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2화
102
자신을 이용해 할아버지를 유인하려던 뷔앙과 협회의 함정.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할아버지를 끌어내려는 그들의 계략이 드러났을 때부터 이정기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것이 함정이라면….’
그저 당하고만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이르길.
‘적의 함정을 발견하면, 그것을 이용하거라.’
함정을 잘만 이용하면 적들의 숨통을 더욱 쉽게 끊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이정기는 함정을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
결론은 너무도 쉬운 것이었다.
‘믿음.’
할아버지에 대한 믿음.
겨우 이 정도 함정으로 할아버지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
‘유인당한 척.’
오히려 저들을 유인한다.
‘할아버지라면 절대 지지 않아.’
할아버지에게 더욱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도 적들을 상대하면 확실해질 것이라고.
조손이라는 혈육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이전에 이정기와 이건은 이십여 년을 함께 해 온 동료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이정기는 함정에 몸을 던지고, 저들을 유인했다.
예상한 것처럼 나타난 적.
이제.
‘할아버지.’
기다렸던 할아버지만 모습을 드러내면 끝날 일이었다.
헌데.
쿠콰콰쾅!
몰아치는 폭풍을 막아내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청년.
“누구…?”
대체 이 자는 누구란 말인가.
“네가 정말 그 힘을 이었구나?”
“……!”
“걱정 마. 난 네 적이 아니야.”
커다란 폭풍을 막으면서도 덤덤한 목소리.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자도 왔으니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쿠우우우웅.
급히 이정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팡이를 든 자가 막고 있는 폭풍, 그 위로.
구오오오오!
더욱 거센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저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어떤 것보다 파괴적이고, 그 어떤 것에도 물러서지 않을 힘.
“헤르메스.”
볼텍스.
“네 할아버지의 동료라고 해둘까.”
쿠콰콰콰콰쾅!
떨어져 내린 볼텍스가 폭풍을 먹어치우고 두 남자를 향해갔다.
* * *
“커억-!”
“컥…!”
들려오는 두 개의 비명, 볼텍스에 집어 삼켜진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땐.
주륵.
온몸이 갈가리 찢겨 넝마가 되어 피를 흘리는 모습이었다.
타아앗.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낙하했음에도 사뿐히 한 발로 내려앉은 남자.
“후, 내가 늦었나?”
“이건-!”
이건이 그곳에 서 있었다.
“정기야. 잘 지냈느냐?”
평온한 얼굴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할아버지.
“호오. 그간 꽤나 성장했구나.”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볼 때면 아이처럼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고개를 돌린 이건.
그가 피 흘리는 두 남자와 뷔앙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동풍과 서풍, 그리고 심판이 한자리에 모였군.”
“이건-!”
“요리사. 내가 전에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쩌릿.
이건이 뿜어내는 기운이 서 있는 모든 자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내 귀여운 손자를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고.”
“……!”
“네 놈을 살려준 이유이긴 하지만, 손자놈을 건드려선 안되지.”
당혹으로 일그러진 뷔앙의 얼굴.
하지만 그는 곧 숨을 내뱉으며 평온을 되찾았다.
“크흐. 역시나 아직도 오만하구나. 이건.”
그때, 양옆에 서 있던 남자들에게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그와 동시에 그들의 상처가 없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여유로운 척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저 둘은 이미 각성을 끝낸 이들이다.”
뷔앙이 이제는 자신감을 찾고 가슴을 폈다.
“오늘 너는 이 자리에서…!”
파아아앙!
가볍게 내지른 주먹.
“커억!”
다시금 오른쪽의 남자에게서 비명이 들려왔다.
“각성이 뭐?”
“……!”
이정기는 그 모습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더 강해졌어.’
이제는 허탈할 지경이다.
자신도 할아버지에게 자극을 받아 더욱 성장에 박차를 가했는데, 할아버지의 성장은 자신과도 궤를 달리했다.
[…….]
메티스는 또다시 겁먹었는지, 말조차 아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기의 생각이 틀렸음이 곧 밝혀졌다.
[더욱 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질린 듯 떨리는 메티스의 목소리.
[하지만 너무나 불안정합니다.]
“……뭐?”
[아르테미스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불안정함입니다. 저 남자…, 그저 넥타를 먹어치우고 있을 뿐입니다.]
“……!”
할아버지.
[겨우 억누르고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끄럽다.”
들려오는 이건의 목소리, 그리고 이건의 눈은 이정기를 향해 있었다.
“……! 할아버지 설마…!”
메티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괜히 손주 놈 걱정시키지 마라. 이 힘은 내가 알아서 잘 조절하니까.”
“그의 말이 맞아.”
자신을 헤르메스라 말한 청년이 말했다.
“그는 불안정성을 오히려 이용하고 있어.”
“……!”
“평범, 아니 어떤 신족도 하지 못할 테지만 그의 특이성이 가능케 해주고 있는 거니 지금 당장은 걱정 안 해도 돼.”
