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5화
080
“내겐 적이 많다.”
그 말로 시작된 이야기.
“내가 이성이라는 성을 쌓아 올리는 동안 만들어진 적들이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도.”
씁쓸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오직 담담함.
지나쳐 온 과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할머니에게 별일이 아니어서일까.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약해졌던 틈을 타 화살이 날아들었다.”
“……!”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사슴의 화살은 여제에게도 닿았어요.’
사슴의 화살이 분명 할머니에게 닿았다고 했다.
“내 능력을 사용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약해졌을 때, 날아든 화살. 윤태나 다른 녀석들도 내 곁에 없던 절호의 기회였지.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 아이는 그때를 수년이나 숨죽여서 기다려왔다더군.”
수년간 하나의 목표를 관찰하고 틈을 노린다.
그것이 대단한 것일까.
아니면.
‘수년을 관찰해야 겨우 한 번의 틈을 내보인 할머니가 대단한 걸까.’
최명희는 말했다.
“날아드는 화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했다.”
과연 할머니다운 대처였다.
“하지만 곧 화살이 멈췄다.”
“…….”
“아무리 내가 약해졌다고 하나, 느낄 수 있었지.”
무엇을?
“날아드는 화살을 무언가가 막아섰다고, 그리고 곧이어….”
그때를 회상하듯, 잠시 눈가를 찡그리는 최명희.
“그 둘이 다투기 시작했다는 것을.”
최명희를 구한 누군가, 그리고 최명희를 죽이려는 누군가.
하지만 할머니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할머니를 구하려는 자는 할머니의 편이 아니다.’
할머니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그사이 회복된 몸을 이끌고 싸움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아이를 처음 보았지.”
그것이 첫 만남.
“화살이 배 깊숙이 꽂힌 채, 떨며 나를 보던 그 모습.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
“그 아이가 바로 달 사냥꾼이라는 괴이한 집단을 만들어낸 두 장본인 중 하나, 마녀라고.”
“어머니….”
“그래. 유영아. 그 아이였다.”
그렇다면 사슴이 할머니를 노렸고,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구했다는 것인데.
왜?
내분이라도 있던 것일까?
“그리고 뒤이어 나의 부상을 알게 되어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원군.
왜인지 알 것 같다.
“강이, 그 아이가 헌터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 * *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할머니지만, 할머니에겐 철칙과도 같은 것이 있었다.
‘은혜와 원수.’
받은 것은 무엇이든 되돌려준다는 것.
그렇기에 자신을 구하느라 상처 입은 유영아를 치료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 위험합니다.’
오히려 이강이 그에 반대했다고 했다.
‘모든 것이 그저 연극일 수 있습니다.’
최명희를 노리는 달 사냥꾼. 수년을 기다려 최명희가 가장 약한 틈을 찾았지만 격렬한 저항에 당황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암살의 프로인 그녀들은 작전을 바꾸었을 수 있었다.
최명희를 관찰했다면, 최명희의 성격을 알 테고, 받은 것은 돌려주는 최명희의 성정을 이용해 암살자를 곁에 두는 것.
마녀는 그렇게 접근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이강은 스스로 자처하여 유영아의 감시를 맡겠다 했다.
“치료가 끝나면 돌려보낸다고 했었지.”
과거를 떠올리는 최명희.
그렇게 이강과 유영아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사슴의 화살은 강력했고, 그녀들끼리 맺은 계약 또한 강력했다.
그것은 저주가 되어 유영아의 몸을 좀먹었고, 금세 치료가 끝나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유영아의 몸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
그리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강이는.”
이강은 처음과 달리 조금씩 유영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여인.
그리고 달 사냥꾼, 비정하게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집단의 수장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유영아는 심성이 여린 아이였다.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일 년.
이성의 지원과 이강의 극진한 간호로 유영아는 마침내 완치될 수 있었다.
“떠나겠다고 했다.”
일 년이 지나, 떠나겠다고 말하는 유영아.
하지만.
‘어머니.’
이강이 반대했다.
‘돌아간다면 죽을 겁니다.’
치료로 인해 많은 힘을 잃은 유영아, 이대로 돌아간다면 분명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그러니.
‘거두어야 합니다.’
유영아를 지켜주자고 하는 것이었다.
“거절했다.”
최명희는 이강의 이야기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받은 것은 돌려준다.
최명희는 분명 유영아에게 목숨을 구함 받았고, 상처받은 유영아를 고쳐주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강은 집요했다.
‘그저 고쳐주었다고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머니의 목숨이 겨우 그 정도뿐입니까?’
‘뭣?’
‘이대로 마녀가 돌아가 사슴에게 죽는다면, 그것이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 준 정당한 대가입니까?’
언제나 그랬다.
누구에게도 냉정했던 최명희.
하지만 그녀가 언제나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던 단 한 사람.
그것이 바로 이강이었다.
‘어머니의 목숨값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반대하려고 했다.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말했다.
“그간, 수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강이의 눈에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던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
“그러나 나는 둘의 사이를 허락할 수 없었다.”
역시나.
“신분 때문이라 생각하느냐?”
“……!”
