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엄마, 신기하지? 그치?”
어릴 적부터 수많은 옷을 지어왔던 당소소는 당추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머니가 여기저기 붙은 녹색 옷의 이상함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 옷 누가 만든 거니? 우리 당가에서도 손바느질로 손에 꼽는 아소(阿蘇) 어멈 정도 실력자나 이런 바느질이 가능하지 이렇게 가지런히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천 바닥에는 없을텐데?”
“엄마, 엄마 생각에는 아소네 아줌마가 이 옷 한 벌 만든다고 하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이 정도로 ‘잘’ 만들려면 바느질에만 집중한다는 조건으로 못해도 3주는 걸려야 필요하지 않을까?”
“그치? 엄마가 보기에 최소 3주는 걸린다? 내 생각도 그럴 것 같았어.”
당추향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똑같이 말하는 엄마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할아버님하고 니 아버지하고 이 엄마까지 불러놓고 고작 그거 말 하려고 한 거야? 바느질을 잘하긴 했지만 이 옷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연히 아니지. 할아버지 표정 안 보여?”
당소소가 고개를 돌리자 시아버지인 당기호는 당추향의 말대로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손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까 이게 얼마나 잔뜩 있었죠?”
“개방의 사천 분타 인원들에게 갖다 줄 물건이라고 했으니 못해도 50벌은 족히 넘었을 거다.”
“들었지, 엄마?”
“이거랑 같은 옷이 50벌이나 있었다고? 어디에 그런 게 있었는데? 50벌이면 아소 어멈 정도되는 실력자가 근 3년씩이나 들여서 옷을 만들었다는 거야?”
“아닐걸? 내가 알기론 사천분타의 거지들이 지금 입고 다니는 옷을 입기 시작한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고개를 갸웃해대는 자신의 엄마의 물음에 당추향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할아버지,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어요. 아까 그 사람이 준 옷. 할아버지 체형을 보고 할아버지 몸에 맞는 옷이 어디 있나 보자면서 이 상자 저 상자 뒤적거렸잖아요.”
“그랬지.”
“그때 제가 옆에서 봤는데 상자 안에 있는 옷들에 이상한 기호 같은 게 하나씩 붙어 있더라구요.”
“그랬었나?”
“그랬어요. 근데 그 사람이 분명히 그 기호를 보고선 ‘이 치수면 얼추 맞겠지?’ 하면서 중얼거리고선 할아버지한테 옷을 줬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옷을 선물 받았는데 당추향이 말하는 걸 듣고 당기호도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런 대화를 나눴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아이 참. 여기까지 말씀드렸는데도 아직 모르시겠어요?”
“응?”
“보통 사람들은 옷을 만들기 전에 자로 신체 치수부터 재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할아버지의 몸을 훑어보고 이 옷을 골라서 바로 줬어요. 그 말은 치수 별로 옷을 세분화해서 이미 만들어놨다는 거잖아요. 손님이 오면 치수를 재고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미리 만들어 둔 옷을 손님이 각자가 원하는 옷을 바로 골라갈 수 있게.”
“아!”
“그리고 그 사람이 그랬어요. 우리 당가에서 주문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물건을 만들어 주겠다구요. 그 말은 아마도 아소네 아줌마 정도 되는 실력자여도 3주씩이나 걸리는 옷을 금방 만들어낼 대규모의 실력자들이 있다거나 혹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거겠죠.”
“어머나! 추향아, 그게 정말이니?”
당추향이 한 말의 의미를 가장 먼저 제대로 이해한 것은 남자들과 다르게 오랫동안 옷을 만들어 온 당소소였다.
사람들이 옷을 지어 입는 이유는 여태껏 사람들이 입고 다닐 수 있도록 완성된 형태의 옷을 만들어서 파는 가게가 중원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체형이 제각기 다른 탓에 여자들은 옷감을 포목점에서 떼어와 옷을 입힐 사람의 신체 치수를 재고 그에 맞춰서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는 것이 고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의 바느질 실력은 이 시대 여성의 필수 요소로서 시집을 갈 때 매우 중요한 평가 기준이기도 했다.