지금 당장은.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
“예나 지금이나 센 척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이건.”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배알이 꼴린 듯 뷔앙이 말했다.
“네 놈은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는 버릇이 여전하구나.”
서로가 마주 보며 기운을 끌어낸다.
하지만 그때.
“할아버지.”
이정기가 헤르메스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 말이냐?”
“예.”
이정기는 더욱 나아가며, 네메아에 마력과 넥타를 부어 넣었다.
화르르륵!
네메아의 변형으로 이정기의 머리에 씌워진 사자 투구.
그곳에 불꽃이 일어나며 마치 사자의 갈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좋은 힘이구나.”
“제가.”
이정기는 이건의 앞까지 나서며 말했다.
“뷔앙을 상대하고 싶습니다.”
“뭐…?”
“네 놈이!”
의아해하는 이건, 그리고 분개하는 뷔앙.
“괜찮겠습니까?”
“흐….”
작게 미소짓는 이건.
“흐하하하하핫!”
이건이 곧 광소라 말할 수 있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정기가 못 본 사이에 남자가 되었구나!”
정말로 기쁘다는 목소리를 내는 이건.
“그래. 손주가 원한다면 이 할애비가 들어줘야지. 그렇게 하거라.”
“감사해요. 할아버지.”
“그럼 나는 선풍기 바람들이나 상대해보마.”
그렇게 움직이는 이정기.
“이리 오거라.”
이건이 손을 내뻗자, 서풍과 동풍이라 불리던 자들이 와류에 휩쓸려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여차하면 헤르메스 놈이 도와줄 거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정기.
“이….”
그곳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뷔앙이 마력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 * *
고오오.
과연, 시엘이라 불리는 헌터의 힘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거기다….
[넥타의 레벨이 4로 추정됩니다.]
뷔앙의 넥타 레벨은 현재의 자신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분명 자신이 뷔앙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건, 그 개자식도 모자라 그 손자놈까지 나를 무시하는구나.”
뷔앙도 그것을 아는지 분노로 이정기를 보고 있었다.
고오오오!
휘몰아치는 마력, 뷔앙의 분노에 감응하여 일깨워진 그것들이 사방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내 오늘 네 놈을 한 줌 독물로 만들어 이건의 아가리에 처박을 테다.”
클로에 맺혀가는 검은 마력.
이정기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우웅.
관자놀이에 돋아나는 황금 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이정기는.
“달의 이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쿠쿠쿵!
공간이 울리며 밤낮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네 놈이 어떻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해가 떠올라있었을진대, 지금 그들의 하늘 위로는 커다란 만월이 드리워져 있었다.
“성역을!”
성역.
[올림포스에 진입하셨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성역입니다.]
[신격이 일부 활성화됩니다.]
꽈아악.
온몸을 조여오는 이 느낌.
육체가 힘을 되찾음에 따라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르테미스의 성역을 빌린 건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헤르메스의 목소리.
“……!”
이정기가 잠시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달의 이면을 사용하면서 자신이 포함시킨 것은 오직 뷔앙뿐.
즉, 헤르메스는 자력으로 성역에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그래. 무슨 짓이든 해 보거라. 하지만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푸슈우우우욱!
뷔앙이 들고 있는 클로에서 퍼져나오는 연기.
그 운무는 짙은 보랏빛을 한 채 공기마저 녹여내고 있었다.
“나 또한 신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뷔앙이 짙은 독무에 휩싸여 붉은 눈동자만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뷔앙의 신형이 사라졌다.
“네 놈이 내 독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말이야!”
카카카캉!
클로와 맞부딪힌 이정기의 네메아.
그 두 개가 불꽃을 터트리며 부딪히고 있었다.
푸슈우우욱.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뿜어져 나오는 독무.
이정기가 입을 닫았음에도 독무는 코와 귀, 눈과 피부로 이정기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거라!”
벌써 승리를 확신한 듯, 소리치는 뷔앙.
이정기는.
까득!
건틀렛을 움직여 그대로 뷔앙의 손을 붙잡았다.
클로의 날 사이로 이정기의 손가락들이 들어가 뷔앙의 손등을 짓눌렀다.
“힘이 대단하구나. 하지만 어차피 그럴수록 나의 독이 네 몸을….”
짙은 미소를 띠운 채 이정기를 향해 말하던 뷔앙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언가…, 무언가 이상하다.
“네 놈!”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뷔앙의 얼굴.
“어떻게 독무 속에서 멀쩡한 거냐!”
독에 중독되어 시퍼렇게 질렸어야 할 이정기의 안색이 너무나 흰 빛을 띠고 있었다.
꾸우욱.
뷔앙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더욱 주는 이정기.
그가 천천히 말했다.
“저도 이제는 독에 일가견이 있거든요.”
투캉!
솟구쳐나온 네메아의 손톱이 뷔앙의 손바닥을 찢으며 박혀 들어갔다.
[히드라의 독이 주입됩니다.]
그 사이로 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짙은 보랏빛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끄….”
일그러진 뷔앙.
“끄아아아악-!”
그가 고통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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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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