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13화
013
“환영 인사치곤 화려하군.”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인간?”
또렷이 들려오는 것은 분명한 언어.
헌터의 상식으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몬스터는 결단코 없었다.
거기다 언어가 익숙하다.
“한국어!”
한국어, 생츄어리에 속해 있는 몇 명의 길드원 또한 헌터 강국이라 불리는 한국의 출신이기에 안다.
아니 그 전에, ‘그’가 바로 한국인이었으니, 적어도 한국어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헌터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팀장!”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팀원들.
“…….”
레옹은 안개가 걷혀가는 것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아직 공격은 이어지지 않는다.’
도시 하나를 가루로 만들어낸 폭발 속에서도 멀쩡한 목소리를 내는 존재다.
그가 적대심을 가지고 바로 반격을 했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삼 분의 일은 죽었을 것이다.’
경험이 있기에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는 적이 아니라는 것일까?
“팀장!”
그렇지만 올림포스에서 나온 존재였다.
자신이 받은 명령과 교육은 오롯이 하나로 귀결되어 있었다.
‘올림포스에서 나온 존재는 그 무엇이든 반드시 척살하라.’
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간, 거기다 적대심이 없는 존재라면.
“새, 생존자일 수 있다!”
올림포스에 남았다는 그들.
인류를 위해 희생하며, 마지막까지 그곳에서 인류를 수호하겠다던 그들.
“한국팀의 생존자일 수 있다!”
한국팀의 생존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생츄어리의 목적은 한국팀의 생존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만일 그곳에서 생존자가 나온다면.
“팀장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로베르트, 또 녀석이었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올림포스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이라도 죽이는 거야!”
말릴 틈이 없었다.
로베르트는 이미 소리치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로베르트!”
저 짙은 안개 속을 향해, 녀석의 무기를 들고 진입하고 있었다.
“겁먹은 거라면 보여주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로베르트, 레옹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무기가 뿜어내는 마력의 빛뿐이었다.
“신세대의 힘을!”
로베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레옹이 몸을 움직였다.
로베르트를 말리건, 상대를 죽이건 어쨌든 저 안개에 진입해야 했다.
“따라….”
자신을 따라오라 명령을 내리던 레옹.
그가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멈춰 섰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끄어어….”
이 자리에 있는 헌터 전원이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신음만 내고 있었다.
‘몸이…, 몸이 안 움직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설마 눈치채지 못한 사이 당한 것일까?
파앗!
사방에 짙게 깔렸던 마력의 안개가 단박에 걷혀 사라졌다.
그제야 레옹은 자신이 무엇에 당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특별한 스킬이 아니다.
그저.
덜덜덜.
위압감.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며 단 한 가지 생각만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대로 죽는다.
살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헌터가, 전쟁을 치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전력이.
“크흡!”
단 한 명이 내뿜는 존재감에 질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 또한 틀린 소리였다.
“……!”
레옹이 눈을 부릅뜨고 그곳을 보았다.
“크, 크으으윽.”
호기롭게 달려나갔던 로베르트.
안개 속으로 녀석이 진입한 지 단 몇 초 만에 로베르트는 목덜미를 잡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누구…, 누구냐!’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이런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로베르트 또한 랭커, 그런 랭커를 몇 초 만에 제압하고 힘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
“마, 말도 안 돼.”
지금 보고 있는 그 상대가 진짜라면 가능하다.
가히 전설과도 같은 존재.
레옹과 같은 시대를 살아오며, 수많은 위업을 달성한 존재.
“거, 건…!”
이건!
“환영 인사는 끝났나?”
그가 로베르트의 목을 쥔 채 그곳에 서 있었다!
* * *
이건은 이정기를 등에 업고, 검은 천으로 이정기를 가려두었다.
또한, 이정기에게 마력장을 덧씌워 인식을 비틀었다.
‘저들은 정기를 볼 수 없다.’
아직 정기는 드러나선 안 된다.
그러니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야만 했다.
“환영 인사는 끝났나?”
“저, 정말….”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진 녀석.
그자가 이건을 향해 말해왔다.
“건…, 이십니까?”
“날 아나?”
들려오는 불어에 이건 또한 불어로 답했다.
“모,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명석한 판단, 녀석은 손을 들어 헌터들을 제지한 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후읍….”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남자.
“저는 뷔앙을 모시는 레옹이라 합니다.”
“레옹? 뷔앙의 밑에 있다고?”
이건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 얼치기.”
푸흡, 분위기만 이렇지 않았어도 레옹은 물론 헌터들 전원이 이렇게 웃었을 것이다.
서드라인의 랭커 레옹.
그의 이명은 철사자, 세계에서 최고로 쳐주는 헌터 중 하나인 그였다.
헌데 그를 얼치기라 부르다니.
