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17화
092
다시 자리에 앉은 윤문산.
그의 표정은 또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경악을 지우지 못한 얼굴.
‘오히려 얕보았던가.’
눈앞의 이정기는 결코 자신이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의 약점과 능력을 명확히 판단하여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정기, 이 자는…, 정치를 할 줄 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거미줄에 옭아매여진 기분.
“길드전은 일어납니다. 테베가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정기는 더욱 거침없었다.
“아시겠죠. 뻔한 결과를.”
“…….”
“그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도로의 끝에 도달했다.
갈림길, 어느 길을 걷냐에 따라 무저갱과 같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더욱 빠르게 내달릴 고속도로일 수도 있다.’
윤문산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거래라….”
“스폰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긴장한 윤문산의 태도는 아까와 달랐다.
“무엇을? 그대의 심계가 예상 이상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지만.”
결국, 달라질 것은 없다.
“세력 하나 없는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오신 길드, 이성 그룹, 이성 길드.
그 무엇과 비교해도 보잘 것 없는 이정기.
대체 그가 무엇을 자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일까.
“회장님을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그것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최명희, 그녀가 나선다면 이 모든 일은 그저 헤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끝맺음 지어진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결코 발 담가선 안 된다.’
최명희가 이정기를 어여삐 여겨 이번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도 없진 않았으나 그래 봐야 미래가 없다.
남의 힘에 의존한다면, 결국 이정기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아닙니다. 제가 제공할 수 있는 건….”
씨익.
자신감 넘치는 미소.
“저 하나뿐입니다.”
잠시간의 정적.
“허.”
윤문산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정기 헌터가 빠른 성장세로 성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겨우 혼자라…, 자신의 힘을 너무 맹신하는군요.”
다시 일어선 윤문산,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자리에 앉지 않겠다 다짐했다.
이 만남은 윤문산, 자신이 한 일 중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봐야, 중위권의 랭커인 로베르트를 상대한 게 전부 아닙니까? 오신 길드에는 손인수가 있습니다.”
퍼스트 라인의 랭커.
아무리 이정기라도 그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럼.”
뒤돌아선 윤문산.
“주병훈 사장이 절 죽이려 했다 했죠.”
“…….”
“누구를 보냈을 것 같습니까.”
그런 건, 더 이상 듣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강민혁입니다.”
흠칫.
멈춰선 윤문산, 그리고 그의 앞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분명 없었던 존재인 강민혁이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서를 남기고….”
“가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아니다.
윤문산은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테베를 이끌던 길드장.
그 자체로 헌터란 뜻이었다.
한 번 보았던 강민혁의 기운, 그 기운이 더욱 날카로워졌을망정 다르지 않다.
“제가 원하는 건 한 가지.”
이정기도 일어섰다.
“그저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먼저 방을 나서려던 윤문산, 이정기는 그보다 먼저 일어서 자리를 떴다.
“하. 하하.”
홀로 남은 윤문산이 작게 웃음을 내었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아직 연락은 따로 없죠?”
“예.”
이정기의 말에 강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미흡했나요?”
혹시 그날, 자신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
“……그럴 리가요.”
강민혁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너무 놀랐습니다. 아무리 제가 메시지를 통해 도와드렸다고 하나, 그렇게 잘 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었다.
윤문산 대표를 만날 때, 강민혁이 모습을 감춘 채 이정기가 준 메시지 아이템을 통해 계속해서 조언을 해주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백 년 묵은 구렁이나 다름없는 정치인을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나.
‘쉬웠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것 또한 똑같다.
‘사냥.’
무언가를 사냥하고자 하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그 사냥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늘 아침 오신 길드와 테베 길드의 길드전이 확정됐습니다.”
이진석이 입을 열었다.
이미 그에겐 강민혁이 살아있는 것은 물론, 배를 바꿔 탔다는 것도 말해주었었다.
처음에는 강민혁을 믿지 못하던 이진석이었지만.
‘주병훈이 강민혁 쪽 인물들을 다 제거한 걸 보고, 의심을 조금 거뒀지.’
완벽히 의심을 지우지는 않겠다던 이진석이었다.
“길드전의 방식도 확정됐는데….”
이진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토너먼트나 결투 방식이 아닌 총력전입니다.”
“……!”
“총력전이 허락된 건 몇 번 없는 일인데….”
총력전.
그건 정말 전쟁이나 다름없는 방식의 길드전이었다.
던전 한 곳을 정하여, 던전 내에서 자웅을 가리는 방식.
항복을 선언하거나.
‘거점에 깃발을 꼽거나.’
왕을 패배시키면 길드전은 종료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방식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허락되지 않았던 방식.
“아무래도…, 이성 그룹이 손을 쓴 모양입니다.”
강민혁이 말했다.
길드전의 방식을 정하는 것은 협회.