“그 아이가 달 사냥꾼의 수장이어서 그랬다고 생각하느냐?”
고저 없는 목소리.
“틀렸다.”
할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나 또한 강이와 생각이 같았다. 그 아이가 내 목숨을 노리기 위한 연극을 벌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역시 할머니도 그런 생각을 한 듯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옛적에 바뀌었다.”
“……어찌.”
아니, 알 것 같다.
“아버지를 노린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할머니는 그랬을 것이다.
연극을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유영아, 하지만 그간 유영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강을 노린 것이라면.
이강의 목숨을 노리고, 이강에게 접근한 것이라면.
“나의 목숨은 나의 것이다. 나의 목숨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면, 나는 상관없다.”
그러나.
“강이는 다르다.”
울컥.
이정기는 저도 모르게 속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고저 없고, 감정 없이 담담히 말하는 할머니의 묵직한 목소리.
하지만.
‘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너무나 절절히 와닿았다.
너무나 차갑게만 보였던 할머니, 사람들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며 손가락질하는 할머니.
하지만 그녀 또한 인간이었으며, 어머니였다.
“그놈이 안 하던 짓을 하더구나.”
아직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한 번도 내 말에 거역하지 않은 녀석이….”
피식.
작게 말아 올라가는 할머니의 입꼬리.
“처음으로 가출을 한 것이다.”
* * *
아버지의 가출, 너무나 철없고 극단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책임감의 상징이라고도 불려오던 아버지의 일로 세상은 떠들썩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출한 지 일 년이 지나고.
“그 아이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할머니를 따로 찾아왔다.
“부디 강이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자신이 떠나겠다고, 넘봐선 안 될 것을 넘보았다고.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떠날 생각인 듯했다.
왜 진즉 떠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알 수 있어.’
결론을 알고 있는 이야기니 이해가 갔다.
‘어머니도 아버지께 마음을 빼앗긴 거야.’
사랑.
아직 자신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듯했으니까.”
“…….”
“사랑이 어떤 것인지. 나도 아니까.”
오늘, 할머니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떠나더구나.”
“예?”
“그날 내 웃음을 보곤 그것이 허락인 줄 알았는지, 떠나더구나.”
“……!”
“강이의 가출이 길어진 것은 알고 있겠지?”
설마.
“그 아이를 찾고자 온 곳을 들쑤셨더구나.”
그런 이유가 있었는지는 정말 몰랐다.
그저 할머니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떼겠거니 생각했건만.
“이성의 힘을 빌렸어도 될 것을, 혹여 이성에 누가 될까 봐 홀로 움직였다. 물론 그 개 잡종 놈이 도움을 주었지만.”
그리고 결국.
“찾아내었다.”
히든 길드,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집단이라는 달 사냥꾼들의 본거지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강이는 내게 왔다.”
도움을 청하려 했던 것일까.
그럴 수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전설적인 헌터라고 하나, 일개 개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길드.
이성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정기의 추측은 또 한 번 틀렸다.
“진실.”
“진실 말씀입니까?”
“그날, 강이는 내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최명희의 흔들리는 눈동자 사이로 드러나는 감정.
그건 분명.
‘……!’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인생을 살며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안 되는 일이 있다.”
“할머니가 후회도 하십니까?”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이성을 만들고 이끌어나갈 때, 하나의 게이트를 공략했지. 이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꼭 공략해야만 하는 게이트였다.”
꼭 공략해야만 하는 게이트.
할머니가 어찌했을지 눈에 훤하다.
“하지만 게이트의 구조가 불안정해, 공략이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선택해야만 했지. 이대로 공략을 계속할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
선택은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후회라니, 공략이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공략에서 많은 이들을 잃었던 것일까?’
무엇일까.
“공략은 성공적이었다.”
둘 다 아니었다.
“아무런 피해 없이 공략은 성공할 수 있었고, 우린 게이트에서 벗어나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후회하신 겁니까.”
“불안정했던 게이트, 그리고…, 자만이다.”
“자만 말씀입니까.”
“게이트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인간의 자만.”
할머니는 말했다.
“불안정한 게이트를 공략하던 도중, 마력이 불안정해져 게이트 근처의 한 가정집이 무너져내렸다.”
가정집?
“그 집에는 아비 하나와 두 딸이 살고 있었지.”
가라앉은 눈.
“그 날 두 아이는 아비를 잃었다.”
“……!”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이련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게이트를 공략하다 보면 이따금 일어날 수 있는 일.
이성도 그러한 사고를.
‘아니야.’
아니다.
자신이 이성에 대해 이해하고자 공부하며 알아보았을 때, 이런 사고에 관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마땅한 보상과 사과를 해야 했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중요한 게이트 공략이었다고.
그런 공략에 누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 게이트 공략은 성공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묻었다.”
할머니는 그 사실을 묻어버렸다.
아비를 잃은 두 딸은 이성 때문에, 할머니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서도 아무런 보상도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저, 버림받았다.
“너라면 알겠지.”
“…….”
물론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 아버지를 잃은 두 딸이 누군지 눈치채지 못할 자신이 아니었다.
분명 그중 하나는.
“어머니였군요.”
어머니였으리라.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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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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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