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25화
075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정기의 옆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이정기는 그림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어느새 형체를 갖춘 그림자.
“마음은 먹었나?”
그제야 뒤로 돈 이정기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의 주인이 있었다.
“…….”
엉망이 된 몰골의 남자.
‘강민혁.’
유서를 남긴 채 사라졌다던 남자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는 다를 줄 알았습니다.”
갑작스레 말을 꺼내는 그.
“저만은….”
그의 얼굴이 분노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그저 소모품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던전 게이트에서 김윤태와 함께 자신을 습격했던 강민혁.
이정기는 감히 자신을 습격했음에도 강민혁을 살려서 돌려 보내주었다.
할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 같아 살려준 김윤태와 달리 강민혁을 살려줄 이유는 이정기에게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용 가치가 있어.’
지구와 올림포스의 괴리, 그 정답이 둘의 차이가 없다고 결론 내린 이정기였기에 강민혁을 살려주었다.
사실상 이번에 김윤태가 자신을 죽이려던 것도 김윤태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녀석은 그럴 담력이 없어.’
옆에서 바람을 집어넣은 누군가.
주병훈이 실제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이상 주병훈은 자신의 적.
그렇게 생각했기에 강민혁을 살려주었다.
‘돌아가라.’
강민혁을 살려주며 했던 말.
‘네가 살아남는다면 네 죗값은 묻지 않을게. 다만….’
주병훈에게 버림받아 죽는다면.
‘나를 찾아와라.’
아이러니한 말이었다.
죽으면 찾아오라니.
하지만 이정기는 동시에 강민혁에게 아이템 하나를 주었다.
‘환상 미끼.’
올림포스의 특별한 몬스터가 사용하는 능력으로 자신과 똑같은 환상을 만들어내 사냥감을 유인하거나 현혹하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마동철이 만들어낸 아이템에 담아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그거라면 죽음을 위장할 수 있을 거다.’
즉, 살아 돌아온 강민혁을 주병훈이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 관계없다.
다만 버려졌을 경우, 환상 미끼를 통해 살아남아 자신에게 오라는 것.
강민혁은 그렇게 죽고, 또 살아남아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자신을 버린 주병훈과 달리 목숨을 노렸음에도 살려준 이정기.
거기다 주병훈의 손아귀에서마저 벗어나게 도움을 주었기에 강민혁이 이정기를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달랐다.
“어차피 대한민국에서 살긴 힘들겠지?”
이정기가 강민혁을 향해 물었다.
지구에 와 제법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이정기는 지구를, 대한민국을 배웠다.
이성, 주병훈에게 팽당한 강민혁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가 살길은 오직 하나.
‘철저히 정체를 감추고 외국에 나가 쥐 죽은 듯이 사는 것.’
대한민국에 이성을 거스를 수 있는 자들은 몇 없으니까.
하지만 하나 더,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
“내가 살 기회를 주지.”
이정기는 조용히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복수하고 싶나?”
자고로.
‘몬스터들의 생태 또한 그러하다.’
올림포스에서 보았던 몬스터들의 생태.
강력한 몬스터 무리를 무너뜨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몬스터 무리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일부러 수하 몬스터들을 살려두어 공포를 심어두고 돌려보내, 자신에 대한 공포를 퍼트리는 것.
또한, 살려준 몬스터들의 앞세워 오히려 무리를 공격하는 것.
그러면.
‘분열이 일어나지.’
강민혁은 그런 카드였다.
주병훈이라는 몬스터 무리를 분열시키고, 공략하기 위한 첫 발걸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정기를 향해 강민혁이 물어왔다.
“당신이 강하다는 것은 겪어봐서 압니다. 하지만, 주병훈 사장 또한 강합니다.”
“…….”
“그리고 이성 그룹 또한 강합니다.”
이성이, 주병훈이 강하긴 한 모양이다.
팽당한 강민혁의 분노가 증오가 되기보다는 두려움이 되는 것을 보니.
“잊었나?”
이정기가 강민혁의 두 눈을 응시했다.
움찔.
알 수 없는 기분에 몸을 떠는 강민혁.
“나 또한 성혈이다.”
“하지만….”
“그리고.”
이정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 할아버지가 이건이야. 그건 성혈 중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일 텐데.”
잠시 후.
“복수하고 싶습니다.”
다부지게 마음먹은 강민혁의 목소리가 공간 가득 울려 퍼졌다.
* * *
“허억…. 허억….”
오늘도 어김없이 S급 던전에서 수많은 몬스터들에게 몰이 당하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김윤태.
며칠 사이 김윤태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가버렸던 정신은 온전히 돌아왔고.
“쉬어.”
움찔.
이정기에 대한 공포는 김윤태의 정신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또한.
“이제 제법 가진 마력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됐네.”
몰아주기의 형태로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김윤태.
그렇기에 S등급의 마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 하나 못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단 며칠.
매번 죽음에 가까운 도망 속에서 김윤태는 이제 그의 안에 내재하여 있던 마력을 조금이나마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할지 깨닫고 있는 듯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모지리, 하지만 수많은 인맥을 관리하며 공격대원들의 최상위에 서 있던 녀석은 눈치라도 있었다.
이정기가 자신을 살려주고, 고문과 같은 형태라고 하나 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를 위해서?”
가볍게 내뱉은 한 마디.
“개소리.”
김윤태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가족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이정기가 말했다.
“사소한 기쁨이라도 드리기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
“…….”
