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12화
087
아득한 정신의 세계.
‘기절한 건가.’
자신이 결국 과한 힘의 사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투 도중 정신을 잃은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하지만, 이정기는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네가 언니의 아들이구나.’
마지막 순간, 그리움으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말하던 유시아.
자신은 결국 광증에 사로잡힌 유시아의 정신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단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마음을 조금 놓아도 된다.
이정기는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유시아가 정신을 차리던 때, 느껴졌던 따스한 기운.
‘정령.’
분명 자신의 앞에 나타난 그 정령이 사슴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왔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도대체 그 정령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사냥의 의식이 치러지는 공간에 정령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령은 풍부한 자연력과 정령력 사이에서만 존재하기에, 공간에 존재하던 정령은 아니란 소리였다.
그 말은 즉.
‘나나 사슴.’
둘 중 한 명에게서 파생된 정령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아니야.’
확신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능력을 사용하며, 누구보다 빠르게 훈련을 통해 성장했던 자신.
하지만 단 한 가지 재능이 없는 것이 있었다.
‘정령.’
어머니가 정령을 다루었다기에, 어린 나이에 자신도 정령을 다루고 싶어 했다.
그런 이정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건이 도움까지 주었건만.
‘나는 결국 정령과 계약할 수 없었어.’
어떠한 정령도 자신과 감응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슴의 능력일까.
‘아냐.’
그 또한 아닐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
그때였다.
화아악.
이정기의 감은 눈앞으로 환한 빛무리가 나타났다.
눈을 떠 앞을 본 이정기.
“……!”
그곳에 자신이 보았던 그 정령이 있었다.
“어떻게…?”
이곳은 자신의 정신세계, 그런데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사슴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정령이 자신의 것이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분명 계약한 적이 없건만.
쿵.
두근거리는 가슴,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하아.”
가슴이 저리고, 머리가 뜨겁다.
그제야 이정기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령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언니.’
사슴의 목소리.
“어머…, 니.”
이미 자신이 특수한 정령과 계약한 상태라면, 그 어떤 정령과도 계약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
눈앞에 있는 정령.
그것이 점차 다가와 이정기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아아….”
왜 몰랐을까.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온기.
‘느껴본 적 있어.’
할아버지의 고된 훈련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나, 왜인지 모를 그리움에 구석에 숨겨 흐느낄 때 이런 따스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언제나….’
이정기는 알 수 있었다.
‘언제나 함께 계셨구나.’
이 정령이 어머니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유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자신에게 온전히 남아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는 것이었다.
-고마워.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이 느껴졌다.
-고마워, 아들.
이정기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저 숨죽였다.
* * *
그립고도 따뜻한 느낌.
“아….”
이정기는 마치 흐느끼듯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이정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까만 어둠 속 빛나는 별들.
그리고 환히 빛나는 보름달.
“어머…, 니?”
그리고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성.
그 얼굴이 지구에 와서 찾아보았던 어머니의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내가…, 언니와 많이 닮긴 했지?”
“아….”
“어쩔 수 없는 걸. 우린 일란성 쌍둥이니까.”
눈앞의 얼굴, 그건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의 동생.
‘사슴.’
유시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이정기는 눈을 치켜떴다.
자신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급히 일어서려 했으나.
“조금만….”
유시아가 울먹거리는 눈으로 이정기를 보며 말했다.
“조금만 이러고 있어도 되겠니?”
“…….”
“오랜만에 느껴본 온기라. 너무 그리웠던 온기거든.”
이정기는 일으키려던 몸의 힘을 풀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온기는 마치 아까 느꼈던 정령의 것과 비슷했다.
“미안해.”
“…….”
“너를, 상처입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모두 기억하는 걸까.
“너는 이 세상에 남은 언니의 마지막 흔적이잖아.”
슬픔이 짙게 느껴지는 목소리.
이정기는 그제야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앉아있는 그대로, 유시아를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응?”
“어머니의 흔적은 저 하나만이 아닙니다.”
“……….”
이정기는 곧고 올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달 사냥꾼. 그리고….”
“……!”
“이모…, 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뭐…? 풉.”
유시아가 웃자, 이정기 또한 웃었다.
“이곳에 와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남기신 유산을요.”
“유산….”
“어머니의 수많은 자매들, 그리고 하나뿐인 혈육을요.”
“하지만, 나는….”
죄책감에 일그러지는 얼굴.
“아까 제게 했던 말씀을 기억하세요?”
이정기의 질문에 유시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언니가 내게 알려주려던 것이라고.”