“기,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레옹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를 놓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저희 길드의 일원입니다.”
“미시랭?”
뷔앙이 만들었던 길드, 미시랭.
“아닙니다. 지금은 다른 길드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레옹은 이건이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 옙?”
“넌 날 잘 알 텐데?”
무표정한 얼굴의 이건.
레옹은 겨우 밀어냈던 긴장감이 다시 몸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내게 무기를 들이밀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한 순리다.”
“그건….”
“뭐.”
툭.
이건은 쥐고 있던 로베르트의 목을 놓아버렸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로베르트의 목에 나 있는 선명한 손자국.
하지만 불쑥 올라오는 가슴을 보니 다행히 숨은 붙어있는 듯했다.
“으, 은혜에 감사합니다.”
“됐다. 오늘은 내가 지구에 귀환한 경사스러운 날이니 괜히 피를 볼 필요는 없겠지.”
“정말…, 건이신 겁니까?”
레옹은 말을 해놓고 곧 손사래를 쳤다.
“분명 한국팀은 올림포스에 잔류했다고,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보고 받았기에.”
“뭐, 겨우 너한테 일일이 설명할 이유는 없다.”
저벅.
걷기 시작한 이건.
그에 반응하듯 사방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옹이 명령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존 본능.
눈앞의 맹수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그것만 알면 돼.”
타앗.
이건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멀어져가는 이건의 신형.
“내가 돌아왔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건의 기척조차 사라졌다.
“허억…, 허억.”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우웨에엑!”
그가 사라지고 정신을 차린 헌터들.
감히 이건의 앞에서 무엇조차 할 수 없었던 그들.
특히나 정신을 놓을 듯 몸을 휘청거리는 레옹은 꿈이라도 꾼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돌아왔다고?”
그때였다.
“오, 올림포스!”
또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림포스가 완전소멸했습니다!”
* * *
한국 헌터 협회.
“뭐어?”
한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인 김대정은 보고를 받고 급히 협회로 온 찰나였다.
“그게 진짜야?”
“예. 올림포스에서 반응이 일어났고, 봉인이 풀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언제 온 연락이야?”
“십오 분쯤 됐습니다.”
김대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올림포스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게이트였다.
특히나 최초로.
‘그가 실패한 게이트.’
그 남자가 공략에 실패한 게이트이기도 했다.
더욱이 올림포스에서 겨우 살아온 당대 최고의 헌터들은 올림포스를 철저히 봉인하고 감시할 것을 제안했었다.
그리고 말하길.
‘올림포스의 봉인이 풀리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적들이 쏟아질 것이네.’
올림포스는 지옥이라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악마들이 뛰쳐나올 것이라 했었다.
그런 올림포스에 반응이 일었다.
생존자들이 돌아온 지 24년, 그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츄어리의 팀장인 레옹이 공격대와 헌터들을 모아 대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정보.
“레옹이라면…, 철사자군. 그라면 믿을 수 있지.”
서드라인의 강자.
그 또한 구세대이기에 그의 실력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안 돼. 그 올림포스다. 다른 랭커들은?”
“하이랭커를 포함해 지원이 급히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뷔앙께서도….”
“뷔앙이 직접 움직인다, 라.”
절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른 시엘들은?”
“연락은 취했다고 하나 반응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허.”
김대정은 숨을 내쉬었다.
24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다.
올림포스가 봉인되고 더 이상 세상에 게이트는 출몰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
또 다른 형태의 게이트.
하지만 게이트와 던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위협이 되는가였다.
게이트는 브레이크를 일으켜 몬스터를 쏟아내 지구를 초토화시킨다.
그에 반해 던전은 브레이크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인 곳이었다.
그런 24년이었다.
하지만 지금, 올림포스가 움직인다면.
‘또다시 끝없는 전장이 시작될지 모른다.’
끔찍한 일.
“협회장님!”
“무슨 일이지?”
“생츄어리 측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
김대정이 눈을 치켜떴다.
“결국…, 당한 것인가!”
이렇게 빨리?
틱. 틱. 틱.
협회장실의 시계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겨우 올림포스의 반응이 확인된 지 삼십 분, 올림포스의 봉인을 전담하는 생츄어리가 궤멸했다는 것인가.
“아직 다른 소식은….”
“방금 다시 연락이 재개됐습니다!”
보고하던 이가 소리쳤다.
“올림포스가, 완전히 소멸했답니다!”
“뭐? 방금은….”
“그게!”
휘익!
김대정은 물론이고, 협회장실에서 보고하던 이, 협회장을 수행하는 이들.
경호원들까지.
덜덜덜.
그들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김대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김대정이, 오랜만이야.”
그곳엔 결코 있어선 안 될,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서 있었다.
“이,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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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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