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10화
085
“어머니는, 당신을 버린 게 아닐 겁니다.”
어머니에 대해 이정기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정보로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는 결코 누군가를 버릴 사람이 아니야.’
하물며.
‘가족이라면.’
어머니는 절대로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성의 공략으로 아비를 잃어버린 두 딸.
그중 한 명이 어머니라면.
‘또 한 명은….’
바로 사슴.
그녀는 다른 달 사냥꾼들과 달리 진정 어머니와 피를 나눈 자매일 것이었다.
“헛….”
사슴의 눈이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득!
배에서 뽑혀나간 화살이 다시 이정기의 어깨에 박혀 들었다.
“헛소리….”
“헛소리가 아닙니다.”
“언니는 날 버렸어.”
“아닙니다….”
고통이 느껴지지만 참아낸다.
“그럼 왜 날….”
콰득! 콰득!
연이어 틀어박히는 화살.
“혼자 내버려 둔 거야.”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슴의 떨림이 멈추었다.
타앗!
급히 몸을 움직여 바닥을 나뒹군 이정기.
‘위험했어.’
방금 전의 화살은 지금처럼 배나 어깨를 노린 것이 아닌 목을 노렸다.
‘광증.’
그녀의 광증이 계속해서 심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광증이야말로 모든 열쇠이기도 했다.
올림포스의 힘을 되찾아 싸울 것이라고도 예상 못 했던 자신, 그럼에도 시엘 급의 강자인 사슴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광증을 고치면 돼.’
김윤태에게 그러했듯, 사슴에게도 그러하면 된다.
잠시나마 미쳤던 김윤태의 정신을 돌이켰던 것은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단순히 매타작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올림포스에서도 아주 희귀하고 특별한 몬스터가 있었다.
‘정령계.’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리 까다롭기 그지없는 녀석들.
그중에서도 할아버지마저 꺼리는 녀석이 하나 있었으니.
‘히에라스.’
정신계 정령인 히에라스였다.
녀석은 인간이든 몬스터든 할 것 없이 정신에 침투하여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조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느 날 녀석에게 당해, 할아버지도 꽤 곤욕을 치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능력을 공격이 아닌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
즉.
‘광증을 고칠 수 있다.’
몬스터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정기.
이미 히에로스의 정신 공격 능력을 통해 김윤태의 정신을 고쳐보았다.
물론, 김윤태 따위와 사슴이 같은 선상에 놓일 존재는 아니겠지만.
콰득!
정신을 망가트리는 게 아닌 고치는 것이라면, 시간을 들여서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콰아앙!
문제는 그 시간.
“하아…. 하아….”
그녀의 정신이 고쳐질 때까지, 자신은 사슴의 공격을 받아내야만 한다.
[더 빠르게 그녀의 정신을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려오는 메티스의 목소리.
[그녀의 광증은 불안정한 넥타에 기인한 것. 그녀의 힘을 빠르게 소진시킬 수록, 불안정한 넥타의 힘이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같은 소리였다.
지구력 싸움, 자신이 그녀의 공격에 버틸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
“그래도…, 시간은 덜 걸린단 소리겠지.”
그렇다면.
‘버틸 수 있어.’
더욱이 칠 할의 힘을 되찾은 지금이라면 자신감이 있다.
타앗!
사슴과 거리를 벌린 이정기.
“끄윽.”
박혀있던 화살을 빼내, 마력을 통해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네메아의 분노가 활성화됩니다.]
메티스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히드라의 재생이 활성화됩니다.]
회복력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 주는 두 능력.
그리고 또 한 가지.
꾸드드득.
이정기의 팔과 머리를 감싼 네메아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사자의 머리를 한 갑주, 이정기의 팔에는 네메아의 가죽과 같은 금속이.
‘히드라.’
그리고 가슴에는 히드라의 가죽과도 같은 푸른 금속이 가슴을 보호하고 있었다.
히드라의 가죽을 얻고 바로 마동철을 찾아가 만들어낸 아이템이었다.
“하.”
숨을 몰아쉬며.
“꼭 정신을 차리게 만들겠습니다.”
이정기는 끊임없는 고통과 싸울 준비를 마쳤다.
* * *
꾸르륵.
구멍 난 이정기의 상처에 기포가 올라오며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콰직!
화살이 이정기의 신체를 꿰뚫고 지나가도.
꾸르륵.
상처는 곧장 회복되었다.
과연 그 괴물 같던 히드라의 재생력이 실감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넥타.’
이 능력의 자원은 마력이 아닌 넥타였다.
최대한 집중하여 사슴의 공격을 피해내며, 어쩔 수 없이 허용하는 공격만을 회복하고 있기에 아직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마력의 소모에 육체 능력이 떨어지듯, 넥타 또한 소모되며 갖은 부작용을 안겨 오고 있었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미칠 듯 뛴다.
쿵.
심장을 옥죄어오는 듯한 고통은 이정기의 집중마저 흐리는 순간까지 있었다.
하지만.
“하아….”
이정기는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지친 것은 이정기뿐만이 아니었다.
“…….”
공격을 하는 이도, 그만한 체력을 소모해야 하는 법.
특히나.
