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강의 손자-88화 (88/284)

제4권 13화

088

“당신이 묻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유시아의 말.

“…….”

묵묵히 반응없는 최명희.

‘진짜야.’

이정기는 그 반응에 유시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아직 모르는 뒷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당신에 대한 복수를 위해 준비했던 수십여년의 시간….”

유시아는 어느새 활을 내려놓고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던전 공략을 강행했을 것이라던 것과 달리, 여제. 당신은…, 던전의 불안정성을 깨닫고 던전 공략을 늦추었다는 것을.”

유시아의 입에서 토로되는 이야기.

“사고를 인지한 당신이 우리를 찾아 나서려 했을 때, 이미 사건은 묻힌 뒤였다는 것을.”

그건 할머니가 이야기해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행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할머니는 원하지 않은 일.’

그저.

“수하들이 당신 몰래 진행한 일들이었음을.”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유시아의 증오와 분노는 이미 유시아를 뒤틀어놓았다.

이제 와 본래의 범인이 다르다고 무슨 소용일까.

“무슨 소용이겠느냐.”

최명희 또한 그러했다.

“결국, 내 밑의 것들이 벌인 짓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에게 죗값을 치렀지요.”

그녀는 스스로의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부덕으로 인해 일어난 일, 내 죄를 부정할 생각은….”

“용서하겠습니다.”

주륵.

유시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하지만 그 눈물이 떨어지는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언니에게 배웠거든요.”

“……!”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잠시 자신을 향해왔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정기는 그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수십여 년, 복수와 증오로 똘똘 뭉쳐 망가졌던 유시아.

그런 유시아가 마침내 복수의 껍질을 벗어내었다.

“…….”

그리고 또 한 명.

“고맙다.”

할머니.

할머니가 저질렀던 죄악, 하지만 그 죄악은 사실 온전한 할머니의 잘못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할머니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

이 모든 것이 가능케 해준 사람.

이정기는 저 둘 사이, 빛나는 따스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어머니.’

어머니가 남긴 유산.

그것이 마침내 여기까지 이어져, 저 둘을 화해시키고 평안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유시아가 웃음기를 지우며 최명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심하십시오.”

급작스러운 경고.

“당신도 그들의 표적 중 하나이니까요.”

* * *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

지글지글.

곳곳에선 고기들이 팬 위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부우어어어엉.

달 사냥꾼의 은신처.

빛나는 만월 밑에.

“다들…, 미안해.”

유시아와 달 사냥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자매들에게 못 할 짓을 했어.”

유시아,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장작불 근처에 모여 있는 자매들을 향해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어.”

그들은 최초, 상처받은 이들이 모인 것이었다.

가까운 친족, 혹은 세상, 그 무엇이든 간에 상처받은 자들.

유시아는 그녀들을 여기에 모으며 다시는 상처 입는 삶을 살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국, 유시아가 그녀들을 상처 입혔다.

“말로 끝나진 않을 거야. 너희가 원한다면, 용서받기 위해 그 무엇이든….”

그녀를 보고 있는 수많은 자매들.

“그렇다면.”

박혜성, 그녀가 일어서 말했다.

“앞으로도 저희 곁에 남아주세요.”

“……!”

“이대로 책임을 진다느니 하는 이유로 저희를 떠나실 생각은 아니겠죠?”

“너희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시아.

오히려 박혜성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제 저희의 가장 큰 언니는 사슴이시니까요.”

“….…..”

하나둘, 자매들은 유시아와 박혜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힘들긴 했지만….”

“우리가 힘들 때 사슴도 우리에게 잘 해 주었잖아?”

“사슴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도 없었겠지.”

미쳤었던 유시아로 인해 고통받았던 그녀들.

하지만 그녀들에게 유시아는 가장 큰 언니이자, 진실된 가족이었다.

가족의 실수.

“용서할게요.”

그것을 용서치 못할 것은 없었다.

“너희들….”

미소 짓는 유시아.

그 눈만큼은 일그러져, 눈물을 맺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는 분명 선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니.’

유영아, 이 또한 그녀가 남긴 유산이리라.

“만일 내게 참지 못하겠는 자매는 언제든 이야기해. 너희가 어떻다 해도, 나는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유시아.

“일단 오늘은 먹고 마시죠! 이게 얼마만의 평화에요. 사실 사슴이 그렇게 되고, 몇 년 동안 숨죽이느라 죽는 줄 알았거든요?”

“술도 못 마셨었잖아?”

“바베큐는 아직이야?”

그렇게 시작된 파티.

편안한 옷차림으로, 고기를 굽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 그녀들.

찬란한 만월의 달빛 아래, 자연과 어우러진 그녀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삶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순수해 보여.’

죄를 지어도, 용서할 수 있는 여유.

가족이란 울타리가 정말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삶.

“너한테도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이정기에게 유시아가 다가와 말했다.

“내가 아무리 미쳤었다고 한들, 너를 죽이려 했던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야.”

유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 어떠한….”

“이모.”

이정기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모라고 불러도 되죠?”

이성에서 만났던 가족들.

같은 피가 흐른다해도, 가족이라 부르기조차 싫었던 그들과 달리 유시아는 많은 것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이 핏빛으로 일그러져있대도, 그녀에게 어머니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물론이지.”

