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잠시 자신의 애창(愛槍)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관자룡은 회상에서 깨어나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3주간 이 옥시계를 그리워하게 될 거란 교주님의 말씀은 이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만년필을 굳이 선물로 주신 연유만큼은 도통 모르겠군요. 이 또한 시계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따라서 만들 수 없는 물건이라서 주신 겁니까?”
“만년필은 아마도 아닐 겁니다. 당문 정도면 만년필을 완전히 똑같이 만들지는 못해도 유사한 형태로 구현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 만년필에 담긴 원리라든가 하는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예?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따라서 복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만년필은 함부로 주면 안되는 물건에 속하는 것 아닙니까?”
관자룡에겐 만년필 정도는 당문이 충분히 따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는지 너무도 태연히 미소를 머금고 차를 홀짝이는 교주의 모습이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교주님이 어찌하여 그런 귀중한 물건을 그리도 쉽게 주신 것인지 더 이해가 되질 않군요.”
“관호법, 우리가 이 물건을 만든 이유가 평생 우리끼리만 쓰자고 만든 겁니까? 아니지요?”
“예? 그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너도 나도 따라서 만든다면…….”
“만년필같은 건 우리끼리 애지중지 갖고 놀자고 만든 게 아니라 다 사람들한테 팔아먹자고 만든 겁니다. 신교에 들어오는 수익을 생각한다면 신교에서 만드는 물건은 신교에 해가 되지 않는 한 많이 팔수록 좋은 거니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판매량을 늘려도 물건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공급량이 늘어나면 물건의 값어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요. 그럼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물건을 세상에 퍼뜨리는데 물건의 가치는 떨어뜨려선 안 된다니… 그건 이치에 맞지 않잖습니까?”
애각창이 세상에 흔해지는 것을 떠올리게 상상하니 단지 그 상상만으로도 관자룡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 언뜻 들으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요. 하지만 궁리를 해본다면 충분히 그와 비슷한 효과가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가치가 떨어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방법으로 당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앞으로 만년필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자가 만년필의 편리함과 유용함을 느끼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당문은 스스로 우리 ‘선문 만년필’을 중원에 있는 부유층에게 알릴 발판이 되어 줄 것입니다. 선문상단에서 만든 이 만년필만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고 함게요. 그때를 기다리며 우리는 그저 제대로 된 물건만 만들면 됩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자발적으로 바이럴 마케팅을 해줄 테지.’
만년필의 작동원리란 모세관 현상에 따른 것이라 모세관 현상에 담긴 그 이치를 상세히 모른다 할지라도 만년필을 분해하여 부품의 형태를 따라서 똑같은 형태로 만들기만 한다면 신교에서 만드는 것과 똑같은 수준의 만년필은 아니어도 만년필에 담긴 현상을 재현하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관 현상을 재현할 수 있다고 해서 만년필에 담긴 잉크까지 따라서 만들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현대의 기업들이 왜 소재산업에 투자를 하겠어? 다 이유가 있으니 그렇지.’
“관호법은 만년필은 줬지만 만년필에 넣는 묵수(墨水 ink를 말함)는 제가 챙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가 만든 묵수는 따라 만들지 못할 것이라 여기시는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호법 중에서도 나름 꾀가 있는 축에 속하는 관자룡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묵수를 대체할 물건이 있지 않겠느냐 되물었다.
“만약 묵수를 대체할 수 있다면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먹으로 만년필을 채울 액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 짓을 하면 선물로 받은 만년필만 망가뜨리게 될 겁니다. 먹물은 공기 중에 노출되면 굳어 버리거든요. 이건 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입니다.”
“그렇다면 묵수를 전부 소모한 뒤에는 반드시 선문상단을 찾아야 하겠군요.”
“맞습니다. 만년필에 넣을 묵수와 이미 망가진 만년필을 다시 고치기 위해서요. 그땐 물론 이번처럼 공짜가 아닐 테지요. 하하하하.”
