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심호흡을 한 당건원은 문주답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딸에게 약속했다.
“추향아~ 내 오늘 일로 이야기가 끝난 뒤 너를 혼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약속하마.”
“진짜죠?”
“그렇대두. 너의 아비로서가 아니라 문주로서 하는 약속이다.”
“추향아, 이제 아빠랑 다 정리된 거지?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봐. 응? 이 엄마, 궁금해서 숨넘어가겠어.”
“알았어요. 아버지도 약속하셨으니까 계속할게요.”
당추향은 자구책을 확실히 갖춘 뒤 다시 자신의 추리(推理)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 한번 보세요. 이 옷의 박음질을 보면요. 엄마가 말한 대로 바느질이 아~주 가지런한 게 매우 일정해요.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남자가 분명 주문만 하면 오래 걸리지 않아 물건을 가져다줄 것처럼 말했다고 했다는 거죠.”
“추향이, 네가 그래서 그에게는 아소 어멈같은 실력자가 많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느냐?”
바느질한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선녀의 옷을 표현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과는 반대로 화운에게서 받아온 옷에는 꼼꼼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바느질이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음음음~ 제 생각에는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은 아무래도 아소네 아줌마 같은 실력자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당가를 보호하는 기관진식을 작동하는 기계처럼 사람의 손을 대신해서 바느질을 해주는 기계(器械)가 있다는 거예요. 아소네 아줌마 정도로 바느질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 그건 상식적이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남는 것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봐야죠.”
“에이.”
“추향아, 그게 무슨! 아무리 기술이 대단하다 해도 그렇지 사람의 손을 대신하여 바느질을 해주는 기계라니.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손녀의 추론(追論)에 당기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아까 시계라는 물건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죠? 시계에 담긴 기술력은 감히 우리 당문조차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기술력이라고 하셨잖아요. 할아버지가 보신 대로 그가 엄청난 기술력을 갖고 있다면 이 옷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기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도 앞뒤가 맞아떨어져요. 나중에 대량으로 한번 주문을 넣어보세요. 제 말이 맞다면 분명 다른 옷을 구해와도 바느질은 이 옷과 다르지 같을 거에요. 아니, 새로 주문을 넣어 오는 옷들은 모두 바느질이 똑같겠죠. 마치 한 사람이 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가 끝나자 추향은 할아버지가 받아온 옷을 한번 입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당기호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세 사람은 신기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날 쓱 한번 훑어보고 준 옷이 이리도 원래부터 날 위해 준비된 것처럼 맞을 수가 있다니.”
은월을 통해 중원인의 평균 신장 자료를 가지고 비아가 통계작업을 하여 사이즈를 표준화한 결과가 우연히 기성복에 적합한 체형을 갖고 있던 당기호의 몸에 맞은 것이었지만 당기호나 그 아들 내외와 손녀는 그런 자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어쩜…이거 완전 아버님 옷이네요.”
“진짜 쓱 한번 보고 준 거랍니까? 아버님 몸을 자로 재본 게 아니라요?”
“추향아, 너도 보지 않았느냐? 날 딱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주던 것을.”
“예. 봤죠. 봤는데…어떻게? 왜?”
‘우리 할아버지를 본 게 고작 2번째인데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맞춘 거지? 그보다 이상하게 할아버지가 멋있는 것 같아.’
현대인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용운이 당기호가 입었을 때 적당히 핏(fit)감을 살릴 수 있도록 옷을 골라준 것이었는데 이를 본 당추향의 심미안은 핏이 뭔지는 몰랐으나 할아버지가 입은 옷맵시에서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세련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세련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현대인이라면 모두 아는 그 단어의 개념을 알지는 못했기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야 저 옷이 예뻐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분명히.’