당소소가 당건원에게 시집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 역시 당시에 당건원의 부인이 될 다른 가문의 여자들에 비해 당소소의 바느질 실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시절의 자신은 그게 평생 자신을 옥죄게 될 바느질 지옥의 입구인지도 모르고 좋아했더랬다.
‘아버님부터 시작해서 우리 일가족이 입을 옷을 내가 다 만들어야 할 줄은 그땐 몰랐지. 하…다른 건 안해도 되니까 바느질만큼은 잘해야 한다고 할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나마 당추향과 당소소처럼 당문(唐門)과 같이 먹고 사는 걱정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집안의 여자들은 바느질 정도만 하면 되니 그 부담이 덜했지만 그렇지 못한 집안의 여자들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서도 집에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가족들이 잠든 밤에 늦게까지 호롱불을 켜놓고 가족들이 입을 옷을 짓느라 홀로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일반 가정의 여성들은 가족들이 입을 옷만 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매년 나라에 세금으로 일정 숫자의 견포(絹布)를 만들어 바쳐야 했기에 여자들은 1년 내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여 항시 눈 밑이 거뭇거뭇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느 가난한 집 며느리는 가뜩이나 잠이 부족한데 마누라 생각할 줄 모르고 남편이 밤일을 조르는 통에 결국 급사(急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앞으로 당문 사람들은 필요한 옷이 있으면 거기에 가서 돈을 주고 이런 이런 옷을 만들어 주시오 설명하고 주문만 하면 되는 거에요. 상상이 가세요? 그 사람이 말한 게 거짓이 아니라면 당문의 여자들. 아니, 돈만 있으면 어떤 여자도 앞으로 품을 들여가며 굳이 바느질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누구야? 그 사람이? 어디로 가면 돼? 추향아, 빨리 말해봐. 이 엄마, 현기증 난다.”
좀 전만 해도 왜 사람을 바쁜 시간에 불렀느냐고 까탈을 부리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지고 손뼉을 마주치며 기대감에 부풀어 자신을 재촉하는 사람만이 당추향의 앞에 있었다.
“어멈아. 잠시 진정 좀 하고.”
“아버님!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건 상제(上帝)께서 내려주신 기적 같은 거라구요! 앞으로 여자들을 바느질의 지옥에서 구해줄 기적이요! 생각만 해도 꿈같아요. 돈만 주면 가족들이 입을 옷을 바로 구해서 입힐 수 있는 세상이 열린다니! 무릉도원에서조차 선녀들이 도망칠 수 없었던 바느질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거잖아요? 세상에! 너무 좋아!”
“어멈아 아, 알았다. 알았는데 나는 잠시만 더 추향이가 하는 말을 듣고 싶구나.”
“맞아. 엄마.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거든?”
“응? 이야기가 다 끝난 게 아니라고? 뭐가 더 남아 있어?”
“있어. 세 분, 여기 이 옷을 한번 제대로 봐주시겠어요?”
“옷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단다. 꽤나 튼튼한 게 매우 질긴 옷이었어.”
“아니요. 방금 그 말씀은 할아버지께선 이 옷에 숨겨진 비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고 계신단 말씀이나 다름없어요. 잘 보세요.”
추향이 검지만 들어 좌우로 흔들며 말하자 그 모습과 말투가 너무 건방진 것 같다고 생각한 당건원은 딸의 무례함을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추향아! 할아버지 앞에서 그게 무슨 못 배워먹은 행실이냐!”
“아니다. 아범아. 한번 추향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일단 더 들어보자꾸나.”
“이게 다 아버지께서 자꾸 애를 감싸주시니까 추향이 버릇이 점점 나빠지는 겁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애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바로 지적해주셔야지요. 사천 사람들이 추향이 보고 왜 풍가화라는 별호를 붙여줬겠습니까? 애가 하도 안하무인으로 다니니 그런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욕해요.”
