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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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예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스폰서.’
자신은 윤문산의 스폰서를 자처했고, 자신이 테베 길드를 승리로 이끈 것으로 서로 간의 스폰서쉽이 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확인은 없었기에.
‘증거.’
그 증거를 남기고자 할 것이라고는 충분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증거가 이런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께 손을 벌린 것이 그 증거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약혼이라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다. 추후 결혼을 약속하는 의식을 하자는 것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할머니.
이정기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자신보다 더 강한 강자를 상대하라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삐질.
약혼은 다르다.
이정기가 몸으로 체득했던 수많은 기술들, 느꼈던 감정들.
사냥하며 배운 경험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 그건….”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없었다.
이정기의 상식으로 결혼이란 사랑하는 이들이 평생을 함께하길 약조하는 것이라 알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열렬한 사랑 끝에 자신을 낳으신 두 부모님과 같은 분들이 하시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최명희는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할미는 이미 두 번이나 다녀왔다.”
“…….”
어디 근처 마실이라도 다녀온 듯 말하는 최명희.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정기를 구해준 것은 윤문산이었다.
“올림포스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성을 만나본 경험은 없겠죠?”
“네.”
“지구로 귀환하고서도 수많은 위업을 달성했으니, 연애 경험도 전무하겠고요.”
“그렇습니다….”
무언가.
“이정기 헌터가 팀장으로 있는 이성의 팀에 여성 헌터가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헌터와 별다른 사이는 아닌 것 같더군요.”
무언가 이상하다.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닌가?’
아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다름 아닌 윤문산 아니던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흡족하고 있는 윤문산.
“하민이도 마찬가지입니다.”
“……?”
“워낙에 바삐 살며, 이 모자란 아비를 돕다 보니 공부와 일에 치여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봤습니다.”
그제야 이정기는 정신을 차렸다.
윤문산은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닌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라고.
“자, 잠깐!”
이정기가 윤문산을 향해 말했다.
“윤하민 양의 의견은 없는 겁니까? 자식분들의 의견을 크게 따르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자식을 도구로 여기는 손민기와 달리 윤문산은 자식이라는 개인을 인정하고 존중해준다고 들었다.
하지만 알아야만 했다.
약혼이라는 너무 생소한 단어와 의미에 혼란스러운 이정기는 똑바로 생각했어야만 했다.
“그건….”
윤문산이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하민이도 허락한 일입니다.”
애시당초 윤하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는 걸.
* * *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는 이정기.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의외로구나.”
그런 이정기를 향해 최명희가 말했다.
“네가 이 할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다 보이고.”
지금껏 이정기는 최명희의 앞에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제야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정기는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도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입가를 말아 올리는 최명희.
하지만 그녀의 표정 또한 곧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
“이유에 따라서는 인생의 중대사라 불리는 결혼조차 거래를 위한 카드로 사용되어야 하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최명희.
이정기는 그런 최명희를 향해 말했다.
“다른 성혈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것이 조금은 서운하다.
“할머님 또한 이득을 위해 자식들을 결혼시킨 적은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결혼했던 아버지.
그건 분명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다른 성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성 그룹의 주인배, 이성 길드의 주형태, 백두 길드의 주영은.
그들 중 누구도 할머니가 원하는 결혼을 한 적은 없었다.
‘정략을 위한 혼약일지라도, 그들 스스로가 원해서 한 것이다.’
왜 헌데, 자신에게만.
“정기야.”
평소와 다르게 자신을 부르는 할머니.
“예.”
이정기는 긴장한 채 할머니를 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지구에 와 한 일들이 무엇인지 아느냐?”
“…….”
“네가 이번에 손인수를 꺾고, 윤문산의 편을 들어준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지 않는다.
자신이 바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님에도, 다른 이가 보았을 때 어찌 보일지 안다.
“이성을 원하느냐?”
이성에 대한 반기.
혹은 찬탈.
현재 이성은 세 개로 나뉘어 있지만, 훗날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를 지배하는 자가 바로 이성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주인배와 주형태.’
그 둘이 가장 정상에 가까운 사람들.
오랜 시간 그 구도는 깨지지 않은 채 서로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정기가 지구에 와 한 행동들, 그로 인한 결과들.
마지막으로 이번 윤문산 대표의 일은….
‘이성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굳어진 구도를 깨고, 왕좌를 차지하겠다는 찬탈자의 선포나 다름없는 것임을 안다.
“원합니다.”
“……!”
“돌아가신 아버지가 본디 이성의 후계자라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
가라앉은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둘.
