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추향과 소소가 흥분해서 내기문서를 작성하는 당기호를 말렸으나 이는 크게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다. 당기호는 만년필로 두 장의 종이에 같은 내용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적고 만년필을 탁자에 탁하고 내려놓고선 상의 주머니에 있던 암기를 꺼내 자신의 엄지를 찔러 피를 내곤 지장(指章)을 순식간에 연달아 찍어버렸다.
“자! 내기의 내용이 틀린 바 없이 적혀 있는지 읽어보시오. 내가 방금 나눈 내기의 내용을 모두 적어놨으니.”
“좋습니다.”
용운은 옆의 두 여자가 말리기 전에 남자들의 내기를 서둘러 마무리 짓기 위해 적힌 내용을 읽고선 오늘 시계를 주고서 인수증에 찍으려고 했던 자신의 직인을 꺼내 당기호의 지장 옆에 인주를 묻혀 꾹 눌러 찍었다.
“이제 내기는 성립된 겁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은 이부지자(二父之子)라 했지요?”
용운이 키보드 워리어들의 패드립처럼 이 시대에서 사용되는 패드립 중에서 가장 패드립이라할 수 있는 일구이언 이부지자를 시전하자 당기호는 크게 노해서 분기탱천했다.
“끙! 당가의 사람은 한입으로 결코 두말하지 않소! 그쪽이야말로 그 시계들 잘 간직하고 계시오. 내 3주 뒤에 당신이 옷을 만들어 오지 못하거나 옷을 만들어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면 저 옥시계를 가져길 테니. 얘들아, 가자!”
“할아버지…….”
“아버님.”
당기호가 벌떡 일어나 벗었던 장포를 다시 걸친 뒤 내기 문서를 챙겨 떠나려고 하자 용운이 그런 당기호를 멈춰 세웠다.
“잠깐!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내기의 증표로 이 만년필을 선물해드리고 싶군요. 가져가십시오.”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이 만년필을 선물로 준다? 고작 내기의 증표로? 훗, 사정을 봐달라 미리 부탁하는 거요? 이리 선물을 주어도 달라지는 것은 이제 없소이다.”
“그런 게 아니라 옷도 주문해주시고 앞으로 두배나 되는 대가를 치르고서 옥시계를 사주실 고객님께 겨우 이 정도 선물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딱 공정하게만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물건이 그때까지 완성되지 않거나 옷을 봤을 때 별로 확연히 나아진 것이 없다면 느낀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하하하하.”
용운의 말을 듣자 비싼 만년필이라는 귀물(貴物)을 선물 받았음에도 당기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버렸다.
“이익. 내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소.”
“잊으면 안되지요. 무려 은자 20만냥이나 걸렸고 이렇게 내기에 응한다는 문서까지 손녀와 며느리분께서 지켜보고 계신 자리에서 작성했는데 말이죠.”
내기의 내용이 적힌 종이를 팔랑팔랑 흔드는 용운의 모습은 이 모습을 밀실(密室)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자룡에게도 참으로 얄미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교주님이긴 하지만… 내가 당기호였더라면 아마 길길이 날뛰었을 거야.’
세 사람이 확실히 자리를 떠난 것을 기감으로 확인한 관자룡은 밀실에서 나왔다.
“교주님,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뒤에서 보고 있는데 제가 봐도 참으로 얄밉게 말씀하시더군요.”
“훗, 다 이유가 있어서 그리 행동한 겁니다.”
“아! 교주님께선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겁니까?”
“당연하지요. 뒤끝이 길기로 유명한 당문을 뭐하러 박박 긁으면서 내기를 건 답니까? 그래 봐야 원한만 쌓을 텐데 저도 쓸데없이 원한을 쌓고 다니는 건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이 관자룡이에게 어찌하여 그리 내기를 걸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연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이번에 관호법이 직접 와주신 덕분에 이렇게 시계를 배송받지 않았습니까? 우리 구방기사 님에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요. 차 한잔 마시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어쩔 수 없이 이번엔 제 차례가 되어 날아왔는데 이거 부랴부랴 날아온 보람이 있습니다?”
차가 준비되자 궁금해서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한 관자룡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향을 즐기고 있는 용운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교주님, 궁금한 것들 중 첫 번째는 주문한 적 없는 이 옥시계들을 굳이 보여주신 이유가 뭔가 하는 겁니다.”
“흐음, 차향이 좋네요. 왜 옥시계들을 먼저 보여줬냐…그래야 이 시계들을 탐낼 거 아닙니까?”
“일부러 그들의 탐욕을 자극하고자 보여주신 거란 말입니까? 굳이요?”
“누가 봐도 훨씬 좋은 상등급의 상품과 평범해 보이는 상품을 나란히 두고 본다면 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연히 전자를 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그리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어차피 팔릴 물건은 팔고 새로운 물건도 팔 수 있다면 더 팔아야겠지요?”
백화점만 가봐도 가전제품을 파는 코너에는 한눈에 볼 수 있게 비싼 물건과 비싸지 않은 물건을 따로 하여 매출액이 높은 지점에만 비싼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매출액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지점에서도 고객들이 살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제품을 켜놓고 함께 팔고 있다. 특정 브랜드 제품만 모아 놓은 브랜드 관에서조차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살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가격대의 TV를 소모해가면서까지 전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굳이 비싼 제품을 함께 놓고 파는 이유는 제품을 구경하는 고객들에게 은연중에 최상품이 어떤 것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하면서 시각적으로 기준점을 형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고객은 자신의 눈으로 본 최상품을 보면서 사고자 하는 제품이 괜찮은지를 가늠하기 시작한다. 원래대로면 스스로 생각한 예산안에는 맞지 않아 쳐다도 보지 않았을 고액의 상품들을 염두게 두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한 등급 높은 가격대의 제품을 구매하거나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저렴하기만 한 제품에는 구매의욕을 느끼지 못게 된다. 단지 최상품을 전시해놓는 것만으로도 이전에는 좋은 물건이 뭔지 본 적도 없고, 구매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고객의 보는 눈이 단번에 올라가게 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리하면 비싼 TV를 전시해놓지 않은 때와 비교했을 때 전시를 한 쪽이 훨씬 높은 매출을 얻게 될 수 있게 된다.