“쓰읍. 당.건.원. 지금은 니 딸이 말할 것이 더 남아있다고 하질 않느냐. 일문의 문주로서 당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아랫사람이 펼치는 의견을 막지 말아야 한다고 내 누누이 말했건만! 그리고 추향이의 버릇없음에 대해선 너희 부부가 나중에 따로 혼내면 될 일이지 않느냐. 넌 문주로서 지금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니 딸 버릇 없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지금 뭐가 더 중요한지 그 우선순위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말하고서 혀를 차며 당기호가 슬쩍 눈알을 부라리자 당건원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 당건원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마다 엉덩이를 수도 없이 내리치며 매질을 하려고 하기 전에 당기호는 지금처럼 당건원이란 이름 세 글자를 꾹꾹 새기듯 불렀다. 그렇기에 당기호의 입에서 한글자씩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 세 글자는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낳은 지금까지 당건원의 혼 깊숙이 박혀 있는 확실한 경고음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추향이 교육은 제가 나중에 따로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당추향은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편을 들어 주는 것인지 욕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할아버지의 일갈도 그렇지만 갑자기 이렇게 자신의 벌이 확정되어버리는 것도 그랬다.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나 혼나야 돼?’
자신이 알아챈 비밀을 말하고서 토사구팽을 당할 미래가 대놓고 결정되어버린 상황에서 당추향은 자신이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저 이따가 혼나게 되는 건가요?”
“아니란다. 내가 우리 예쁜 손녀를 뭐하러 혼낸단 말이냐? 이렇게 예쁜 손녀를 말이야.”
할아버지는 확실히 아니라고 단번에 못을 박았지만 정작 자신을 혼낼 책임자로 결정된 아버지와 어머니는 확답을 주지 않으셨다.
당추향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 화를 입게 되는 것은 자신이 분명한 상황에서 입을 열 바보가.
“할아버지만 대답하셨지 아버지랑 어머니는 대답 안 하셨잖아요. 두 분, 나중에 절 혼내실 생각인거죠?”
“아유, 엄마는 이렇게 똑똑한 우리 딸을 혼낼 생각이 없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랑 니가 할 내용이 뭔지 궁금하니까 빨리 하던 말이나 마저 듣고 싶을 뿐이란다. 그러니 이제 다시 말해주지 않으련?”
“아버지는요?”
“난 할아버님 말씀대로 네 말을 끝까지 듣고 일의 경중을 파악한 뒤 결정하도록 하겠다.”
“아버지께서 지금 혼내지 않겠다고 확답을 주지 않으시면 저도 그냥 말하지 않을래요. 어차피 혼날 건데 뭐하러 제가 구구절절 설명을 해요? 제가 잘못을 했으니까 그냥 입 다물고 아버지께 달게 벌을 받을게요.”
‘그, 그게 벌을 달게 받겠다는 녀석의 표정이냐!’
자신의 딸이지만 이토록 얄미운 모습을 보니 한 대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고 싶어 당건원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온 전음에 이내 끓어오른 속을 가라앉혔다.
- 니 딸이 문제 일으키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더냐? 이번은 그냥 넘어가주겠다고 하고 다음에 문제를 일으키면 이번 거까지 합산해서 크게 혼내면 되지 않느냐. 아들아, 자고로 일문의 문주는 적당히 상황에 맞게 유연한 사고를 하고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란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 그냥 아버지께서 혼내셔도 되잖아요! 그리고 제 딸인데…그 정도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나쁜 판관 역할은 꼭 자신에게 시키는 자신의 아버지도 미웠고, 빨리 더 이야기해보라며 모른 체하고 딸을 채근하는 마누라도 미웠다.
‘아! 정말 당문이고 뭐고 그냥 혼자 있고 싶다. 아무 것도 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