‘김대정.’
그런 협회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김대정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몇 안 되었다.
이성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
“제가 이 싸움에 끼어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거겠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치를 보고 있는 김대정은 아마 자신이 끼어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강민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치권의 인물들만큼이나, 협회 아니 김대정 협회장의 계략은 심후합니다.”
김대정.
“정보력은 물론, 권력과 맞닿아있는 협회장이 그 사실을 모르고 진행했을 가능성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는 건.
‘김대정 협회장이 내 위험을 방치했다는 건가.’
몇 번 자신을 노리고 실패한 뒤로 더욱 조심하던 것이 아니었나?
“아니면 이성의 압박이 생각보다 더 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협회장 선발이 시작되니까요.”
중요한 건 지금 김대정이 아니었다.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대하지 말라는 말.
“어차피 테베가 패배해도 윤문산 대표가 잃는 것은 테베뿐이니까요.”
괜히 자신을 더 끌어들여 이성에 밉보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쭈욱.
손깎지를 낀 채 기지개를 켜는 이정기.
아직 무언가 확정하기엔 이르다.
그래도.
‘불러줬으면 좋겠군.’
나름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었다.
결국, 오신과 테베의 사건이 파국에 이르게 된 것은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
“일단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기다려보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또다시 며칠이 흘렀다.
“오늘입니다.”
테베와 오신의 길드전이 시작되는 당일.
“연락은, 아직 없습니다.”
당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윤문산 대표 측에서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그래도 준비는 해두셨죠?”
“물론입니다.”
이정기의 물음에 답하는 이진석.
“타 길드의 길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용병 자격이 있어야 하기에, 미리 신청해두었습니다.”
용병 자격은 이미 취득한 상황.
“오신 쪽 용병 상황은 어떻죠?”
“사실 다른 용병은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오신과 테베의 전력 차이가 세 배가량 납니다.”
“…….”
“거기다 테베는 이번 길드전 발표 이후 이탈한 헌터의 수가 삼백 단위를 넘습니다.”
최악이라 말할 수 있는 상황.
“이성 쪽 인원도 따로 보고 받은 바 없습니다.”
과연 한 번 보았던 손인수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자신감.’
어차피 그 격차가 거대한 만큼 굳이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
“또, 협회에서도 오신 쪽에는 용병을 허용하지 않았고요.”
거기다 협회는 길드전을 허용했다 한들, 최소한의 규제만큼은 가하고 있었다.
전력 차가 크게 나는 상황인 만큼 길드전에 참여할 수 있는 오신의 인원을 일부 제한하고, 용병의 고용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테베 쪽 용병 등록 가능 시간은….”
이진석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네 시간 뒤까지 가능합니다.”
두 시간 후 시작되는 길드전.
전략상의 이유로 길드전 중간에도 용병의 난입은 가능하다.
하지만 과연 아직까지도 연락을 취하지 않은 윤문산이 두 시간 안에 연락을 하느냐 하는 문제.
“일단은 출발하죠.”
일단은 길드전이 진행될 장소 근처에 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차 대기 시켜놨습니다.”
강민혁은 따라가지 않은 채 이진석과 이정기 둘만이 저택을 나섰다.
대기시켜놓은 차에 올라타려던 그 순간.
“이, 이정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은 쉬라고 했을 텐데.”
김윤태.
그가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지금 테베랑 오신 길드전 가는 거지?”
“…….”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나도 네가 윤문산 대표 만난 걸 보고 혹시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뭐.
‘자기 생각은 아닌 듯싶지만.’
이정기가 김윤태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그래서 왜?”
“나….”
김윤태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도 따라가고 싶어.”
“…….”
“알아. 이번 길드전에 끼면 영락없이 너랑 한배를 타게 된다는 거.”
김윤태가 눈치를 챈 것이 김윤태 스스로 한 것임은 아닐 것이다.
‘주영은.’
아마 그녀가 상황을 보고 말해준 것이겠지.
하지만.
“고모도 아나?”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것은 김윤태의 생각인 듯했다.
이번 길드전, 어쩌면 주병훈과 완전히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한 발 걸친다는 것은, 김윤태 또한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는 것.
“이미 내 목숨 줄은 네가 잡고 있잖아?”
“…….”
잠시간의 고민.
“좋아.”
“고, 고마워!”
김윤태가 차에 올라타고, 이정기의 자동차는 빠르게 테베와 오신의 길드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두 시간, 장소에 도착한 그들.
“대기하겠습니다.”
이미 길드전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연락 없는 윤문산.
‘결국….’
연락하지 않을 생각인 걸까.
‘테베를 포기하겠다고?’
그들에게 테베는 단순한 의미가 아닐 텐데.
또다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마지막 한 시간을 거의 앞두었을 때.
지잉. 지이잉-.
이정기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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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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