왜 기업이 프린터기의 가치에 비해 프린터기를 싸게 팔고 소모재인 잉크를 비싸게 팔겠는가, 면도기와 면도날의 관계는 어떠한가. 상대적으로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은 이문을 많이 붙이지 않고 교체하거나 채워줘야 하는 소모품에 이문을 붙이는 방식은 현대에선 너무도 흔한 것이었다.
관자룡에겐 한 수로 여러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교주의 혜안(慧眼)이 참으로 놀랍게 느껴졌다. 동시에 교주의 치밀한 암계(暗計)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 분명한 당문의 사람들에겐 동정심이 생겼다.
‘그들의 고생문이 벌써부터 훤하구나.’
* * *
“이런! 벌써 다 써버린 건가? 어허… 아니야… 지난 3주 가까이 툭하면 이 만년필을 보여주면서 여기저기 글을 쓰고 다녔으니.”
화운으로부터 만년필을 처음 받아왔을 때만 해도 화운에 대한 화가 가라앉질 않아 선물로 받아온 만년필이라는 물건을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물(奇物)은 구하고 싶다고 해서 절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기물을 사랑해 마지않는 당기호로선 처음엔 만년필을 볼 때마다 종이를 팔랑이며 웃는 놈의 얼굴이 떠올라 욕이 터져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간의 감정에 취해 기물을 망가뜨릴 사람 또한 아니었다.
그렇게 처음의 분노는 잠시 옷이 완성되어 오길 기다리는 동안 만년필을 쓰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면서 기억 저편에서 사그라들었고, 이내 당기호는 만년필의 편리함과 만년필이 주는 필기감이란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때부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년필의 뛰어남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다.
“흐음, 오늘 들은 장가(長家)의 시구를 잊기 전에 기록을 하고 싶어서 그러니 지필묵을 준비해주시게.”
누군가 서로 시를 읊으며 놀고 나서 자리가 파하기 전에 들은 시구를 기억하고자 지필묵을 청하자 당기호는 이때다 싶었다.
“지필묵? 자네는 아직도 글을 써야할 때 필묵을 전부 다 따로 챙기도록 하는 게야? 이 사람 참 시대에 뒤처지는구만.”
“예? 제가요? 아니 그럼 태상문주님께선 그럼 글을 쓸 때 지필묵 외에 다른 방도가 있으시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 당문에선 요즘 이런 걸 들고 다닌다네.“
오늘만 기다려온 사람처럼 당기호는 이전에 화운이 보여준 것처럼 품 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게 뭐하는 물건입니까? 꼭 여인네들이 쓰는 비녀 같기도 하고, 무림인이 무기로 쓴다는 판관필(判官筆)처럼 생긴 것도 같은데 생전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하하하, 이게 바로 만년필이라는 거네. 만년필.”
“만년필이요? 허면 그게 만년(萬年)이나 쓸 수 있는 붓이라는 겁니까? 전혀 붓같이 생긴 것 같진 않은데요?”
“그렇게 보이지? 내가 한번 이 물건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겠네. 보고 내 설명을 들으면 이 만년필이란 물건이 감히 만년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인지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될 걸세.”
그동안 연습을 한 결과 만년필로도 멋들어진 필체를 구현할 수 있게 된 당기호가 쓱쓱 종이에 글을 쓰자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정말 놀랍습니다. 딱히 먹을 묻히지도 않았는데 이리도 매끄럽게 글이 써진다니.”
“허허허, 자네가 제대로 보았구만. 이 만년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그것이지. 언제든 원할 때 이 만년필을 꺼내 뚜껑만 열고 쓰면 된다네. 글을 적기 위해 굳이 무겁게 벼루와 먹과 연적을 챙겨 다닐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야.”
“이런 물건은 정말 처음 봅니다.”
“하하하, 세상에 이런 물건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 것 같은가? 저 멀리 북경에 사는 황제조차 이런 물건을 가지지 못했을 터인데.”
“그리도 귀한 물건이란 말씀이십니까? 혹시 저에게 만년필을 파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도 사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건 그런 식으로 쉽게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야. 나도 어렵게 구한 물건이란 말일세.”