자신이 느끼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당추향은 먼 미래에 나올 개념인 국방색의 훈련복에 담긴 밀리터리 룩과 체형에 딱 어울리는 핏함이 주는 세련미에 꽂혀버렸다. 훈련복은 용운의 감수를 거쳐 다림질까지 마친 옷이었기에 훈련복은 그냥 입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각이 살아 있었고, 여기저기 달린 주머니들도 원래부터 거기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거슬리지 않고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어때요? 움직이기에 불편한가요?”
“비단옷에 비해선 재질은 확실히 거친 감이 있다. 그런데 움직이는 데 있어선 전혀 불편하지 않구나. 다만 통풍은 잘되는 것 같지는 않고.”
“아버님, 통풍이 안 될 수밖에 없는 게 이렇게 촘촘한 면직물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대신 땅바닥을 굴러도 쉬이 해지지 않겠어요. 암기들을 수납하기 좋게 가죽으로 요대를 만들어서 끼워도 좋을 것 같아요. 허리춤에 있는 이 고리들은 분명 요대를 끼워 넣을 수 있게 달아놓은 것 같거든요.”
시아버지가 입은 옷을 경력직 주부의 눈으로 살펴본 당소소는 안살림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적당히 값을 치르기만 한다면 이 옷이 현재 당문에서 입는 옷들에 비해 오히려 경제적일 거라고 판단했다. 씨실과 날실의 교차됨도 보통의 면포들과는 달랐다. 보통의 면포들은 1대 1로 교차되기에 활동을 하다 보면 금세 옷감이 구겨져서 보기 싫었는데 자신의 시아버지가 몇 번을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해서 옷에는 구김이나 주름이 잘 생기질 않았다.
“보통 면포로 된 옷들과 다르게 이 옷은 몇 번을 빨아 입어도 잘 구겨지지 않고 튼튼해요.”
자신의 엄마의 도장까지 찍혔다고 생각한 당추향은 전격추진을 하자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건의했다.
“주문하죠. 우선 좀 더 우리 당문에서 쓰기 좋은 식으로 변화부터 준 다음에.”
당기호는 그날부터 매일 당추향과 당소소의 인형 놀이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차후 당문과 화운이 어느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밑작업으로서 당문의 다른 일원에게 드러낼 수 없는, 직계 중 단 4명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암기를 수납하기 좋게끔 편의성과 은밀성을 높일 수 있도록 수정작업이 반복될 때마다 옷을 입고 움직이며 암기를 넣고 빼는 과정에서 걸리적거리거나 불편한 점은 없는지, 어느 정도로 주머니를 달았을 때 가장 이상적인 암기 수납이 가능한지, 주머니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암기를 수납할 방법은 없는지 등등의 확인을 위한 시험작업이었다.
“다 됐다.”
“이,이제 이걸로 끝인 게냐?”
“당장은 여기서 더 뭘 더 진행할 건 없는 것 같네요.”
“그, 그래야지! 그래야지! 내 생각에도 이거면 완벽해.”
두 눈에서 광기마저 느껴지던 두 모녀의 열정에 태상문주인 당기호는 그만하자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당추향이 분명 여지를 남기는 듯한 발언을 하긴 했지만 이는 당기호에게 와닿지 않았다.
“하얗게 불태웠다. 얘들아.”
“아마 그 남자도 이 옷을 보여주면서 1차 주문으로 똑같이 100벌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 깜짝 놀랄걸요? 아마 기겁하면서 다음 주문도 있냐고 물을지도 몰라요.”
“훗! 추향아, 당연하지 않겠니? 당문의 최정예가 참가한 결과물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이제 선문상단에서 시계를 찾으러 오라는 연락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세 사람의 눈빛은 비장했지만 동시에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당소소는 두 조손으로부터 이름만 들었지만 이 옷을 보여줬을 때 그 남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찰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이 옷을 보고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괜히 기대가 되네.”
“저두요. 엄마.”
“나도 기대가 되는구나. 크흐흐흐.”
“흐흐흐.”
“호호호.”