이런 현대의 마케팅 기법에 대한 설명을 들은 관자룡은 무릎을 탁치며 감탄했다.
“하!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정도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아마 회중시계처럼 처음 보는 복잡한 물건일지라도 점차 사용하면서 익숙해질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기관과 암기의 달인들이 모인 당문에서 굳이 2개를 주문한 이유는 분명 우리 것을 분해하여 거기에 담긴 기술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도 있겠지요.”
“그럼 큰일이 난 것 아닙니까?”
“관호법, 태걸욱 이사와 그 부하들이 쌓은 기술력이 겨우 당문이 보고 따라할 수 있는 정도라 생각하십니까?”
관호법은 기술고문을 맡고 있는 태걸욱을 떠올리곤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으음, 기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태 이사가 만든 기가 막힌 물건들은 그저 보기만 한다고 따라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아닐 것 같긴 합니다.”
“예, 맞습니다. 이 작은 시계라는 물건 안에는 이 시대를 뛰어넘는 기술력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시계 안에 담긴 부품 하나하나가 제각기 나름의 의미를 갖고 결합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철에 한정된 것만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기술과 근본적인 학문적 바탕을 축적하여야만 만들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천당문이 기물제작에 있어 아무리 날고 기는 가문이라고 할지라도 단번에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 절대 아니지요.”
“허…우리 신교의 기술력이 그 정도란 말입니까? 신기하고 기묘한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것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몽이 노숙을 오랜만에 보았을 때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마주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고작 사흘이 아니라 수년동안 우리가 벌어들인 수익에서 신교의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돈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전부 기술발전에 투자했습니다. 그건 일개 가문으로선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지요.”
“그럼 당문이 최소 몇 년은 고생을 해야 우리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거군요.”
“고작 몇 년이라? 뭐 지나보면 알겠지요? 그들이 몇 년을 쓴다해도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허나 쉽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이제 구르기 시작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굴러서 커진 눈을 굴리고 있으니까요.”
‘나처럼 인터넷이란 현대의 아카식 레코드를 지니고 있지 못하면 몇 년이 아니라 최소 몇 세기는 걸리지 싶은데.’
관자룡은 자신감이 느껴지는 용운의 말에 장인들의 세계 또한 무공과 같이 깊고 심오한 세계가 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맞아. 교주님께서 물리학(物理學)이라는 학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실 때도 이런 심오함을 느꼈던 것 같군.’
첫 번째 의문이 해결된 관자룡은 차를 한모금 마신 뒤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옷들을 만들어 여기까지 배달해오는데 2주면 충분한 걸 1주를 더 늘려 3주씩이나 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냥 골려주기 위함이었던 겁니까? 아니면 거기에도 특별한 연유가 있는 겁니까?”
“물론 이유가 있지요. 그래야 3주 내내 신교에서 만든 옥시계를 떠올리면서 계속 되새김질을 할 것 아닙니까? 당장 자신들의 손 안에 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에 빠져서요. 가져간 시계들을 볼 때마다 이 시계들을 떠올릴 겁니다. 그때 그 녹색 옥으로 감싸진 그 시계가 자신의 손에 쥐고 싶다고 욕망하면서 계속.”
“고작 이 시계라는 물건을 보고서 그리 생각한단 말입니까? 옥 장식이 투명하고 윤기가 흘러 아름답긴 하지만 저는 무인이어서 그런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무인이라 장인들의 세계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은 자룡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용운이 예를 들어줬다.
“음, 쉽게 생각해보세요. 이 옥시계가 만약 무림에 알려진 무림지보라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를테면 신교에서 생산되는 신검(神劍) 정도의 등급의 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리하면 보자마자 눈에 아른거리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 말씀하시니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 지금은 내 것이 된 창 ’애각창(涯角槍)‘을 처음 만나게 된 날이 지금도 눈에 선하니.’
관자룡은 조자룡이 사용하던 창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붙인 애각창을 처음 잡아봤을 때를 떠올렸다. 교주로부터 새로운 기술들을 배운 태걸욱이 만든 신검급의 무기 10종은 신교에서 통칭 천하십기(天下十器)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애각창은 처음 관자룡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애각창이라는 이름이 없이 그저 신창으로 불리었다.
‘교주님이 읊으셨던 김춘수라는 고려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나는구나. 꽃이라는 시어처럼 내가 이 창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이 창은 애각창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신창(神倉)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신창의 이름을 애각창이라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애창이 되었다. 캬아, 다시 생각해도 멋진 시야.’
화경의 경지는 무기의 좋고 나쁨에 구애되지 않는 경지라고 하는 호사가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화경이 아니었고, 이런 뛰어난 무기를 잡아본 적이 없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화경이 된 관자룡은 경지에 오르고 나서 도리어 뛰어난 무기의 중요성을 지금도 실감하게 되었다. 뛰어난 무기와 화경의 고수가 만났을 때 일으키는 상승(相乘)의 효과는 경지가 오를수록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더 뛰어난 물건을 만들고자 하는 장인일수록 도구를 가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태걸욱에 따르면 명장일수록 도구를 가리는 법이라 하지 않았던가. 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