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강의 손자-86화 (86/284)

제4권 11화

086

정신 감응.

이정기는 뒤늦게 지금 자신이 느끼고 겪는 것이.

‘유시아.’

어머니의 동생이자 사슴의 기억임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옥죄여오는 듯한 고통.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언니….’

유시아가 겪었던 감정.

너무나 고통스러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왜!’

소리쳤다.

‘왜 그런 거야!’

수년을 기다려, 아니 이 순간을 수십 년 동안 기다려왔다.

아버지를 빼앗은 이성에 대한, 여제에 대한 복수를!

하지만 여제의 심장을 꿰뚫었어야 할 화살이 왜 언니의 가슴을 꿰뚫었냐는 것이었다.

‘시아야.’

언제나 그랬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언니.

‘언니!’

꿰뚫린 가슴 탓에 울컥 피가 솟구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걱정할까 웃음 짓는 언니.

‘왜….’

‘널 막을 거야.’

언니는 자신을 가로막는 것으로 모자라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왜…!’

‘그래야….’

고통을 참아내며 언니가 웃어 보였다.

‘네가 행복할 테니까.’

언니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나 또한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못 해.’

죽어가는 언니의 얼굴을 보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언니를 구해야 했다.

구하려 했다.

타닷!

하지만 여제가 알아차렸다, 여제의 지원군이 거의 도착해 있었다.

‘가.’

쓰러진 언니는 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가라고!’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건만, 또다시 도망치라 말하는 언니.

죽어도 싫었다.

거기다.

‘안 돼!’

만월의 계약에 의해 자신의 화살이 꿰뚫린 달 사냥꾼, 언니의 낙인이 활성화되어버렸다.

급히 해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언니 또한 만월의 계약자였으니까.

‘우린 절대 서로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그러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계약이었으니까.

‘아….’

망연자실 서 있던 나.

나를 향해 손짓하는 언니.

나는 결국 등을 돌려 떠나야만 했다.

* * *

언니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만월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그저 몸을 웅크리고, 두 다리를 감싸 안은 채 매일같이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왜, 왜, 왜.

언니는 왜 나를 배신한 것일까.

세상이 자신을 배신해도 배신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

대체 가족마저 내버린 채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여제에게 돈을 받은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제는 자신뿐만이 아닌 언니의 원수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루 이틀, 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낙인은 계속해서 언니의 목줄을 옥죄고 있었다.

나는 낙인을 없애기 위해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편해질까.’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널 막을 거야, 그래야 네가 행복해질 테니까.’

매일같이 머릿속을 울려대는 목소리.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난…, 불행해.’

도대체 언니는 무엇을 바란 것일까.

그리고 일 년이 지났을 때.

‘시아야.’

언니가 찾아왔다.

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를 배신한 언니, 나를 내버려 둔 언니가 돌아왔다는 것.

‘왜? 언니도 버림받았나 보지?’

언니는 또 한 번 버림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나를 버린 사람.

그래도 언니이기에, 다른 자매들의 언니이기에 같이 머무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 후로 나는 언니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

‘시아야.’

언니가 대화를 원해도 절대 응하지 않았다.

‘내가 당장 죽이지 않는 것에 감사해.’

그저 표독스럽게 원망을 퍼부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머저리 같은 년이군.’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건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영아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그 시간 동안에도 이해하지 못한 거냐?’

반항을 한 대도 소용이 없었다.

나의 화살은 그에게 닿지 못했고, 그는 마치 무적의 신처럼 보였다.

‘복수와 원망으로 이루어졌으니 그렇겠지. 하지만 똑똑히 정신 차리거라.’

그는 이야기를 들은 것과 달랐다.

누구나 거슬린다면 망설임 없이 단 주먹에 죽인다 들었는데.

‘영아는 스스로 네 곁을 떠남으로써, 네가 성장하길 바란 거다.’

상냥했다.

‘내 성장…?’

‘복수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네가 평안을 찾기를 원한 것이라고!’

‘그게….’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네 스스로를 망치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겠지. 영아는 그것이 모두 제 자신 때문이라 생각했고, 네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길 원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날.

‘가.’

나는 언니를 쫓아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

언니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언니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시아야. 괜찮아.’

그렇게 언니는 떠나갔다.

언니를 위해 달 사냥꾼의 한국 지부도 철수시켰다.

시간은 흘렀다.

언니가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강.’

몰래 가 지켜보기도 했다.

지금껏 봐 온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

언니는.

‘행복하구나.’

웃고 있었다.

무언가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

달 사냥꾼에 있을 때는 언제나 안쓰럽고 힘겨운 표정을 짓던 언니의 환한 미소를 보며.

‘아.’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뀌고 싶었다.

바뀌려 했다.

하지만.

‘요정왕 유영아, 이건, 이강 부자와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올림포스로 가다.’

‘돌아오지 못하다.’

