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17화
017
“지금 무어라 했느냐?”
사나운 목소리가 방안을 떨어 울렸다.
최명희, 그녀는 올림포스를 기점으로 나누어진 구세대와 신세대, 그중 구세대의 헌터였다.
그것도 1세대, 이건과 같은 세대의 헌터로 한국 헌터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이성가의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그 성씨조차 물려받지 못한 채 험난한 시간을 거쳐 자라났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이 바뀐 것은 그녀가 헌터로 각성했다는 것.
헌터가 된 그녀는 빠르게 명성을 쌓고 강해져 최단기간 A급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건과 결혼하여 이성을 먹어치웠다.
‘정기야. 지구에 간다면 알아야 할 게 있다.’
‘피한다고…, 피할 수 없겠지. 건아. 네 아비인 강이에게도 당연히 어미가 있단다.’
‘그 여자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던 이정기.
‘제정신이 아니란다.’
혹여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들었던 이야기.
이정기는 이성이라는 말과 최명희를 직접 보자 할아버지가 말했던 할머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허. 내가 모르는 손주도 있었나?”
최명희는 곧 기운을 거두고 말했다.
하릴없는 소리, 헛소리라 치부하는 듯했다.
“그것이….”
정훈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닥치거라.”
하지만 최명희의 서슬 퍼런 경고가 들려왔다.
“내 김대정이 얼굴을 봐서 한 번은 넘어가겠다만, 내 손자를 데려왔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번뜩.
“앞으로 헌터로서의 생활은 하지 못할 줄 알거라.”
“……!”
최명희는 곧이어 이정기를 보았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내 손자를 자칭할 거면 그럴듯해야 할 거다.”
“…….”
이정기는 가만히 최명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사기를 치려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핏줄이 어떨지 상상이 가는구나.”
하지만 지금, 이정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정기야. 절대 참아선 안 되는 게 있단다.’
‘이 할애비를 욕하는 건….’
‘장난이다. 그러나.’
그때만큼 진지한 할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내 아들, 네 아비, 네 어미와 내 며느리를 욕보인다면 결코 넘어가지 말거라. 녀석들은 나와 다르게 감히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는 이들이란다.’
이정기는 마침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사과하세요.”
“……!”
안 그래도 냉랭했던 분위기가 더욱 냉각되었다.
아니 급작스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고오오.
세계 헌터 랭킹 10위권 안에 드는 하이랭커가 분노하며 마력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크헉!”
“커헉!”
정훈은 물론, 정훈과 이정기를 안내했던 경호 헌터 또한 최명희의 마력에 짓눌려 신음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딱 한 명.
“사과하세요.”
“……!”
이정기만은 꼿꼿이 선 채 최명희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히 누군가에게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정기는 또렷이, 그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결국….”
“결국?”
“할머님을 스스로 욕보이는 게 될 겁니다.”
이정기는 최명희를 향해 할머니라고 말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정기의 핏줄을 욕한 최명희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격이었다.
더욱더 달아오른 분위기.
마력은 아예 모두를 찢어발길 듯 더욱 강렬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푸….”
하지만 그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흐흐.”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최명희.
“네 아비와 어미는 욕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네 할애비는 빠졌구나.”
“할아버지는 스스로 욕을 먹어도 싼 인간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정기는 담담히 신중하게 말했다.
“할머니 앞에서는 꼭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래도 제게는 소중한 할아버지입니다.”
최명희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지는 듯했지만, 곧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래. 네가 내 손자라고….”
최명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임에도 170이 넘어가는 큰 키, 갈기와 같은 하얀 머리칼.
백사자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그녀가 성큼 이정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정기는 결코 최명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기야. 잊지 말거라. 얕보여선 안 된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느새 이정기의 앞에 선 최명희, 그녀는 이정기보다 분명 작은 키임에도 이정기를 내려다보듯 말했다.
“좋은 눈이구나.”
* * *
이성의 회장실에 더 이상 이정기는 없었다.
이정기만을 먼저 돌려보낸 회장실에는 최명희와 정훈, 그리고 최명희의 오른팔 격이라 할 수 있는 박윤태만이 함께 있었다.
“회장님. 유전자 검사를 요청….”
“시끄럽다.”
박윤태의 말에 최명희가 말했다.
“보지 못한 거냐?”
“…….”
“그 얼굴. 분명 그 망할 개 잡종을 닮았지만, 분명 내 아들 강이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최명희가 사납게 박윤태를 노려보았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제 최명희의 눈은 정훈을 향해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꿀꺽.
정훈은 마른 침을 삼킨 채, 최명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올림포스의 봉인진이 깨어지던 날, 이건 헌터가 목격되었다는 소식은 들으셨겠죠.”
이곳은 이성이다.