“만일 아버지께서 올림포스에 가지 않으셨다면, 이성은 아버지의 것이 되었을 거겠죠.”
“그랬겠지.”
“그래서입니다.”
이정기는 또렷한 눈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가졌어야 할 것. 저는 그걸 아버지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최명희가 말했다.
“혈육 간의 상잔이라 해도 말이냐?”
혈육 간의 상잔.
가벼이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이성.
그것은 하나의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후계가 확실해 제국을 이어받는 황태자가 있다면 모를까, 찬탈자가 나타나는 순간부터는 내전이 발발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이성이 혈육입니까.”
“뭐라?”
최명희의 가느다란 눈빛, 그건 약간의 분노를 품고 있었다.
“할머님이 모르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백두 길드의 일, 이번 일까지도요.”
“…….”
“제가 생각한 혈육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전부 없애겠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실수해선 안 돼.’
지금 할머니는 전에 없던 시험을 하고 계셨다.
지금까지의 시험은 결과에 따른 응당한 보상만 있었다면.
‘지금의 시험은 자칫했다간 벌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니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자신의 진심을 말하자.
“아닙니다.”
아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성혈들의 파멸이 아니다.
‘아버지의 가족들, 그리고….’
아버지는 그들의 파멸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이성, 그렇다면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돌려놓겠습니다.”
“……!”
“제가 생각하는 혈육으로, 아버지가 함께 겪고 지내왔던 성혈들로 바꿔놓겠습니다.”
잠시간의 정적.
“흐, 흐하하하하핫!”
할머니가 호쾌한 웃음을 가감 없이 터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잦아든 웃음소리.
최명희는 다시금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으나, 그 입가와 눈에 맺힌 호의는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내가 그 길을 도울 순 없겠구나.”
“…….”
“내가 나섰다간 네가 원하는 것들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니 말이다.”
“할머님께 손을 내밀지는 않겠습니다.”
더욱 호의적으로 웃는 최명희.
“하지만 너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이정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게이트가 존재하던 시기엔 강력한 힘으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었을 터다.”
마치.
‘할아버지.’
이건처럼.
그의 강력한 무력 앞에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했고, 할아버지가 원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졌다.
‘패왕.’
패왕의 시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게이트라는 위협이 사라진 지금, 홀로 강력한 힘은 자신들을 지켜줄 방패막이가 아니다. 외려….”
현재.
“자신들을 찌를 창이지.”
그것이 현실이었다.
“오직 힘 하나만으로 나섰다간,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간 네가 상대해야 할 것이 이성뿐만이 아닌 전 세계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십사 년.
그것이 바꾸어놓은 세상이었다.
그 사이 세계에는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 시스템을 깨부수려 든다면.
‘공동의 적.’
적이 될 것이라고.
“그러기에 윤문산 대표의 제안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뭐,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만 네 앞길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은 좋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할머님.”
인사를 마치고 서재를 나선 이정기.
최명희는 박윤태조차 서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한참을 서재에 앉아있었다.
“…….”
씁쓸하고도 아련한 눈.
“오늘은….”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네가 사무치게 보고 싶구나.”
자신보다 먼저 떠나버린 자신의 자식이.
“강아.”
그 이후로도 최명희는 한 시간을 더 서재에 앉아있었다.
* * *
“윤문산 대표의 제안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강민혁이 말했다.
“일반인들이라면 모를까, 성혈들에게 있어 정략혼은 세력을 불릴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으니까요. 회장님이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나….”
주인배와 주형태는 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더욱이 윤문산 대표는 거의 유일한 대권 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의 다른 성혈들이 손을 쓸 테지만, 이미 회장님이 윤문산 대표의 손을 들어준 이상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강민혁은 그렇게 표현했다.
“회장님의 선물입니다.”
오랜 시간 올림포스에서 나고 자란 자신이 응당 받아야 했을 성혈들의 특권을 받지 못했기에, 뒤늦게나마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이 싸움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숨이라도 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
그래도 쉽지 않다.
“고민해볼게요.”
머리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식으로는 안 돼.’
자신이 바라온 것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리면 결코 그럴 수 없었다.
특히나.
‘할아버지.’
아직 이건에게조차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지 않았던가.
“손민기 대표의 일로 주인배 부회장이나 주형태 길드장은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것….”
그때였다.
“손님이 왔답니다.”
이진석이 방에 들어와 말했다.
“정훈 정보부장이 찾아왔습니다.”
정훈이 찾아올만한 일.
테베와 오신의 일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강민혁과 이진석이 이정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예상했던 그 순간이 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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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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