언니는 완전히 떠나버렸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바뀌려 했던 것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저 칩거한 채 숨죽여 울기만을 몇 년.

‘누구야?’

그가 찾아왔다.

‘네 언니를 다시 보고 싶나?’

‘넌….’

‘보게 해 주지.’

그리고 그가 말해주었다.

‘케리네이아에 아름다운 달빛이 내리쬐는 날, 내가 그토록 그리워할 자가 오니.’

그날을 기다리라.

* * *

“커억!”

이정기가 한 움큼 핏물을 더 토해냈다.

유시아의 정신에서 빠져나온 충격 탓이었다.

‘보게 해 주지.’

유시아의 기억 속에 본 그 남자.

샛노란 금발과 타오르는 듯한 두 눈.

‘정신 방벽.’

그 남자가 걸어둔 정신 방벽이 자신을 튕겨 나가게 한 것이었다.

“커억…, 커어억.”

그 충격이 온몸에 퍼져나갔지만, 버틸 수 있다.

이정기는 눈앞을 봤다.

“…….”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멍하게 서 있는 유시아.

‘실패….’

그녀의 광증을 고치는 데 실패한 것일까?

아니다.

분명 닿았다.

미쳐버린 그녀의 정신 기저에 깔려있던 기억들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쿠쿠쿠쿠쿠쿵!

다시 한 번 그녀에게서 솟구치는 마력에 지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넥타의 불안정성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뭐?’

[걸어둔 금제가 발동한 듯합니다. 이대로라면….]

메티스가 말했다.

[아르테미스는 붕괴할 겁니다.]

아르테미스, 유시아.

그녀가 붕괴한다.

“안 돼…. 방법! 방법이 있어?”

[있습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려던 찰나.

[더욱 강력한 넥타의 힘으로 불안정성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다시금 이정기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즉, 유시아가 가진 넥타보다 더 큰 넥타로 눌러야 한다는 것.

유시아는 오랜 전투를 지속하며, 넥타의 대부분을 소모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 넥타도 거의 남지 않았어.’

자신의 넥타도 그녀의 공격에 당한 상처를 회복하고 싸움을 지속하느라 거의 소모되었다.

애초부터 그녀와 자신의 넥타가 차이 나는 상황.

이대로라면.

‘붕괴해.’

그녀가 사라진다.

안 된다, 그런 꼴만은 볼 수 없다.

그녀의 정신에 감응하여 엿보았던 기억, 그녀가 느꼈던 감정.

그 모든 것을 본 지금은 더더욱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

“해야 해.”

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그러시지 않았던가.

‘불가능은 없다.’

하려 노력한다면, 해낼 수 있다.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감히 포기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말.

꽈악.

이정기는 유시아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한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어머니.

‘부디 당신의 동생을 구할 수 있게 힘을 주세요.’

쿠쿠쿵!

이정기와 유시아를 향해 더욱 짙은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이정기, 그가 남아 있는 모든 넥타를 끄집어내 공간을 만들었다.

“크으으윽.”

모든 힘을 짜내는 탓에 치밀어오르는 고통과 통증.

재생에 쓰이던 넥타마저 모두 밀어 넣었기에 아물었던 상처들이 벌어져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유시아의 넥타와 공명하는 자신의 넥타.

‘할 수 있어…!’

더욱더, 한계치에 가까운 힘을.

아니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멍하던 유시아의 동공에 서서히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주륵.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어….”

그녀의 입이 메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언니…?”

실패인가.

만일 실패라면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득해져 가는 정신.

그리고 이정기는 흔들리던 동공을 치켜떴다.

“……!”

아니다.

자신의 앞에 맴돌고 있는 작은 빛무리, 유시아는 자신이 아닌 그것을 보며 언니라 부르는 것이었다.

“정…령….”

“언니. 나 이제야 알 것 같아.”

유시아는 그런 정령을 보며 말했다.

“언니는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우리 같은 사람들도…, 복수심과 증오를 버리고 다른 이들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녀가 대화한다.

“언니는 내게 그런 걸 바란 거였어. 이제야 알 것 같아.”

천천히 내려가는 유시아의 시선이 무너져가는 이정기를 향했다.

“너구나.”

다르다.

그녀의 입가에 맺혀있는 것이,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감정이.

“네가 언니의 아들이구나.”

“정신을….”

이정기 또한 입가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차리셨군요.”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유시아와 이정기, 둘 모두가 무너져내렸다.

아득해져 가는 정신 속, 메티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냥의 의식이 끝났습니다.]

[넥타의 레벨이 3을 달성하셨습니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펴낸곳 | 오에스미디어

주 소 | 경기도 하남시 조정대로 35 하우스DL타워 F915-1(9층)

대표전화 | 070-8233-6450

팩 스 | 02-6442-7919

홈페이지 | www.osmedia.kr

이 메 일 | [email protected]

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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