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20화
020
“한 번 휘둘러 봐.”
이정기는 양손으로 목검을 쥐고 있었다.
‘무거워.’
이보다 더 무거운 검을 한 손으로도 쉽게 휘두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양손으로 들어야 제대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기야. 지구에 가면 네 몸은 한 번 리셋될 거다.’
지구와 올림포스가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치료가 완전히 끝나 새로운 육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처음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뭐 해. 시간이 별로 없다.”
고수완은 재촉에 이정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목부터 움직였다.
휘익!
마침내 휘둘러지는 목검.
“……!”
“……!”
이정기가 처음 목검을 휘두르자, 이정기도 고수완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아. 뭐 하자는 거야? 검 하나 똑바로 못 휘둘러?”
고수완이 놀란 이유는 이정기가 목검을 휘두른 자세가 너무나도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고 한들, 검 끝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곧은 궤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이정기도 마찬가지.
‘뭐야?’
이정기도 방금 자신이 휘두른 목검 탓에 당황하고 있었다.
궤도도 엉망, 자세도 엉망, 이런 식이라면 고블린 하나도 사냥하지 못할 듯싶었다.
“아…!”
뒤늦게 이정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정기가 기억을 하던 시점부터 이정기는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평생을 휘둘렀다.
강인했던 육체, 풍부했던 마력, 올림포스의 짓누르는 마력까지, 그 속에서 휘두른 검이 몸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어른이었던 자가 갑작스레 갓난아이가 되면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법이었다.
“손목에 힘 빼지 말고, 다시 해 봐.”
고수완의 목소리에 이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익!
“다시.”
휘익!
“다시…!”
처음에는 이정기의 실력이 형편없어 자세나 조금 알려줄 생각으로 재차 목검을 휘두르라 했던 고수완.
하지만 지금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해 봐!”
목검이 한 번, 두 번 휘둘러질 때마다 무언가 달라졌다.
궤도도 엉망, 목검을 움직이는 손목도 분명 아까까지 엉망이었다.
하지만 목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자세나 모든 것이 바뀌고 있었다.
휘익!
마지막으로 이정기가 목검을 휘둘렀을 땐.
“대체….”
고수완은 스스로의 경악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해.’
분명 처음에는 형편없는 실력이었는데, 목검을 몇 번 휘두른 것만으로 자세가 완벽해졌다.
목검에 실린 힘이나 다른 것을 생각하면 모를까, 휘두른 자세만을 보면.
‘빈틈이 없어?’
빈틈조차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아직 형편없죠?”
“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익숙하지 않다고…?”
고수완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정기, 그의 뒤에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고수완은 이정기를 눈여겨보겠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오늘부터 튜토리얼 훈련이다. 검술은…, 제법 나쁘지 않았으니, 원한다면 검을 주 무기로 삼아도 좋다.”
* * *
딱, 딱, 딱.
예순은 먹은 노인이 손톱을 물어뜯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거기다 그의 지위가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라면 더욱 보기 좋은 광경이라 할 수 없었다.
김대정.
딱, 딱.
그는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정훈아.”
그와 함께 서 있는 남자, 정보부장인 정훈을 불렀다.
“우리 잘한 거 맞겠지?”
“협회장님 진정하시죠.”
“진정을…! 진정을 어떻게 해!”
김대정이 소리쳤다.
“자칫 잘못하면 너나 나나 모가지야! 직위 해제가 아니라 진짜 모가지가 날아간다고!”
이건을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힌 김대정은 마치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정기를 이성에 보낸 게 잘한 거겠지…?”
이제는 아예 체념한 듯 해탈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김대정.
그에게 있어 이건은 공포 그 자체였다.
“협회장님. 괜찮을 겁니다. 이건 님이 원하신 뜻과는 다를지 몰라도….”
“뜻이 달라…? 그걸 알면서!”
“그래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셨을 겁니다.”
“…….”
김대정이 조금은 진정하자 정훈은 계속 말했다.
“이건 님이 단순해 보이셔도 치밀하게 계산하며 행동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치….”
“아마 정기가 이성으로 가는 것도 예상은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성에서는 그럼 정기가 누구 손자인지 알고 있는 거잖아? 보안 유지가 될까?”
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말해봐.”
“어제, 최명희 회장이 성혈들을 모아놓고 정기 군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부 알게 되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정훈은 침착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보안이 더 잘 지켜질 듯싶습니다.”
“으음.”
“현재 이성은 후계 문제 때문에 알력 다툼이 제법 심한 상황입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이건의 손자라며 나타났으니 어떻겠습니까?”
이제 김대정은 완전히 침착을 되찾은 듯했다.
“이정기 군을 부정하고,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이건의 손자, 그리고 이건의 아들이자 정기의 아버지였던 이강은….”
원래 이성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으니까.
만일 이정기를 인정해버리면, 이정기는 3세가 아닌 강력한 후계자로 급부상할 가능성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건이야 싫어할지 몰라도, 이강만큼은 달랐으니까.
“그래서 최명희 회장님 말씀대로 이정기 군을 바깥에 풀어놓긴 했지만, 그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오.”
김대정의 안색은 이제 완전히 밝아졌다.
“그래서 그분이 그러신 거군. 아예 정기를 사자 무리에 던져놓으면, 그 사자들이 좋든 싫든 정기를 싸고돌게 분명하니까. 먹이를 빼앗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작자들이니.”
“그럴 겁니다.”
이성의 핏줄인 성혈들, 그들의 성격이야 문제가 조금 있을지 몰라도 그 실력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후계 싸움 중에도 어쩔 수 없이 이정기를 지키게 만드는 것은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최명희 회장이야.”
