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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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씹어먹을 놈이-!”
이성 저택의 서재에 분노에 가득 찬 최명희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드드드드.
분노에 감응한 마력이 서재를 뒤흔들었지만, 최명희는 쉽게 분노를 가라앉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박윤태의 연이은 간곡한 청.
“하아.”
그제야 최명희는 화를 삭일 수 있었다.
최명희가 이토록 분노한 이유가 있다.
“현재….”
방금 전 박윤태의 보고.
“이정기 군에 대한 수배령이 프랑스 헌터 협회에서 떨어졌으며, 프랑스 협회와 수 개의 길드들이 이정기 군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콰앙!
“감히!”
이것이 함정임을 최명희가 모를 리 없었다.
‘내 실책이다.’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요 근래 중요한 일로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정기, 자신의 손자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애일 뿐이야.’
거기다 이정기에겐 제대로 세력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던가.
박윤태의 보고에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지 못할 최명희가 아니었다.
‘이건을 노렸다.’
분명 큰 틀은 그 개 잡종을 노리고 만들어진 함정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김대정이, 이놈이 드디어 미친 게야?”
한국 헌터 협회, 아니 김대정은 분명 이정기를 노리고 함정을 팠다.
이건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아니.
“내가 두렵지 않은 겐가?”
감히 자신의 핏줄을 건드리다니.
최명희가 당장이라도 일어나 협회로 달려갈 듯했다.
“회, 회장님!”
박윤태가 그런 최명희를 말렸다.
“지금은 자중하셔야 합니다!”
“자중이라고!”
“회장님.”
가라앉은 박윤태의 눈빛.
그가 조용히 말했다.
“시엘 선발을 앞두고 있습니다.”
“…….”
박윤태의 말 그대로였다.
뷔앙을 쓰러트렸던 최명희, 그녀가 바랐던 대로.
“며칠만 기다리면 회장님께서 새로운 시엘이 됩니다.”
그녀는 곧 시엘로서 지위가 상승한다.
더욱이.
“이정기 군이 뷔앙을 정말로 쓰러트렸다면, 더더욱 확고합니다.”
일곱 체제로 가는 시엘.
단 하나 최명희가 걱정했던 부분이 있다면, 새로운 시엘의 자리를 만들어 주느냐.
‘대체하느냐.’
헌데 지금 들은 소식대로 정기의 손에 뷔앙이 죽었다면 현 시엘은 이건을 제외한 다섯이란 소리고 한 자리가 비었다는 것이었다.
확정적인 시엘로서의 승급.
시엘이 된다면.
‘이성은 더욱 날개를 다는 것.’
모르는 것이 아니다.
허나.
“윤태야.”
고오오.
“나보고 지금 겨우 그깟 자리 때문에 혈육을 건드린 자를 내버려 두라는 것이냐?”
덜덜덜.
“그깟 자리가 아닙니다! 회장님이 20여 년을 기다린 자리입니다!”
박윤태가 최명희의 기세를 겨우 이겨내며 소리쳤다.
과연, 최명희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며칠입니다! 며칠!”
절박한 박윤태의 외침에 최명희가 기운을 거두었다.
“시엘로 확정되고 나서 움직이셔도 무방합니다. 회장님. 그 이정기 군이 며칠을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까…!”
꾸욱.
최명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며칠.
“아니. 그 며칠이라도 내가 방관할 순 없지.”
“회장님 정녕!”
그때였다.
“……!”
두 눈을 치켜뜬 최명희.
쩌저저정.
그녀의 앞의 공간이 깨지듯 부서졌다.
서재를 지키는 마력 방벽이 부서진 것이었다.
깨진 공간 속에서.
살랑.
황금빛 테두리의 편지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이것은…?”
박윤태가 당황하던 찰나, 최명희는 이미 편지를 잡아 뜯어낸 채 읽기 시작했다.
“…….”
씨익.
점점 올라가는 최명희의 입꼬리.
“이 개 잡종 놈이….”
어느새 그녀는 노기를 가라앉히고 박윤태를 보며 말했다.
“그래. 며칠, 기다려보자꾸나.”
* * *
한국 헌터 협회, 협회장실.
“프랑스…, 헌터 협회가 현재 쫓고 있습니다.”
무거운 목소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소재는 아직 파악 중이며….”
보고를 진행하는 정훈, 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공항은 물론 배편으로도 프랑스를 떠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정기에 대한 이야기.
뷔앙과 생츄어리, 미시랭.
프랑스 보르도,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의 헌터가 오백여 명가량 스러졌다.
범인은.
‘이정기.’
헌터들 사이에서 살인이 만연하다고 하나, 그것은 옛일이며 아무리 이정기와 그들 사이에 은원이 있다고 한들 오백여 명을 그렇게 만든 것은.
‘학살.’
그저 학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누구도 지켜볼 수 없는 행위.
