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9화
084
“정말, 예언대로네.”
이정기의 귓가를 간질이는 청아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
사아아-
달빛이 내리쬐는 중앙에 누군가 서 있었다.
굴곡진 몸매, 그 얼굴에는 사슴의 가면을 쓰고 있는 자.
말하지 않아도 이정기는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슴.’
그녀가 사슴이라고.
“정말 왔어.”
“……?”
예언? 그리고 정말 왔다고?
“케리네이아에 아름다운 달빛이 내리쬐는 날, 내가 그토록 그리워할 자가 오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
사슴에게서 느껴지는 그것은 우아함을 넘어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날을 기다리라.”
“예언?”
“응.”
사슴의 눈이 이정기를 향했다.
“내 의제가 내게 해 준 예언이야.”
“의제라니….”
광증이 도졌다는데, 지금 보는 모습은 너무나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당도하면.”
하지만 곧,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흔들리기 시작한 신전.
평온하기 그지없던 사슴의 기세가 변모하기 시작했다.
“나는 복수를 이루리라.”
“……!”
콰직.
무언가 깨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이정기가 급히 고개를 치켜드니 신전의 천장이 부서지고 있었다.
“언니.”
“……?”
“오랫동안 기다렸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오늘이야말로 내 복수를 이룰 수 있겠네.”
흠칫.
이정기가 그 서늘한 살기에 몸을 떨었을 때.
스윽.
어느새 사슴은 이정기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몸을 빼야 하나, 아니면 반격을 준비해야 하나.
그 찰나의 순간, 이정기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언니도 날 기다렸겠지?”
하지만 결국 이정기는 몸을 빼지도 반격하지도 않았다.
애시당초 이 순간을 기다렸지 않은가.
스윽.
내뻗는 손.
그 손이 사슴의 어깨를 쥐었다.
꾸우우웅.
심장이 무언가에 옥죄어지는 듯한 느낌.
그와 함께 온 세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부서진 천장으로 만월의 달빛이 과할 만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냥의 의식이 시작됩니다.]
어느새 눈을 뜬 이정기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 * *
투투투투.
근육이 떨려온다.
이미 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이 올림포스라 말했던 메티스.
그때에도 이정기의 기운은 올림포스의 마력에 공명하며 증폭되었었다.
하지만.
꿈틀.
지금, 이정기는 마치 진화를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르테미스의 영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지금껏 특별 관리 던전을 통해 들어섰던 올림포스의 땅과는 다르다.
힘이 증폭되어 몸을 채운다는 느낌과 달리.
[신격이 활성화됩니다.]
마치 올림포스에서 지냈던 그때의 나와 같은 힘이었다.
백퍼센트는 아니지만, 칠십퍼센트에 근접한 힘.
꾸욱.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육체의 감각에 이정기는 통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랬구나.’
지구에 와 새롭게 쌓아 올린 힘과의 격차.
자신이 어디에 도달해 있었는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
사박.
눈앞에 풀잎이 꺾이며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 이렇게 이곳에 서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지?”
광증이 도졌다더니.
‘정말이었어.’
사슴은 미쳐 있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를 헷갈리고 있는 듯했다.
“왜 그랬어?”
“…….”
“날, 왜 버렸던 거야?”
사슴의 기세가 일그러진다.
“내가 언니한테 뭘 못 해줬어? 언니…, 그 날 이후로 우리 둘은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었잖아. 나랑 약속했었잖아.”
“저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 남자 때문이야?”
듣질 않는다.
“남자가 뭐라고….”
더욱더 일그러지기 시작한 기세.
그 기세가 얼마나 맹렬한지,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일그러지는 듯했다.
꾸욱.
긴장으로 근육이 떨려온다.
칠십 퍼센트의 힘을 보유한 지금도.
‘이만한 위압감이라니.’
정말 사슴이 어떤 존재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죽일 거야.”
사슴이 말했다.
“언니를 빼앗아간 것은 전부. 내 가족을 빼앗아간 것들은 전부….”
화르르륵.
그녀의 몸에서부터 유형화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황색의 마력, 원거리 능력에 특화되어 있는 특수한 마력으로 강민혁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색은 점점 짙어지고, 탁해져 주홍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이정기가 그런 사슴을 향해 말했다.
“전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리고….”
안다.
“당신을 구하겠습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것을.
쿠드드드득.
서로에게 일어나는 마력에 중력이 가중되며 땅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넥타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들려오는 메티스의 목소리.
[네메아의 분노를 활성화하셨습니다.]
이정기는 네메아의 힘마저 끌어내 스스로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조심하셔야 해요.]
평소와 다르게, 메티스는 오랜만에 감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한 것은 경고였다.
[눈앞의 존재는 지금껏 당신이 보았던 넥타 보유자들과는 다릅니다.]
‘다르다?’
무엇이.