‘광증.’
미쳐 날뛰는 존재라면 힘의 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법이었다.
사슴은 그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날뛰고 있을 뿐이고, 자신보다 더 빠르게 소모되는 그녀의 힘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우우우.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 별똥별.
고요한 하늘이 그 증거였다.
‘얼마나, 지난 거지….’
시간의 흐름.
[10시간이 흘렀습니다.]
메티스가 시간을 알려왔다.
‘제길.’
욕지거리가 속에서부터 치솟았다.
열 시간이라는 시간, 아직도 열네 시간은 지나야 사냥의 의식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움찔, 움찔.
사슴의 광증에 조금이나마 차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멈칫거리는 게 늘었어.’
갑작스레 동공이 풀리며 멈칫거리는 시간.
그녀의 정신이 광증을 몰아내느라 생기는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하아.”
숨을 고르고, 또다시 공격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끊임없는 고통, 네메아의 분노에 몸을 맡긴다면 통증은 사라지겠지만 그랬다간 사슴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
이 지독한 고통은 자신이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할머니 탓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녀의 분노.
“마음껏….”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
달 사냥꾼들에게 들은 것은,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 자신이 태어나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지도 몰라.’
할아버지가 자세히 이야기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태어난 자신을 뒤로한 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내가 태어나던 그 날.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그건 자신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달 사냥꾼이라는 수많은 자매를 가졌지만, 진정 피가 통하는 자매는 오직 어머니뿐이었을 사슴.
“마음껏…!”
그런 그녀에게 속죄하는 것이다.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십시오!”
어머니가 이루어놓은 달 사냥꾼들의 믿음, 그것을 자신이 이어받았다면.
‘그로 인한 슬픔마저 이어받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계승이고, 어머니의 유산이라면.
콰드득!
달게 받으리라.
화살을 가슴으로 받아낸 이정기.
그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사슴의 두 눈을 쳐다봤다.
거리가 좁혀진 지금, 다시 한 번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 기회였다.
그리고 마침내.
“……!”
그녀의 정신과 감응하는 데 성공했다.
* * *
‘시아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언니?’
하나밖에 없는 언니.
반가운 얼굴에 기쁨이 찾아온 것도 잠시.
‘언니….’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 좁아터진 방.
자신과 언니는 불의의 사고로 하나뿐이었던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불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고라 생각했던 그것이, 사고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
그 사고의 원인이 이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배고프지?’
그녀들은 도망쳐야만 했다.
이성이 그 사고에 관한 것을 묻어버리고 있다.
어쩌면, 자신들마저 묻혀질 수 있다.
그러한 공포.
‘조금만 참아….’
시간은 가속되었다.
으득.
그 수많은 시간, 언니와 나는 헌터로 각성했다.
드디어 숨지 않고 세상에 나와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막상 헌터가 되고 나니, 모르던 것들이 더욱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성.’
그건 괴물이었다.
헌터가 되면 복수를 하겠다 꿈꾸었지만, 도저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아야.’
‘언니, 난 용서할 수 없어.’
마치 과거를 잊은 듯 행동하는 언니와 다르게 나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이성, 언니와 자신에게 비참한 삶을 선사한 이성.
지금으로 부족하다면, 어떻게든 강해지겠다고.
‘시아야.’
언니의 만류에도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헌터로서 성장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그 사이 언니는.
‘인사해.’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상처 입은 자들.
가진 것을 잃고 짙은 시름과 슬픔에 잠겨 있는 자들.
하지만 그중 남자는 없었다.
왜인지 언니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빠.’
그날 죽어버린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
시간은 더욱 가속되었다.
‘달 사냥꾼.’
어느새 가족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와 동시에 악명 또한 커져만 갔다.
‘복수해줄게.’
그저 가족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언니와 달리,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고,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여왔다.
하지만 그 악명은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
‘마녀.’
언니가 모든 것을 뒤집어썼다.
모든 악명은 언니의 뒤를 따랐다.
‘시아야.’
항상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언니, 그런 언니가 어느 날 너무나 미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는 그 모두를 용서한 것일까?
아버지를 빼앗은 그 이성을?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겨 준 그 개자식들을?
어찌 언니는 평온할 수 있을까.
내버려 두었다.
‘마녀.’
세상이 언니를 욕하게 내버려 두었다.
‘시아야.’
언니는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언니의 말은 틀렸다.
‘죽일 거야.’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마침내 얻은 이 힘.
이 힘으로 나는 복수를 쟁취할 것이다.
‘언니도 바라는 걸 거야.’
그저 말하지 않는 것뿐, 자신과 생각이 같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언니였으니까.
수년, 나는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대상을 관찰했다.
지금껏 암살에 일주일 이상을 투자한 적이 없지만, 이번 상대는 수년을 투자해야 할만한 가치와 필요가 있었다.
‘여제.’
이성의 주인을 죽이는 일.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을 때.
파아아앙!
나는 망설이지 않은 채 활시위를 놓았다.
콰득!
살갗이 뚫리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
그러나 나는 복수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시아야….’
나의 화살에 꿰뚫린 것은 이성의 주인이 아닌 언니.
‘영아 언니!’
유영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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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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