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18화
043
띠링.
[최인해 :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
띠링.
[권신우 : 우…, 나도…, 그렇다.]
띠링.
[안태민 : …….]
첫 던전의 공략을 마친 다음 날 아침 이정기의 스마트폰에 쌓이는 메시지였다.
바로 다음 던전을 공략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팀원들에게는 무리였던 것 같았다.
‘미쳤어!’
‘살려줘!’
‘……이건 좀.’
자신과 팀이 된 그들, 그리고 자신은 팀장이었다.
‘팀장은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이진석에게 팀장이 무엇인지 속성으로 배웠던 이정기.
팀장으로서 팀원을 책임지고, 그들의 성장이야말로 공적이기에 던전의 공략뿐 아니라 팀원의 성장도 생각하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였다.
던전에서 이정기는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며 그들의 성장을 생각해주었다.
그 결과.
[최인해 : 제발…, 제발…, 좀 쉬자.]
[권신우 : 좀 더 자겠다.]
[안태민 님이 방을 나갔습니다.]
팀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조차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
“무리였겠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신났었나?’
마력 던전과 달리 진짜 던전이라는 곳.
그곳은 이정기에게 너무도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또한, 고향이나 다름없는 올림포스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투쟁.
몬스터를 사냥하고 생존에만 신경을 쓰면 모든 것이 가능한 곳.
오랜만에 고향이라도 온 듯한 느낌에 조금 무리를 한 것이 그들에겐 과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삐그덕.
“좀 무리했었나 보네.”
뭐, 이 정도 피로는 금세 지워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던전의 난이도가 아는 것보다 높았어.’
이정기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던전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았다.
물론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다거나 공략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의 위협은 됐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모를 리 없어.’
정훈이라는 협회의 정보부장이 모를 리 없다는 것은 이정기는 깨닫고 있었다.
지구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깨닫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름값.
그로 인해 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분명 알면서 자신들을 속인 게 분명했다.
그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협회장.’
던전 공략권을 따내며 협회장에게 협박했던 일.
권력자는 자존심이 강하고, 한참이나 어린 자신이 그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그 부작용이 생긴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결코 끝을 보려는 것은 아님은 안다.
이번에 던전 공략을 한 걸 보았으니 다른 위협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순 없지.”
할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에게 위해를 끼친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정기야. 한 번 위협을 끼친 놈은 가만히 내버려 둬선 안 된다. 그러면 제 꼼수가 통하는 줄 알고 더 기어오르는 법이야.’
할아버지의 가르침, 이정기 또한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과거 한 번 몬스터를 사냥하다 안쓰러워 놓아준 적이 있었다.
당연히 호되게 당했으니 다시는 안전지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건만.
‘제 무리를 이끌고 나를 습격했었지.’
그런 것이다.
내버려 두면 지금은 미약할지라도, 언제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싹을 자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그러나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아직 자신의 힘이 너무나 부족했다.
‘할아버지.’
누구보다 먼저 나설 할아버지는 다른 일로 바쁜 데다, 연락조차 취할 수 없다.
방법이?
씨익.
방법이 떠올랐다.
* * *
“그래. 첫 던전을 공략했다고.”
“예. 할머니.”
이정기는 최명희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마동철의 두 팔을 고친 상.
‘언제든 원할 때 내 방에 들어와도 좋다.’
할머니는 다른 허락 없이 그녀의 방에 방문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이정기는 처음으로 그 권한을 사용한 것이었다.
“겨우 사흘 만에 공략했다고.”
“예. 할머니.”
“잘했다. 내 손자라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 그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져 있는 것을 이정기는 눈치챌 수 있었다.
타악.
하지만 그 커피잔을 내려놓았을 때 할머니는 원래의 무표정하고 근엄한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래.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찾아왔을 리는 없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최명희.
“무슨 일이더냐.”
이정기는 최명희의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마치 자신의 전부를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
‘힘을 되찾을수록 더 선명해.’
의식이 끝나고 지구로 돌아왔을 당시, 미약한 자신의 힘으로는 할머니가 가진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성장하며 잃었던 힘을 되찾을수록 할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의 뒤로 일렁이는 마력.
‘아직도 전부 못 보고 있어.’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도 겨우 일부분이라는 것도.
꿀꺽.
그런 할머니이다.
이정기는 긴장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말씀대로 부탁이 있어서 찾아뵀어요.”
“말하거라.”
“호….”
이정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혼을 내주셨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요.”
“혼을 내달라?”
다시금 최명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
“누굴 말이더냐? 네 백부들? 아니면 사촌들이 괴롭히느냐?”
“아니에요.”
이정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 던전 공략권 때문에 협회에 찾아갔던 것을 알고 계시죠?”
“날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어찌 공략권을 따냈는지도 알고 있다.”
아마도 이진석이 말한 듯싶었다.
그는 자신의 보좌와 경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할머니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그때 김대정 협회장님께서 조금 곤란한 일을 겪으신 것도 아시겠네요.”
“곤란? 끌끌끌. 고약한 일이겠지. 그 범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좀 웃기는구나.”
최명희는 잠시 웃더니 곧 표정을 바꾸었다.
“김대정이를 혼내 달라는 거냐?”
이정기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게 무슨 소린지는 아느냐?”
김대정,
지금 이정기는 동네 꼬마를 말하듯 하고 있지만, 그는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었다.