[영역을 갖추었다는 것은, 이미 넥타의 레벨이 일정 영역 이상에 도달했다는 것. 또한….]
메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녀의 넥타는 각성 상태입니다.]
‘각성 상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넥타의 레벨이 상승하면, 넥타의 성질이 바뀌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체의 활성화.]
두두두두.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격의 발현입니다.]
신격의 발현.
[아르테미스, 저자는 그녀의 신격을 각성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불안정합니다. 아마 정상적인 방법으로 넥타의 레벨을 획득한 것이 아닌, 누군가 강제로 넥타를 각성시킨 것.]
움직이는 하늘 속에서, 가히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크기의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힘은 불안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는 건….’
의심되는 것이 있다.
‘사슴의 광증은 넥타의 불안정한 각성 때문이라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메티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때.
구구구구궁.
다시금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비추는 밝은 빛, 그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
“언니.”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
아니, 그것들은 별처럼 보이지만….
“왜 날 버렸어?”
별이 아니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팟!
별과 같은 빛을 품고, 그에 준하는 위력을 지닌 것들.
저 모든 것이.
콰콰콰콰콰콰콰쾅!
화살이었다.
* * *
볼텍스의 성질이 깃든 마력장은 아무리 강력한 화살이라도 막아내며, 시전자에게 닿지 못하게 해 주는 무적의 방어막이라고 했다.
하지만.
“크으윽….”
이건 도저히 화살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늘에서 추락하는 수많은 별똥별들.
콰직, 콰지직!
그것들은 아직 완벽한 힘을 되찾지 못한 이정기의 볼텍스 마력장을 뚫고 이정기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타아앙! 카앙! 파앙!
쉼 없이 손을 움직여, 그것들을 쳐냈다.
그러고도 쏟아지는 수많은 별똥별을 보며.
우웅-.
이정기는 마력을 담아낸 주먹을 뻗어내었다.
‘볼텍스.’
할아버지의 힘.
쏘아진 기세가 회전하는 소용돌이가 되어 하늘의 별똥별을 먹어치웠다.
잠시 주춤한 별똥별의 기세.
문제는.
파앗!
자신이 신경 써야 할 것은 별똥별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름달의 밝은 빛 사이로, 급작스럽게 커진 사슴의 얼굴이 보였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그녀.
이정기의 예민한 감각에 공기가 밀려나며 마력이 비명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타앗!
뒤로 물러선 이정기.
콰아앙!
방금 이정기가 있던 곳에서부터 밝은 폭발이 일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러한 위력을 발휘한 것일까.
이정기는 볼 수 있었다.
‘화살.’
그저 눈앞에서 화살을 휘두른 것이라고.
가히 경악할만한 위력.
‘이것이….’
메티스가 말했던 것.
‘각성한 넥타.’
넥타가 낼 수 있는 본질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오래 신경을 팔고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별똥별, 일단은 우선 저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방법은 있다.
‘볼텍스 마력장.’
소진되는 마력이 과한 기술이기에, 밖에서는 위력을 절감하여 사용했던 기술.
휘이잉!
하지만 그 위력을 현재 끌어낼 수 있는 만큼 끌어낸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진다면, 천장을 만들면 그만.
이정기는 그렇게 볼텍스의 천장을 만들어내었다.
“…….”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력.
‘하지만 버틸만 해.’
그러나 칠 할에 달하는 힘을 되찾은 이정기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콰직!
또다시 떨어지는 별똥별.
아까와는 다르다.
볼텍스의 마력장을 뚫고 들어온 아까와 달리, 볼텍스 마력장과 부딪혀 힘을 잃어버린 별똥별들.
그리고 문제는.
콰아앙!
달빛 속에 몸을 감추어, 달빛 속에서 몸을 드러내 공격해오는 사슴이었다.
움찔.
분명 사슴의 약점은 있었다.
아무리 그녀의 궁술이 하늘에 닿아있다고 한들, 궁사인 그녀의 한계를 어찌할 수는 없는 듯했다.
또 하나.
“나는 왜….”
그녀의 광증.
중간중간 멈칫거리는 그녀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황은 모두 파악했다.
‘할 수 있어.’
그러자 자신감이 생겼다.
사냥의 의식,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의식.
하지만 이 의식을 죽음 없이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24시간.’
의식이 끝나는 시간까지 아무도 죽지 않은 채 서로의 힘을 소모하는 것.
즉.
‘지구력 싸움.’
그 순간.
콰드드드득!
“왜 날 버렸어. 언니.”
보름달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화살이 이정기의 뱃가죽을 꿰뚫었다.
이정기는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억누른 채.
꽈악.
배에 박힌 화살을, 사슴의 손을 붙잡았다.
울컥.
참아내도 핏물이 입가를 통해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이정기는 그런 것들을 억누르며 말했다.
“당신을 버린…게 아닐 겁니다….”
움찔.
사슴 가면 속, 그녀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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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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