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12화
012
의식을 잃은 이정기.
그를 이건이 안아 들고 있었다.
“작별이군.”
아직 이곳은 올림포스.
신전의 모든 횟대에 드리운 푸른 불꽃이 신전의 정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쿠쿠쿵.
느껴지는 진동.
그러나 진동은 이곳 신전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올림포스가 붕괴하고 있다.’
마지막 핵이 파괴됨에 따라 게이트가 겪어야 할 당연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은 이정기를 안아 든 채 쥬피터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흐릿해져, 형체도 남지 않고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는 그.
“정기에게 더 전할 말은 없나?”
이건의 물음에.
-그 아이에게 내가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 전해주게.
쥬피터가 마력을 통해 뜻을 전달했다.
“…….”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이건.
-명심하게. 정기가 지구에서 제대로 힘을 다룰 때까지, 그들에게 노출되어선 안 되네.
“노력하지. 그러나 걱정하지 말게. 정기는 그리 나약하지 않으니까. 자네도 그간 봐왔지 않나.”
-그들은 네가 지금껏 상대해온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네.
사라져가는 쥬피터는 계속해서 경고했다.
-가장 약한 이가 자네들이 처음 해치운 나의 자식과 동급.
원래 올림포스의 보스였던 그 자를 말하는 듯했다.
-다른 형제들은 나와 비슷한 수준일세.
“그 정도라면….”
-마지막 티탄들은 나보다 강하며.
이건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그들의 왕인 티폰은 그보다 강하네. 그러니 자만하지 말게. 뭐, 그들 또한 완벽하진 못할걸세. 제대로 봉인이 풀리기도 전, 지구로 도망친 것이니.
쥬피터의 몸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네.”
그러나 이건은 아직 그의 의지가 떠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자네의 후계, 그것이 정기라고 했지.”
원래 정기에게 깃든 힘은 쥬피터의 후계가 될 자의 힘.
“그렇다면 혹시 생각해둔 이름이 있는가?”
-……?
“헌터들은 최고 수준에 이르면, 코드명을 선택할 수 있지. 또 다른 이름, 이명이라고도 하네.”
쥬피터의 의지가 떨리는 듯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정기에게 그 이름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어느새 쥬피터가 있던 자리에 둥둥 떠 있는 푸른 구슬.
이건은 쥬피터가 말했던 대로 그것을 집어 정기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우우웅.
공명하는 푸른 구슬은 이정기의 가슴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징.
작은 울림이 생겼다.
지이잉!
그 울림이 점차 커졌을 때, 이건은 오랜만에 감정이 동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만인가.’
이 소리를 듣는 것이.
지금 울리는 공명음은 과거 이건이 매일같이 들었던 전장의 소리였다.
게이트, 올림포스가 무너지며 마침내 지구로의 탈출로가 열린 것이었다.
이건은 그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이정기를 안아 든 채 발을 내뻗었다.
저벅. 저벅.
무너지는 올림포스 속에서 이건의 발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이건이 이정기를 안고 한쪽 발을 게이트에 걸친 순간.
-허큘리스.
쥬피터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허큘리스라….”
이건은 쥬피터가 있던 그 자리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똑똑히 전달하겠네.”
지잉.
게이트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건과 이정기.
쿠쿠쿵!
뒤이어 쥬피터와 이건, 이정기가 지내온 신전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 * *
“별일 없지?”
프랑스의 헌터이자, 최상위권 헌터를 부르는 말인 랭커 중 하나 레옹이 말했다.
“뭐 별일이랄게 있습니까?”
레옹을 향해 귀찮은 듯 하품을 하며 말하는 이 또한 천 명의 헌터에게만 주어진다는 랭커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하긴.”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총 이십 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모두가 최상위권 헌터를 뜻하는 랭커였으며, 동시에 하나의 길드에 속해 있었다.
같은 목적을 지닌 헌터들이 모여 만들어낸 길드.
그들이 속한 길드의 이름은.
‘생츄어리.’
오십오 인의 길드원 전원이 랭커인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길드였다.
그들은 모두 생츄어리의 목적, 그 단 한 가지 아래 모여들었다.
랭커라 불리는 그들이 하는 일은 딱 하나.
“그래도 긴장 풀지 마.”
봉인을 살피는 것.
그것이 생츄어리의 목적이었다.
“저게 열리는 날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사상 최악이자 최강, 그리고 시작과 끝이라 불리는 게이트.
올림포스를 봉인하고 그 봉인을 감시하기 위해 모인 자들이 바로 생츄어리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은 상시 대기하며 봉인을 감시하고, 올림포스를 지킨다.
그것이 그들을 모은 생츄어리의 길드장이자, 시엘이었던 뷔앙의 뜻이었다.
“근데 레옹 팀장.”
“왜?”
“저게 진짜 그렇게 위험할까요?”
“뭐?”
평소에도 허튼소리를 자주 해서 레옹과 마찰이 있는 길드원 로베르트의 질문이었다.
로베르트는 스물셋이란 어린 나이, 그럼에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생츄어리의 일원이 되었다.
다만 경험이 부족한 데다.
‘신세대.’
신세대라 불리는 헌터의 일종이었기에 구세대를 깔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올림포스라고 해봐야 결국 구세대 게이트잖아요? 솔직히 과장된 면이 없지 않을 거란 말이죠.”
로베르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냥 저거 열어버리고 처리하면 저희가….”
“로베르트.”
레옹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 이상 헛소리를 했다간, 아무리 너라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어.”
엄중한 경고, 동시에 힘 있는 경고였다.