협회와 비교해도 절대로 꿇리지 않을, 오히려 압도할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
“그날 이건 헌터는 김대정 협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개 잡종이 진짜 돌아왔다는 거군. 김대정이라면 사람 잘못 봤을 리도 없고.”
“그리고 몇 가지 메시지와 함께 정기 군을 맡기셨습니다.”
“흐음.”
최명희는 턱을 괴고 정훈의 이야기를 들었다.
“위협이 있다. 시선을 끌기 위해 지금은 자리를 비우시겠다고, 정기 군을 부탁한다고.”
“위협?”
세대가 변했다.
신세대라 불리는 헌터들은 구세대의 헌터들이 과대평가되어 있다며 무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건에 대한 것도 그랬다.
과거 신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위업을 쌓은 이건이지만, 신세대 헌터들은 그것이 그저 과거였기에 가능한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명희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이건이 개 잡종에 불과한 잡놈이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라고.
“예. 그리고 일신상에 문제가 있는 듯했습니다.”
“올림포스에서 이십사 년을 보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당분간 정기 군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한다고도 전하셨습니다.”
최명희가 피식 웃었다.
“나에게도 숨기라 했겠지.”
“그, 그건…, 그래도 나중에는 말씀드리라고….”
“잘했다. 결국, 나한테 데려왔으니.”
후우, 정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협, 그리고 숨기라고….”
그 개 잡종답지 않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건 내 알아서 하지.”
“하지만….”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정훈이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최명희의 앞에서 반문을 해선 안 된다.
이미 몇 번을 했지만, 그건 정기를 데려온 것이 자신이기에 봐준 것일 뿐.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 아이. 그렇다면 게이트에서 태어난 건가.”
“그렇습니다.”
최명희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기 군의 몸에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적어도 저희가 판단하기론.”
“…….”
“또한, 정기 군은 헌터로서 확인되었으며, 그 능력도 측정을 끝마쳤습니다.”
정훈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했다.
“육체 능력과 마력, 스킬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파악한 사실을 통해 결정한 정기군의 헌터 등급은….”
정훈이 말을 이었다.
“E급입니다.”
* * *
“후우.”
이정기는 숨을 골라 쉬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무서운 분이셨지.”
처음 만난 할머니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
그만한 위압감은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몸을 짓누르던 마력장, 그것만큼은 옛날의 할아버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정기야.’
할아버지와 지구로 오기 전 짰던 계획.
그중 자신이 이성가로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고 짠 계획도 있었다.
가장 어려운 난이도 중 하나였던 계획.
“할아버지들….”
괜스레 이건과 쥬피터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앓는 소리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내가 강해져야 해.’
그래야만 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들어오세요.”
이정기의 말에 문을 열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성 길드의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
“당분간 이정기 님을 맡아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필요하신 것은 언제든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만약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함을 터트렸을 것이다.
이성 길드의 이진석이 누군가.
이성이 자랑하는 랭커 중 한 명이며, 검을 다루는 실력이 일품이라 미국의 크라운 길드에서도 영입을 제안했던 사내가 바로 그였다.
그런 이진석이 그저 보좌하는 역할이라니.
이것이 이성이었다.
“또한, 저는 이정기 님의 경호를 함께할 것이며, 언제든 호출하면 달려올 경호 인력이 여섯 정도 더 있습니다.”
이진석은 고개를 펴고 똑바로 서 이정기를 보았다.
‘이 청년이 새로운 성혈이란 건가.’
성혈, 별의 피.
그건 사람들이 이성의 핏줄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성의 피를 이은 자라면 누구나 별이 될 정도의 자질을 가졌다는 뜻.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일컬어지는 것은 딱 하나.
‘이강.’
이정기의 아버지 이강이었다.
만일 그가 올림포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성은 그의 것이 되었을 터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이정기의 말에 이진석의 눈이 잠시 떨렸다.
‘다르군.’
다른 성혈들과는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별로 태어난 그들과 다르다.
‘정말….’
이 자가 그 괴물의 손자란 건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진석은 인사를 마치고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정기 님을 환영하는 만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만찬이요?”
“저녁 식사 자리로….”
이진석이 꿀꺽 침을 삼키고 말했다.
“모든 성혈 분들이 모일 예정입니다.”
“성혈…?”
“이정기 님과 같은 이성가의 자제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
“이정기 님과는 사촌지간이 되겠군요.”
사촌.
“…….”
이진석은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레 말했다.
“긴장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사촌이면 가족 아닌가요?”
그 말에 이진석은 쓰게 웃었다.
과연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다더니 그런 듯했다.
“이성의 가족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꽤나 많을 듯하다.
“다른 가족과는 다릅니다.”
대에엥.
그리고 마침내 만찬이 약속된 여섯 시가 되었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펴낸곳 | 오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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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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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