“세계 헌터 협회에 정식으로 이정기군…, 헌터를 에키드나로 선정해야 한다고 보고 올렸습니다.”
정훈은 이제 입을 다물었다.
‘하.’
속으로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정훈은 김대정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 굳게 다문 입매.
평소의 혈기 넘치고, 어린아이 같은 협회장의 모습이 아니다.
“협회장님.”
마치 이십사 년 전, 이건과 한국의 헌터들이 마지막까지 올림포스에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같다.
무거운 얼굴로, 그저 몇 날 며칠을 협회장실에 앉아 지냈던 김대정.
정훈은 입술을 떼며 말했다.
“그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스윽.
정훈을 보는 시선.
“사표는 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표.
이번 일을 진행하며, 정훈이 다진 각오였다.
언젠가 자신이 김대정의 뒤를 이어 저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협회장이라면, 그 자리를 잇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시….”
“나가 봐.”
마침내 들려오는 김대정의 목소리.
부들부들.
정훈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었지만.
“건강하십시오.”
곧 등을 돌려 협회장실을 나갔다.
“하아….”
홀로 남은 김대정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실패했는가.’
프랑스에서 올라온 보고.
결국, 이정기가 미시랭과 생츄어리를 꺾고, 뷔앙마저 꺾어버렸다고 한다.
물론 김대정은 뒷사정을 알고 있었다.
‘이건.’
이건을 노린 함정이었고, 이건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도.
그러나.
‘뷔앙을 꺾은 것은 이정기다.’
그 아이는 벌써 이만치나 성장해 시엘이라 불리는 최강의 헌터를 꺾어버렸다.
어디 뷔앙이 그냥 시엘일까.
‘그자들.’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는 그들의 힘을 받은 자였다.
그렇기에.
“나는 옳았다.”
김대정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최명희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도, 이건이 자신이 배신했다고 생각할 것도 알았다.
그네들이 움직이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한 줌 재가 되어 스러지리라는 것을.
하지만 김대정은 그것마저 각오하고 일을 벌였다.
“이것이….”
가라앉았던 김대정의 눈이 빛을 토해냈다.
“옳은 일이다.”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남자.
그가 보여준 미래.
그것은 흔들리던 김대정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 * *
“하….”
끊었던 담배를 꼬나문 정훈.
“어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그마치 이십 년 가까이 김대정을 옆에서 모셨다.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
하지만 아니었다.
‘협회장님!’
김대정이 이번 일을 계획했을 때, 정훈은 온 힘을 다해 뜯어말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협회장이 하려는 일은 이건을, 최명희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그 둘은 단순한 헌터가 아니다.
한 명은 최강.
그리고 또 한 명은.
‘대한민국.’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김대정이 권력에 미쳐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줄을 잘 선다고, 권력에 미쳐 무슨 짓이든 한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건을 만나기 전까지 말단으로 지내왔던 김대정, 그는 헌터들의 가장 밑바닥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또한, 이건을 만나 헌터들의 세계가 어떤지 고루 체험해 본 인물이었다.
살인 기계나 몬스터 따위로 불리는 헌터들의 이미지를 대한민국에서 고쳐낸 것이 바로 김대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일은.
“하아….”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겨우 스물한 살이야.’
이정기의 나이.
협회장은 그저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그 어린아이를 대한민국에 발조차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은 아니었다.
“오….”
꼬나문 담배.
라이터를 꺼내며 정훈은 말했다.
“옳지 않아.”
이번만큼은 김대정이 옳지 않다고, 그렇기에 사표를 던졌다.
애초부터 김대정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했어야지만.
‘나 또한 일말의 두려움이 있던 건가.’
딸각.
정훈이 라이터 불을 켜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을 때.
“담배 끊는 게 그렇게 어렵다는데, 다시 피우실 겁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표 던지셨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자연스레 자신의 옆에 앉는 남자.
“이….”
“청춘을 다 바치셨다고 들었는데, 아깝지 않겠습니까?”
“이정기…, 헌터.”
프랑스에 있어야 할 이정기.
그가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김대정 협회장님이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래도 정훈 부장님은 김대정 협회장님과 생각이 다르신 것 같군요.”
이정기가 정훈을 쳐다봤다.
후드 밑으로 드러난 눈.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볼 때, 이정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옳지 않다고 하셨죠?”
“들으셨군요.”
“그럼….”
이정기가 말했다.
“바로 잡으시겠습니까?”
“……!”
“바로 잡을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정기가 후드를 벗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정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하지만 선택을 하기 전, 한 가지만은 알아야겠다.
“협박입니까?”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은 생각.
김대정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니면….”
“제안입니다.”
정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협회장님.’
마음을 굳혔다.
‘후일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신이 틀리셨습니다.’
다시 눈을 뜬 정훈.
“바로잡겠습니다.”
그가 이정기의 손을 맞잡았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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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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