옷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가 완성되었으니 와서 직접 물건을 확인하고 찾아가길 바란다는 선문상단의 서찰을 확인하자마자 세 사람은 비장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기호는 지난 몇 주간 치열한 과정의 끝에 완성한 옷을 감추기 위해 장포로 가리고 두 모녀와 함께 선문상단으로 길을 나섰다.
무공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게 뻔했지만 놈의 의표를 찔러 한방 먹일 생각과 함께 자신이 주문한 회중시계가 완성되었다는 기대감이 섞여 당기호는 젊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오늘만 기다려왔다. 놈! 기다려라. 내가 간다.’
자신들의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문상단의 직원은 친절하게 세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고, 그곳엔 화운이란 남자가 먼저 와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소소를 소개하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네 사람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당신도 우리가 오길 기대하고 있었나 봐? 호호호. 본때를 보여주지.’
세 사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인인 척하는 고수 화운이 먼저 운을 띄웠다.
“그동안 아무 일 없으셨죠? 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하하하.”
‘놈! 얼굴이 좋아지긴.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 줄 아느냐! 지금 많이 웃어둬라. 우리의 요구를 받고 난처함으로 가득해질 네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나.’
“무슨 일이랄 게 있을까요?”
‘어우, 얄미워. 저 얼굴을 보니까 더 괴롭혀주고 싶네. 이럴 게 아니라 내기라도 걸어볼까? 3주 내로 100벌을 완성할 수 있겠느냐고 도발을 하면서? 괜찮은데?’
두 사람이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가는 걸 모르는 용운은 처음 만난 당소소를 향해 영업 멘트를 치기 시작했다.
“당 소저의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어머니에게서 왔나 봅니다. 당 소저의 어머니께서 이리도 아름다운 미부(美婦)이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흥, 그래도 이쁜 건 알아보네.’
“어머, 말씀이라도 참 고맙습니다.”
‘이상하네. 두 사람한테 들은 것과는 다르게 꽤나 남자답게 생긴데다 예의도 바르고 경우를 아는 청년인걸?’
“일단 저희가 준비한 물건부터 직접 보시겠습니까?”
용운은 응접실로 들어온 선문상단의 직원으로부터 자개 상자를 건네받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당추향은 엄마의 표정만 봐도 딱 알 수 있었다. 자신들과 다르게 내성이 없는 어머니가 저 남자의 술수에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걸, 자칫 일을 망칠 것만 같아 탁자에 가려진 공간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엄마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저! 저! 저! 기녀오라비같은 놈이! 엄마! 저 놈의 수작에 속아 넘어가면 안된다구요. 엄마, 정신차려요.’
“아!”
갑작스레 터져나온 당소소의 음성에 시계를 꺼내던 용운이 당소소를 향해 물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아, 아니에요. 상자가 너무 아름답길래 놀라서 그랬습니다.”
“역시! 당가의 안주인이라는 분답게 당소소 님께선 정말 안목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이게 어떤 장식인지 바로 알아보셨습니까?”
“물론이죠. 당나라 때 유행했다는 자개 장식이잖아요? 이리도 아름다운 장식이라니.”
“그렇습니다. 저희 상단에 속한 장인이 귀중한 회중시계를 보호할 목적과 함께 심미적인 기능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함이지요.”
자개함과 함께 직원이 준비해온 하얀 장갑을 낀 용운이 보석가게의 직원처럼 천천히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함을 열어젖혔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시계는 상자만큼이나 아니, 상자의 아름다움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우와와와.”
“이게 회중시계?”
“호오…진정 보물이로구나.”
세 사람은 어느새 여길 찾아왔을 때 마음가짐은 잊어버리고 화운이 열어젖힌 상자 속에 든 2개의 회중시계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이건 진짜…예술 작품이네요.”
“그렇죠?”
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옥으로 장식된 회중시계는 화운이라는 상인의 말처럼 시계라는 물건의 값어치를 떼고 봐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품이었다.
“이거 옥 맞죠?”
“이런 색의 옥은 처음 봅니다.”
“녹옥(綠玉)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