 아무 소용없어.”
모를 리가.
“가…, 강민혁….!”
이성 그룹의 기밀 서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기밀 서류였다.
이성 호텔을 키우기 위해 벌였던 수많은 불법적인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서류.
그것도 모자라.
‘안 돼!’
훗날 왕좌를 차지할 아버지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이 공들였던 모든 것.
그리고 또 하나.
타악.
사진들이 펼쳐져 책상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헌터라면 작게 인상을 찌푸릴 장면들이었지만, 일반인이라면 기겁을 하며 토악질을 할 정도로 잔인한 사진들.
그것들은 전부.
“이것도 모르진 않겠지? 네가 강민혁에게 명령해 죽인 헌터와 일반인들의 사진이니까.”
“……!”
주병훈이 명령했던 살생부였다.
세상에 결코 드러나선 안 되는 것들.
크게는 이성의 앞길에 방해되는 자들을 죽인 것이지만.
꿀꺽.
작게는 자신의 사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기도 했다.
만약 이것들이 세상에 퍼져나간다면.
‘안 돼!’
이성의 이름으로도 막지 못할 수가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아버지….’
이 자료들이 아버지의 손에 들어간다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주병훈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었던 강민혁이 이정기와 붙어먹었고, 언제나 자신의 수족이라고 생각했던 강민혁은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제가 보험 하나 없었을 것 같습니까?”
강민혁의 목소리.
“곧 폐기하려던 자료들이었습니다. 이정기 헌터의 일을 끝마치고, 당신에게 더욱 충성을 바치기 위해 폐기하려던 것들입니다.”
강민혁의 입가가 뒤틀렸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키우던 개보다 못하게 버려버리더군요.”
“강….”
“차라리 살려두어, 어딘가로 유배라도 보낸다면 참았을 겁니다.”
강민혁은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날 죽이려고 해?”
“너…!”
짝.
이정기가 손뼉을 마주쳤다.
“상황 파악은 됐겠지?”
이정기와 주병훈이 눈을 마주쳤다.
“백두의 합병을 무산시켜, 그리고 강민혁이 저질렀다고 하는 죄를 지워. 그러면….”
스윽.
“이것들은 전부 네 거다.”
“감히….”
“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이것들을 알게 될 거다. 주인배 부회장님. 네 아버지이자 백부님도 말이야.”
“이러고도….”
주병훈이 타오르는 눈으로 이정기를 향해 말했다.
“무사할 것 같으냐.”
이정기가 조금 속박을 풀어준 듯 자유로이 말하는 주병훈.
“너는 선을 넘었다.”
“…….”
“이성의 호텔에 잠입해, 나를 노려? 이따위 협박을 해?”
녀석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너야말로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자본의 시대를 지나, 무력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게이트가 사라지고 다시금 무력을 자본의 밑으로 깔리게 되었다.
세계의 룰.
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인들을 지키기 위한다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들.
“할머님도 너를 도울 수 없을 거다.”
녀석의 얼굴에 완연한 미소가 드러났다.
승리를 직감한 듯한 얼굴.
“대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
“네 앞에 있는 서류를 봐. 내가 룰을 벗어나려 했으면 이런 것들은 준비하지 않았겠지.”
그때였다.
섬뜩!
주병훈은 등줄기를 훑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방금 전.
‘심장이….’
자신의 심장이 마치 무언가에 쥐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죽여버렸으면 될 일이야.”
이정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지막이야. 너희들의 룰에 맞춰주는 건, 그 이상은 나도 할 수 없을 것 같거든.”
“너…, 이대로 나가면 전쟁….”
“전쟁….”
이정기가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바라던 바야.”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허억!”
주병훈의 몸을 감싸던 속박이 풀렸다.
급히 책상을 밀치고 움직인 주병훈.
하지만 그가 목표로 했던 이정기와 강민혁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사장님께서 회장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최상길.
서걱!
“젠자아아아아아앙!”
* * *
“주병훈이 그럴 힘이 있습니까?”
이진석이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백두의 해체를 무산시키고, 합병을 원위치시키는 일.
이정기가 선택한 건 주병훈이었으니까.
하지만 주병훈은 아직 3세일 뿐이다.
이성 호텔의 사장직을 맡고 있다고는 하나 그 파워가 그리 세지는 않은.
“가능합니다.”
강민혁이 말했다.
“주인배 회장과 주병훈 사장의 관계는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라이벌에 가깝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한다.
아직까지는 주병훈이 주인배를 견제하기 위해 힘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 힘이 드러나는 순간 주인배도 꽤나 곤욕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사실.
“그걸 가져다준 겁니다.”
숨겨둔 힘.
그건 말 그대로 숨겨져 있을 때 위력을 발하는 법이다.
이정기가 힘을 숨겼고, 그걸 통해 뷔앙이나 다른 이들의 방심을 유도했었듯, 주병훈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무용지물.’
더 큰 힘으로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뭐, 할 수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인즉, 주병훈이 이 판에서 아웃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주병훈 사장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합병을 돌려놓을 겁니다.”
그가 살기 위해, 그가 이 판에 남아있기 위해.
훗날 그가 회장직에 앉기 위해.
그것이 주병훈이 가진 가장 큰 바람이었으니까.
딸깍.
이진석이 접어놓은 휴대폰을 펼치며 말했다.
“그렇네요.”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백두 길드 합병 무산? 이유는….
-주형태 길드장의 숨겨둔 자식이 있다?
눈동자가 커지는 이진석.
“생각지도 못했던 신박한 방법인데요…?”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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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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