이정기와 유시아가 마주 보며 웃어 보였다.

“그럼 우리한테 조카가 생긴 건가?”

누군가의 목소리.

“그렇네! 사슴이나 마녀랑은 우리 모두 자매니까.”

이정기를 향해 오는 수많은 시선들.

이정기는 곧 당황해 저도 모르게 슬쩍 물러섰다.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킨 그녀들이 다가와 이정기의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귀여운 조카!”

“조카가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냐고!”

“어디 조카 한 번 안아보자!”

이정기를 향해 달려드는 그녀들.

스윽.

이정기는 몸을 움직여 순식간에 그녀들과 거리를 벌렸다.

“어딜 가!”

그렇게 파티는 이정기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

떨어져 앉은 채 그 모습을 보던 이진석.

“좋겠다.”

그는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옆에 앉아도 되나요?”

박혜성, 그녀가 슬쩍 이진석의 곁으로 다가왔다.

“…….”

잠시 멈칫하는 이진석.

박혜성은 이진석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지만, 그 옆에 앉아, 술잔을 들어 올렸다.

“원래 저희는 비혼을 맹세했지만….”

“예?”

“이번 일로 사슴이 연애는 허락해주지 않을까요?”

“예에에?”

그런 이진석의 눈으로, 이진석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자매들.

“저희가 남자를 못 만난 지 좀 오래돼서 말이죠.”

“……!”

이진석의 얼굴이 마치 마력을 끓어 올린 것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달이 지고, 해가 뜨려는 새벽.

이정기와 유시아는 둘이 함께 신전에 있었다.

“그래서 언니가…, 그랬다니까?”

자매들이 파티를 하는 동안, 유시아는 이정기에게 유영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유영아의 어린 시절, 그리고 유영아가 성장하며 겪은 일들.

“따뜻했어. 언제나.”

그녀가 기억하는 유영아에 대해.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지만, 이정기가 어머니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이제….”

이정기가 문득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어쩌실 겁니까?”

사슴의 광증은 멎었다.

그리고.

‘넥타.’

그녀의 안에는 넥타가 존재했다.

불안정한 각성 상태에 빠져 있었던, 넥타.

하지만 이번 일로 그녀의 넥타의 불안정성은 가라앉았고, 그녀는 넥타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달 사냥꾼의 복수가 끝이 났다.’

원망과 증오도 사라졌다.

이제 이들은 어찌 되는 것일까.

“우리는 달 사냥꾼이야.”

유시아가 말했다.

“물론, 예전 같진 않겠지만 히든 길드로서의 정체성은 지켜나가야겠지?”

“…….”

“우리도 우리의 역할이 있으니까.”

그 역할이 무엇인지, 조금은 감이 온다.

특히나.

“그게 네 앞길에도 도움이 될 테고.”

“달 사냥꾼이 제게 부스럼이 되는 건 결코….”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유시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마치, 할머니를 향해 경고하던 그 때와 같다.

“느낄 수 있어. 네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라는걸.”

“…….”

“그렇기에 늦든 빠르든 그들이 널 노려올 거라고.”

자신을 향한 경고.

“그 남자가 내게 힘을 건넨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뭐, 이건이 다시 날 찾아올 것을 대비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남자.

“그 남자는 대체 누굽니까?”

유시아에게 혼돈의 세대가 될 수 있도록 넥타를 주었던 남자.

그리고.

‘예언자.’

그는 분명, 유시아를 향해 예언했고 그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자신을 통해 유시아는 분명 그렇게 기다리던 언니, 유영아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 남자는….”

유시아가 말했다.

“내 의제야.”

“의제?”

의제라 하면 의남매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세 개의 히든 길드를 알겠지?”

세계의 음지에 암약하는 거대한 세 개의 히든 길드.

사실상 그들이 헌터 세계의 음지를 전부 장악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 곳은 달 사냥꾼.

그리고 또 한 곳은.

“태양.”

히든 길드 태양, 영어 명칭으로는 썬으로 통용되는 곳.

“그곳의 길드장이야.”

“……!”

“의남매라 하지만, 그건 옛적의 일. 지금은 그들이 어디 숨어있는지조차 몰라. 나는 그 남자를 쫓을 거야.”

유시아의 말에 이정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걱정해주는 거야?”

끄덕.

“걱정할 것 없어. 그보다….”

그녀가 이정기를 향해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내게 받아야 할 것을 줄게.”

“……?”

“이건 원래 언니의 힘이기도 했으니까.”

화아악-!

유시아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황금빛.

그 황금빛이 이정기에게 깃들기 시작했다.

“만월의 계약이야.”

이정기의 관자놀이에, 두 개의 황금빛이 깃들어 표식을 남기기 시작했다.

마치 뿔처럼.

그리고 곧, 빛은 사라지고 뿔과 같은 표식 또한 사라졌다.

“너는 남자이기에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겠지만, 세계의 달 사냥꾼들은 널 남매로 인정하고 도움을 줄 거야.”

따스했던 손길.

이정기는 그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정기의 고개가 훽 돌아갔다.

부어어어엉.

멀리서 들려오는 올빼미 소리.

“…….”

달 사냥꾼들이 키우는 올빼미와는 무언가 조금 다른 느낌.

퍼득!

그것은 곧 날개를 펼쳐 어딘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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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 일 | [email protected]

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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