유시아가 말했다.
“언니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맞습니다.”
유시아가 눈물 맺힌 눈으로 이정기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 손엔, 너무 많은 피가 묻었어.”
달 사냥꾼의 수장.
그런 그녀의 인생은 핏빛으로 점칠되어 있었다.
평범한 지구의 인간이라면 그런 그녀를 경멸했을 수도 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이정기의 생각은 달랐다.
“평범한 일반인에게 손 대신 적 있습니까?”
달 사냥꾼들에게 들었던 사슴의 옛이야기.
“죄짓지 않은 자에게 손 대신 적 있습니까?”
“……….”
무언은 긍정이 아닌 부정이었다.
사슴이 지금껏 죽여온 자들은 전부 어떠한 이유가 있는 자들이었다.
사슴은 손에 피를 묻히면서도 결코 무고한 자들에게 손댄 적은 없었다.
“이모님을 용서하지 못할 자들도 있을 겁니다.”
“…….”
급격히 어두워지는 유시아의 얼굴.
“하지만, 그런 것이 헌터들의 세계 아니었습니까?”
“……!”
“언젠가 이모님께 죗값을 묻고자 찾아오는 이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의 손에 그저 죽을 겁니까?”
“…….”
“시엘들도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혔다고 들었습니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의 피.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상위의 헌터들 중 무결점의 인간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그저 현재를 살아가세요.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복잡한 얼굴의 유시아.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이정기 또한 당황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시아가 마력을 일깨우려던 때.
파아앙.
공간을 가르는 듯한 파공성.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누군가 떨어져.
타앗.
사뿐히 바닥에 안착했다.
유시아도, 이정기도 갑작스레 나타난 존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여제….”
“할머니….”
최명희였다.
* * *
“…….”
이정기는 복잡한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할머니가 왜 이곳에 온 것일까.
의심 가는 것은 있었다.
‘내가 걱정되신 걸까.’
할머니가 위험을 경고할 정도의 상대, 그런 상대에게 자신을 혼자 보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러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고오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원수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역시나 유시아는 회복도 되지 않은 몸으로 기운을 일으키며 적의를 표하고 있었다.
저벅.
다가오는 최명희.
“할머니….”
이정기가 최명희를 말리려 했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고 이야기하려 했다.
“결국, 해냈구나.”
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런 할머니의 눈은 자신이 아닌 유시아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덜컥.
이정기는 할머니를 말리려던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얼굴, 표정, 숨소리.
그건 적의를 표하고 있는 유시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여제…!”
“정말. 똑 닮았어.”
흠칫.
유시아는 최명희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를 알고, 몸을 떨었다.
“아비를 잃고 피의 길을 걸었더냐.”
“여제!”
최명희의 목소리에 유시아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윽!”
이정기와의 결전에서 입은 상처는 물론 넥타와 마력 또한 회복되지 않은 그녀였다.
“네 유일한 혈족을 내치고 더더욱 고립되었느냐?”
“여제!”
“할머니!”
이정기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 아닌가.
하지만 최명희의 굳은 눈빛은 이정기의 간섭을 차단했다.
“가족 잃은 슬픔에 매일 같이 흐느꼈더냐!”
“감히! 감히 네 입에서!”
그때였다.
“내가.”
유시아도 최명희도 멈춰섰다.
멈춰서 마주 본 두 눈.
“미안하다.”
“……!”
“……!”
최명희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네게서…, 영아에게서 아비를 빼앗았으면 안 되었다.”
“여, 여제….”
“그 일을 그리 덮어서는 안 되었다.”
“……!”
“너를, 너와 영아를….”
최명희의 얼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에 서린 감정은 이정기도 유시아도 모르지 않았다.
진심.
할머니는 지금 진심으로 유시아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선 안 되었다. 네가 피의 길을 걷게 만들어선 안 되었다.”
“여제….”
“정말로 미안하구나.”
정적.
할머니의 사과로 유시아도 이정기도 입을 다물었다.
결코,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진심이었다.
“용서를 바라지 않겠다. 언제고 내 목숨을 노린다면 노려도 좋다. 그것이 내가 쌓은 업보이자, 내가 감당해야 할 죄악이니까.”
모든 것이 진심.
“…….”
유시아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의 말에서 이정기는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와 이모.’
둘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아.”
터져나오는 유시아의 숨.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당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걸.”
유시아가 말을 이었다.
“그날의 일은 그저 사고일 뿐이라는 걸. 그 일을….”
유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당신이 묻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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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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