“협회가 조금 도와주면, 당분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래. 정훈이 네가 좀 도와주라고. 그래도 언제까지 비밀이 유지되진 않겠지…. 그에 따른 대비도 해놓아.”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김대정이 정훈을 향해 말했다.
“이건의 소재 파악은 어떻게 되고 있지?”
* * *
“헌터에게 주 무기는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보조 무기의 필요성이 없는 건 아니다.”
거의 매일, 이정기는 이성 길드에서 튜토리얼 훈련을 받고 있었다.
“무기가 파괴되거나, 몬스터에게 무기를 빼앗기거나 혹은 아예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통하지 않는 무기도 있기 때문이다.”
올림포스의 봉인, 그 이후 세계에 더 이상 게이트는 출몰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헌터들이 해야 할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던전.’
게이트와 비슷하지만, 인류에 큰 위협은 되지 않는 그곳을 통해 헌터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현대 사회에 필요한 재화나 특수한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 돈을 위해 목숨을 거는 시대가 된 것이었다.
“특히나 원거리 무기의 필요성은 더욱 중요하지. 그래서 오늘은 활을 다루는 법에 대해 배울 건데….”
고수완의 눈이 이정기를 향했다.
“이정기. 활을 다룰 줄 아나?”
“조금요.”
“그럼 나와서 잡아 봐.”
이성 길드의 견습 헌터들이 모두 이정기를 쳐다봤다.
그들이 이정기를 보는 눈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또 쟤야?”
“하.”“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야?”
질투심이었다.
실력 있는 헌터라고 해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이성 길드, 헌터들의 실력이 뛰어나기에 신입 길드원을 뽑는 횟수도 그렇게 많지 않아 헌터라면 누구나 이성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두가 갖은 노력 끝에 이성 길드에 들어왔다.
견습 헌터라고 하지만 이미 다른 길드에서 수년간 활동했던 헌터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헌터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쳇.”
특채라는 이름의 낙하산.
이성이 특채를 거의 뽑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질투심은 배가 되었다.
“겨우 E급한테 시범을 시키다니….”
차라리 헌터 등급이라도 높으면 받아들이기라도 쉬울 텐데, 이정기는 겨우 E급에 불과했다.
이성이 특채로 E급을 뽑았던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는 일.
그러니 더욱더 이정기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쏴 봐.”
고수완은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이정기에게 활과 화살을 건네 표적을 가리켰다.
파르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파앙!
이정기가 시위를 놓자 화살은 곧장 궤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푹!
깔끔한 소리와 함께 표적에 박혀 들었다.
“훌륭하다.”
고수완이 웃으며 이정기를 향해 말했다.
“자 다들 봤겠지? 활을 쏘는데 가장 중요한 건 활시위를 얼마나 당기느냐가 아닌, 얼마나 정확한 타이밍에 활시위를 놓느냐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각자, 활 들고 표적에 쏴 보도록.”
불평과 불만을 하는 헌터들은 다들 활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들.’
고수완은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이정기에게 시범을 시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보는 눈도 없으면서 무슨 질투를 하는 거야?”
이정기의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다른 헌터들의 말마따나 이정기는 겨우 E급의 헌터였다.
하지만 이정기는.
‘그 등급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능력으로 무기를 다룬다.’
그 실력만큼은 일품, 그 말은 곧 이정기의 등급이 올라가면 무기를 다루는 능력 또한 동등하게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고수완은 이정기를 바라봤다.
누가 질투를 하건, 무얼 하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시킨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이정기.
‘매일이 새롭단 말이지.’
이정기는 거의 매일, 아니 매 순간 성장하고 있는 듯했다.
분명 기록되어 있는 이정기의 등급은 E.
처음 이정기를 봤을 때 느꼈던 수준도 그와 비슷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에이. 말도 안 돼.’
이정기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D등급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고수완은 그걸 착각이라 생각했다.
구세대와 비교해 성장이 빠르다고 일컫는 신세대도 저런 속도로 성장하는 일은 세상에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몬스터를 사냥해서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만 등급이 향상된다는 것도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푸욱!
헌터들이 활을 다루는 훈련을 한참 동안 지속했을 때.
“오늘은 여기까지.”
마침내 오늘의 훈련이 끝났다.
이정기도 마찬가지, 훈련이 종료되어 밖으로 나가자 이진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이정기의 일과는 이것이었다.
낮에는 이성 길드에서 튜토리얼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저녁부터는 이진석과 저택으로 돌아가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구세대, 신세대가 정확히 뭐죠?”
“그 기준은 올림포스의 공략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언제나 이진석은 진심을 다해 이정기에게 정보를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마력의 색깔에 있습니다.”
“마력의 색깔이요?”
이정기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구세대는 거의 대부분, 오직 한 종류. 푸른색의 마력 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푸른색의 마력.
“하지만 신세대는 구세대가 사용하는 마력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고, 아주 드물게 다른 색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색이요?”
“이를테면, 붉은색이나 황금빛 같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색마다 능력이 다르고 그에 따른 특별한 기능이 있죠.”
그때였다.
우웅.
이진석이 펼친 손바닥 위로 붉은색의 마력이 응집되어 있었다.
“붉은색은 스킬에 불의 속성을 띠게 하거나, 파괴력을 증폭시키는 등 여러 효용이 있습니다. 또 붉은색이라고 전부 같은 건 아니고….”
이진석은 특별한 마력을 사용하는 신세대였다.
이정기는 이것이 신기했다.
‘올림포스에서 사용하던 마력은 푸른색뿐이었는데.’
그럼 자신도 구세대인 것일까?
하지만 문득 이정기는 궁금한 것이 생겼다.
“혹시.”
자신이 사용해본 딱 하나, 다른 색의 마력.
“검은색의 마력도 있나요?”
“……!”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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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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