수많은 헌터들을 발아래 두고, 길드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대통령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가 바로 김대정이었다.
헌데 그를 혼내 달라?
“이번 던전이 이상했어요.”
“…….”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큰일은 아니었지만….”
“작은 불씨가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법이지.”
최명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런 김대정을 혼내 달라는 부탁에 그저 알겠다고 답하는 최명희.
누군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미친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화의 한 축이 최명희라는 것을 알았다면.
끄덕.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게 다냐?”
“아니에요.”
이정기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유리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
그것이 무엇인가 최명희가 보는 사이.
“선물이에요.”
“선물?”
이정기가 먼저 말했다.
“황금 산양의 젖이라고 언젠가 할머니께 드리려고 숨겨둔 것이에요.”
“……!”
“올림포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니, 할머니도 모를 거예요. 이것으로 마동철 제작자님을 치료했고요.”
이정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정기가 감춰둔 비장의 수였다.
마동철에게 준 것을 제외하고도 많은 마력을 소모해 만들어두었던 지구 최초의 황금 산양의 젖.
이것으로 언젠가 할머니께 부탁을 드려야 할 때 드리겠다던 물건.
하지만.
“고얀 놈.”
할머니는 선물을 드린 것에도 이정기를 나무랐다.
“이런 선물은 필요 없다.”
단호하게 말하는 최명희의 목소리.
“부탁이 있을 때만 찾아오지 말고, 가끔은 그냥 오거라.”
“…….”
최명희의 말에 이정기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곧.
“감사합니다.”
정직한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 방을 나섰다.
그럼에도 이미 필요 없다고 말했던 황금 산양의 젖만큼은 내버려 두고 갔다.
* * *
“후우.”
김대정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불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제기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이건도 아니고 그 손자에게 보란 듯이 당해버렸다.
“그러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사 청년이 아니라고.”
정훈이 그런 김대정을 보며 말했다.
“그 정도 괴물이라고 생각을 했어야지!”
김대정이 빼액하고 소리쳤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애당초 D등급 헌터가 왜, 어째서 벌써 A등급인 거야! 그리고 그 던전 분명 확인했겠지?”
“네. 협회장님.”
“하아.”
괴물, 괴물, 괴물.
소싯적 김대정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딱 한 명, 그 헌터를 보고선 그 말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올림포스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 이십사 년간 김대정은 괴물이란 말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이미 최고를 보았기에, 그 무엇도 시시해 보였다.
그러나.
‘괴물.’
그 손자놈은 김대정이 보았던 이건만큼이나 괴물이었다.
“머리도 잘 돌아가지, 능력도 출중해, 거기다….”
김대정이 말했다.
“얄팍한 자존심도 안 세우는군.”
최명희의 다른 핏줄들.
그들은 최명희의 이름을 내세우는 걸 극도로 꺼렸다.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심하면 최명희의 손녀라 했다는 사실로 팔을 베어버리는 미친것들이었다.
헌데 이정기는 다르다.
누군가의 이름을 파는 것을 절대 망설이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힘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어.”
그 어린 나이에 제가 가진 것을 파악하고 적절히 활용하며 그것에만 심취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또한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이강과는 완전히 달라.’
이정기의 아버지 이강, 그는 두 최강의 헌터 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완전히 다른 이였다.
정의롭고, 순진하며, 빛이 났다.
이정기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생각했건만.
“끄으응.”
무슨 소리, 오히려 이정기는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란 듯 빼다 박았다.
“제일 까다롭겠어.”
“협회장님. 더 이상 수를 쓰시면 안 됩니다.”
정훈은 그런 김대정을 향해 간곡히 말했다.
“진짜 지으…, 아니 큰일 나는 수가 있을 듯합니다.”
“어린 꼬맹이한테 겁먹어야 하는 현실이라니.”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래….”
완벽한 패배.
“그래도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엿보면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
그 말을 입 밖에 내밀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거칠게 열리는 협회장실의 문.
그 누구도 협회의 협회장실의 문을 이렇게 열 수 있는 자는….
“김대정이.”
있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최강 이건, 그리고….
“회, 회장님!”
사신 최명희.
“아주 재미있는 일을 했더라고.”
“무, 무슨?”
“진정 몰라서 묻는 겐가?”
꿀꺽.
갑작스러운 방문, 자신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협회였건만 김대정은 순식간에 겁에 질려 있었다.
‘안 돼.’
지금 최명희는 이성의 회장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이성의 회장일 때와, 헌터일 때 그 구분이 확실했으니까.
그리고 제일 위험한 것은.
‘그녀가 헌터일 때.’
회장일 때야 체통이라도 지키지, 헌터일 때는.
‘그땐 이건 못지않다.’
괜히 희대의 커플이란 별명이 붙었던 것이 아니었다.
“혀, 협회장님.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저, 정훈이!”
서슬 시퍼런 눈을 한 최명희의 기세에 정훈은 슬슬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김대정이 그를 불러도 소용없었다.
‘마, 망했다.’
왜 그녀가 이곳에, 그리고 저런 방식으로 들어왔는지 눈치채지 못할 김대정이 아니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살아야 한다!
그리고.
“저, 젊어지셨네요?”
살기 위해 겨우 끄집어낸 한마디였다.
“정훈이. 너도 박아.”
“옙!”
쿵!
그로부터 몇 시간, 누구도 협회장실 근처로는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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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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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