“뭐, 그것뿐만은 아니지.”
이정기가 말했다.
“넌 가치가 있으니까.”
“나한테 뭘 바라든…! 커억!”
이정기가 눈빛만을 보냈을진대, 김윤태는 심장을 쥐어짜며 쓰러져 컥컥대기 시작했다.
계약의 송곳이 녀석의 심장을 옥죈 것이었다.
“다만 나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건 할머니뿐인 것 같아서 말이야.”
이정기가 쓰러진 김윤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족이란 울타리.
하지만 이정기가 느끼기에 자신이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에서 할머니, 최명희뿐이었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가족을 지키려는 거야.”
“뭐…?”
김윤태가 기겁하며 말했다.
“할머니의 가족을 지킨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마치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빛.
하지만 이정기는 진심이었다.
‘내게 적의를 보이는 자 살려두지 말라.’
그것이 이건의 가르침.
하지만 성혈들은 전부 자신을 향해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 전부를 죽여야 하나?’
아직은 힘들겠지만, 온전히 힘을 되찾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할머니가 슬퍼하시겠지.’
최명희에겐 몹쓸 짓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슬퍼하는 것은 싫다.
그러니.
‘할머니의 가족을 지킨다.’
그래서였다.
“할머니의 가족들이 내게 이빨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들 거야.”
“무, 뭐라고?”
“너는 그러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일 뿐이고.”
김윤태는 경악했다.
지금 이정기가 하는 소리.
얼핏 듣자면.
“이성을 네가 차지하겠다는 거냐?”
그건 이성을 차지해, 그 지배자가 되어 성혈들을 무릎 꿇린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맙소사….”
김윤태는 진심으로 소리쳤다.
“이성을 너무 만만하게 보나 본데…!”
지금만큼은 자존심이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진심.
“나도, 우리 엄마도 백두 길드에 만족했어! 삼촌 두 명이 쌓아 올린 성이 너무 두터우니까! 지금껏 이성을 노린 자가 없는 것 같아?”
오히려 반대다.
이성이 가진 수많은 이권과 명예, 그리고 한국에서의 입지.
그것들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공작들이 들어왔었다.
그러나 아무도 건들 수 없던 것이 바로 이성.
또한, 주영은과 김윤태는 일찍이 후계 싸움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주인배와 주형태.’
그 둘은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자들.
“세력 하나 없으면서….”
“그래서야.”
이정기가 말했다.
“세력을 만들려고.”
* * *
‘벌써 한계치가 가까워지고 있어.’
히드라를 사냥해 레벨업 한 넥타.
그로 인해 마력의 성장 한계가 풀렸다.
하지만 그 한계도 어느새 또 한 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넥타가 활성화되며 힘을 찾는 속도가 가속화되었던 이정기.
이제 어느새.
‘절반 정도.’
올림포스에 가졌던 마력의 힘만을 따지자면 절반에 가까운 회복을 했다 할 수 있었다.
‘더 빨리 힘을 찾기 위해선 넥타의 레벨을 올려야 해.’
그리고 넥타는 넥타를 가진 존재를 사냥하는 것으로 쉽게 올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빨리 힘을 되찾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생긴 지금, 힘은 넘치면 더 좋았지 모자라선 안 되는 것이었다.
현재 넥타의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특별 관리 던전.’
특수한 던전이 나타나길 기다려 클리어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이미 넥타를 보유한 자를 사냥하는 것.’
즉, 혼돈의 세대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특별 관리 던전은 쉬이 생성되는 것이 아닌 데다….
‘외국에 생성되는 경우, 소유권이나 관리권 때문에 공략이 쉽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혼돈의 세대 사냥.’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 그 방법도 생각해봐야 했다.
문제는 혼돈의 세대가 몇 명이고, 또 어디에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
지금 이정기가 알아낸 바로는 주안나와 뷔앙, 할아버지만이 유일한 넥타 보유자였다.
“…….”
던전을 나오며 상념을 마친 이정기.
그가 멈춰 섰다.
“김윤태.”
“…….”
“먼저 가라.”
이정기의 말에 눈치를 보는 김윤태.
“오, 오늘은 그만 가도 되는 거냐? 아니면….”
몇 번 더 이정기에게 저항하긴 했지만, 교육을 받으며 순종적으로 변한 김윤태.
“오늘은 하고 싶은 거 해.”
“그, 그래도….”
“잔말 말고 가.”
“…….”
“대답.”
“알겠어!”
이정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달려가는 김윤태.
이정기는 협회에 던전 공략 상황을 보고하곤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예…?”
기다리던 이진석에게도 말을 전한 이정기.
이진석은 당황한 듯했으나.
“알겠습니다.”
곧 눈치를 채곤 자리를 물렀다.
혼자가 된 이정기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던전이 출몰한 탓에 통제된 주변은 고요했고, 협회 측 인물들은 공략된 던전을 확인코자 자리를 비운 상황.
더욱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자 이정기의 주변에는 쥐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리고 그때.
우우웅.
이정기가 사방을 향해 마력장을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감옥처럼 변해버린 주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이정기의 손에 네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으로 간주하겠다.”
경고성이 짙은 이정기의 목소리.
그제야.
사박, 사박.
여러 발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따라붙은 미행.
협회나 이진석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미행이었다.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이는 총 여섯.
“너희는….”
이정기는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누구지?”
생츄어리? 아니면 그들과 같은 적? 혹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적들일까?
그리고.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양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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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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