레옹이 팀장급인 것은 그저 그의 경력이 오래되어서가 아니었다.
랭커 중에서도 상위권, 그것도 급이 달라진다는 3백 번대인 서드라인에 속해 있는 헌터이기 때문이었다.
“쳇. 알겠다고요. 그치만 저희한테 주어지는 예산이 달에 조 단위잖아요. 뭐, 앉아서 돈 버는 게 즐거운 일이어도 조금 납득이 안 간단 말이죠.”
“로베르트 마지막 경고….”
레옹이 로베르트를 향해 으르렁대던 때였다.
위잉! 위잉! 위잉! 위잉!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갑작스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생츄어리가 만들어진 지 어언 24년, 그동안 사이렌이 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저 사이렌 소리가 뜻하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시…, 실….”
생츄어리의 사이렌이 울리는 경우는 딱 하나.
봉인이 풀려 올림포스가 개방될 때!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실제상황이다!”
레옹이 소리쳤다.
“긴급 소집령 내리고! 길드장님께 보고해!”
수없이 반복해왔던 훈련.
“로베르트!”
“옙! 팀장!”
“당장 대기하고 있던 인원 데리고 봉인 마법진 확인해!”
“알겠습니다!”
방금까지 투닥거리던 로베르트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토씨 하나 달지 않았다.
“찰리!”
“옙! 팀장!”
“지금 동원 가능한 길드에 전부 지원 요청해!”
“옙!”
“이원형!”
“옙!”
“공격대 데리고 가서 봉인진 출구 막아!”
“알겠습니다! 팀장!”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
수도 없이 반복해온 훈련이 그들을 마치 일상처럼 움직이게 해주고 있었다.
꿀꺽.
온통 경고를 알리는 붉은 빛.
레옹은 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덜덜덜.
저도 모르게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로베르트와 같은 건방진 신세대들은 모른다.
저 올림포스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꾸우욱.
최고라 불렸던 헌터들과 시엘들이 동원되어 공략에 실패한 최초의 게이트.
그리고.
‘그의 무덤.’
최강이었던 자의 무덤이 되어버린 곳.
저것이 다시 열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촤릉.
레옹은 제 무기인 흑창을 꺼내 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일이 생기건 결코 실수 하나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가 바뀐다.’
* * *
꿀꺽.
막연한 긴장감이 모두를 감싸 돌고 있었다.
올림포스를 감싸고 있는 봉인 마력진, 그 바깥에 백여 명의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단 십오 분.
그 잠깐 사이에 도착한 인원이었다.
해외 출장이나, 현재 올 수 없는 인원을 제외한 생츄어리 길드원 삼십 인.
그리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추가로 대기하고 있던 아이기스 길드원의 길드원 삼십 인.
마지막으로 세계 헌터 협회, 올림포스 전담특별팀 소속 헌터가 사십 인이었다.
이 중 랭커는 무려 오십 인으로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전쟁이라도 났을 때 동원될법한 전력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그들일지라도.
덜덜덜.
전신에 밀려오는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사아아-.
봉인진이 부서지며 올림포스의 마력이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막대한 마력이 헌터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라니….”
올림포스와 그때의 게이트를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은 올림포스의 힘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임을 깨닫고 있었고.
“후우.”
올림포스와 그때의 게이트를 겪었던 구세대들은 곧이어 벌어질 일을 예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뷔앙은?”
“오고 계십니다! 텔레포트를 통해 오고 계시니 곧….”
쿵!
갑작스러운 진동이 그들을 덮쳤다.
“늦으시겠군.”
봉인이 풀리고 있다는 소리.
콰득…. 타앙!
게이트의 가장 가까운 안쪽에서부터 마력진을 연결시켜 놓은 사슬이 끊어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뼈를 묻는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
“그러기 위해 그동안 천문학적인 돈을 받았으니, 밥값은 해야겠지?”
“팀장! 누가 보면 우리가 세금이나 갈취하는 도둑놈들인 줄 알겠습니다!”
“뭐 사실이지.”
“하하하!”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하지만 오늘 그 밥값을 해야 한다.”
레옹의 눈빛이 변했다.
“다들 알겠지?”
그들의 절대 원칙 중 하나.
“올림포스의 봉인을 뚫고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후우, 다시금 숨을 내뱉으며 레옹이 말을 이었다.
“죽인다.”
눈빛만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헌터들의 기세가 변했다.
완연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상대가 그 누구든지 간에 쓰러트리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팀장. 예전이랑은 다를 겁니다.”
로베르트,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절반은 신세대잖습니까? 팀장은 우리 신세대만 믿고 있으면 됩니다.”
“건방진 녀석….”
레옹이 입가를 말아 올렸다.
“뭐든 좋으니, 최선을 다해라. 그 신세대의 힘이란 걸 보여줘도 좋고.”
“걱정 마십쇼.”
촤르르. 타앙!
또 하나 봉인이 풀렸다.
봉인이 풀리는 속도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타앙!
이대로라면 1분 안팎.
그 사이에 모든 봉인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타앙!
마지막 봉인의 사슬이 끊어진 순간이었다.
“전원, 전투준비!”
파스스스.
막대한 마력이 쏟아지며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원거리 스킬 준비!”
“끝났습니다!”
그 안개 속에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
“발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도시 하나쯤은 가볍게 지워버릴 위력의 스킬들이 쏟아졌다.
“해…, 해치웠나?”
레옹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하자.
“팀장. 그건 절대 금기…!”
한국 출신의 랭커 길드원인 이원형이 소리쳤다.
“환영 인사치곤 제법 화려하군.”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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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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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