‘몰래 사람을 시켜 선문상단에서 만년필을 판매하는지 알아봤지만 장인들에 의해 소량생산된 물건이라 판매는 아직 기약이 없다고 했었거든.’
시간이 흘러 언젠가 만년필이 세간에 흘러나올 때가 오긴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 당기호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 실물을 보길 원하는 이들이 많아진 상황에서 만년필을 뽐내기 위해 아예 왼쪽 가슴에 만년필을 끼워둘 주머니를 따로 만들 정도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더니… 이것도 결국 안에 채워진 먹을 다 써서 이젠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정말 아쉽구나, 아쉬워.”
“아버님, 그러면 다 쓴 먹을 다시 채워 넣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당건원의 지혜에 당기호는 박수를 치며 옳다구나 싶었다.
“아이고, 그리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내 그걸 생각 못했다니! 그리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허…….”
“때때로 하나에 빠지면 다른 게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맙구나.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먹을 채워 넣어봐야겠다.”
아들의 조언을 들은 당기호는 서둘러 먹을 갈아 만년필을 열어 대롱으로 겨우 먹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이리 하면 쉬운 것을 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끙끙거렸구나. 쯧.”
이전에 담긴 먹과는 농도가 다른 것인지 글을 쓸 때 살짝 불편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건 농도의 문제인 듯하여 당기호는 다음엔 농도를 달리 해서 만들어 봐야겠다며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아니! 이게 왜 이러지?”
어찌된 일인지 며칠 전에 먹을 채워 넣었음에도 만년필이 써지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해서 그세 먹을 다 쓴 건가 싶어 다시 먹을 갈아 채워 넣어 봤지만 여전히 만년필은 써지지 않았다.
“설마 그새 고장이 난 건가?”
나름 기관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당기호는 이번엔 끙끙거리지 않고 바로 만년필을 천천히 분해하였다.
“어디 보자… 어디가 문제가 생긴 것이냐.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꼼꼼히 부품 하나하나를 살피고 나서 당기호는 먹이 말라붙어 먹이 흘러나오는 구멍이 막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흐음, 이거 물건을 잘못 만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는걸? 가서 한번 따져봐야겠구나.”
약속했던 3주를 채우기엔 며칠의 말미가 더 있긴 했지만 마지막에 종이를 팔랑거리던 화운의 행동을 고깝게 여겼던 당기호는 이때다 싶어 다시 만년필을 조립한 뒤 거처를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아버님?”
“만년필에 문제가 있어 내 선문 상단에 따지러 가는 길이다.”
“만년필에 문제가 있다구요?”
“그래. 나중에, 나중에 돌아와서 이야기하자꾸나.”
당기호는 아들과의 대화를 끊고선 서둘러 화운을 찾아 냉큼 상단으로 달려갔다.
“… 제가 드린 만년필이 벌써 고장이 났다구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그럴 리가 없기는? 그대가 준 물건이 성치 않은 물건이라 이리 사단이 났는데? 그럼 내가 멀쩡한 물건을 고장이라도 냈단 말인가? 어찌 이런 변변치 못한 물건을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인지 참. 내가 동네방네 이 만년필을 들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내 앞으로 사천바닥에서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소?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선문상단의 물건이 이리도 형편 없다는 걸 사천의 동도들이 모두 알도록 모두 불러모아 진실을 터뜨려야겠소.”
“진정하시지요. 우선 제가 만년필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번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물건을 열어보자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당기호가 먹을 갈아 잉크를 대신해 채워 넣는 바람에 이리 되었다는 것 정도는.
“하아… 여기 이렇게 적어놨는데 설마 못 보셨습니까?”
“뭐가 적혀 있단 말이오? 난 그런 거 전혀 못 봤는데.”
“여기 보십시오. 분명 묵수(墨水)를 채워놓는 곳에 이렇게 경고문구를 적어놨습니다만.”
용운이 만년필을 이루고 있는 부품 중 하나를 들어 당기호에게 보여줬다. 거기에는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만년필 전용 묵수(墨水) 이외 절대 사용금지. 만약 전용 묵수 이외의 것을 사용하여 문제가 생길 시 상단에선 이로 인한 문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