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용운과 함께 다니는 다진이라는 용은 인간으로 둔갑하면서 인간의 몸을 쓰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간혹 며칠동안 측간을 못 가거나 오래간만에 측간에 가 제대로 일이 안 풀렸을 때 꼭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다진 님은 홍탕같은 매운 음식을 먹은 뒤로부턴 측간 문제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셨지. 확실히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나도 화장실을 자주 갔고. 비록 측간에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나와 다진 님처럼 당 소저도 매운 음식을 먹으면 변비로부터 해방될 거야.’
옷 선물을 받고 사례금을 더 드리고 싶다는 당기호와 나중에 주문했을 때 넉넉히 달라는 용운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게사르는 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점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당추향을 향해 확신을 갖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당 소저, 혹여 지금 심중에 품은 고민이 해결되지 않거든 나중에 조용히 날 찾아오십시오. 내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드리리다.”
“지금 뭐라고?”
게사르는 비록 당가의 사람들에게 좋은 감정따윈 하나도 없었지만 용운으로부터 따라다니며 배운 영업 정신이라는 것에 입각해 나중에 선문객잔의 음식을 팔아먹을 생각에 영업용 미소를 지은 것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당추향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갑작스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말을 하는 게사르의 얼굴은 분명 화운이라는 남자를 향해 마음을 품은 자신과 할아버지의 비밀(?)을 눈치챈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들킨 건가? 어떻게 알았지?’
자신을 향한 그의 표정에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알고 연민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했다.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사르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단의 손님을 대하듯 정중하게 문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는 화운의 손인사를 받으며 두 조손은 천천히 문을 나섰다.
선문상단으로부터 빠져 나와 한참을 말없이 걷던 당기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당추향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화운 님을 절대 화나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해선 안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주 깜빡 넘어가셔서 이러는 건가?’
당추향은 화운과 방금 전까지 서로 웃는 화기애애한 관계였으면서 당기호가 무슨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화운 님이랑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건가? 할아버지만 친하게 지내려고?’
“너는 못 느낀 것 같지만 그가 보여준 기세는 능히 한 성의 패자(霸者)로 군림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모종의 이유로 지금은 상인으로 위장하여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고 자신을 드러냈을 땐 중원 전역에 이름을 날리고도 남을 강자가 될 것이다. 그는 잠시 때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잠룡(潛龍)이다.”
“화운이란 남자가 그, 그 정도였다구요?”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내공은 전혀 없이 그저 외공만 익힌 줄 알았던 그에게서 나온 세상을 덮을 것만 같은 기세에 나는 놀랐다. 그와 독대를 하는 동안에도 시계라는 물건을 살피는 척하면서 틈틈이 관찰했다. 반박귀진이라는 경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내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살펴봐도 모를 정도였다. 반박귀진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로 깔끔하게 모든 기가 갈무리되었다면 그는 반박귀진에서도 완숙(完熟)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그를 보기 전에는 반박귀진이니 반로환동이니 하는 건 호사가들이 함부로 떠드는 낭설(浪說)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그는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화, 화경이요? 꽤나 강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니…….”
“그렇다. 또한 겉으로 보기엔 꽤나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아마도 그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노인일 것이 분명하다.”
“예에에에?”
‘그렇게 잘 생기고 멋있는 남자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말도 안돼! 그럼 몇 살이나 먹은 거야?’
“분명히 반로환동을 거치며 현재 보이는 것처럼 신체가 젊어진 것이겠지. 그러면 그의 비정상적으로 단단했던 몸도 이해가 된다. 호사가의 말에 따르면 반로환동의 과정에서 신체가 재구성되면 무공을 펼치기에 적합하게 이상적으로 변한다고 했으니까.”
‘단단한 몸…….’
“그럼, 할아버지께서 시계라는 물건에 지극히 관심을 보였던 건 그냥 위장이었던 것인가요?”
“그건 아니다. 시계라는 물건을 보고 머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는 건 결코 둘러대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것 또한 진심이었다.”
당기호는 화운의 허락을 받아 시계라는 물건의 안쪽을 구경하고 한번 더 놀랐다며 자신의 손녀에게 설명했다. 곡식을 빻을 때 쓰는 수차(水車)같이 생긴 크고 작은 부품들이 서로 맞물려 정교하게 돌아가는 모습은 당기호에게 너무도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당가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진식들의 수준따위는 그 작은 회중시계라는 물건에 담긴 기술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처지고 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엽(胎葉)이라고 하는 얇은 철판을 이용한 장치로 기계가 저절로 움직이게 한다니…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란 말이냐! 우리와 그가 가진 기술의 차이는 어린 애들과 다 큰 어른의 차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말도 안돼요. 화경의 고수라고는 하지만 그에게 저희 당문보다 뛰어난 기술도 있을 리가 없잖아요.”
“넌 몰라. 나중에 주문한 물건이 오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현재 당문에 있는 뛰어난 장인들을 모아놓고 그 시계라는 물건을 보여주며 따라 만들어보라고 해도 따라 만들 수 있는 자는 없을 테니. 내 그래서 일부러 비싼 값이지만 2개나 주문한 것이다.”
“분해해서 어떻게 만든 것인지 하나하나 모든 걸 살펴볼 생각이시군요.”
“그래.”
당추향은 근데 왜 주문한 시계의 개수가 1개도 아니고 2개인지 이해가 안 됐다. 아무리 기술이 떨어진다고 하나 그래도 당문인데 부품을 따라 만드는 건 하나만 분해해도 충분할 터였다. 거금을 선금으로 걸면서까지 2개나 주문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는 분해용으로 쓴다 치고 나머지 하나는 뭐에 쓸 건가요? 둘 다 분해할 거에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기술이 떨어진다고 해도 분해해서 따라 만들 거라면 하나로 충분하잖아요.”
“크흠. 분해하지 않는 하나는 내가 요긴히 쓸 데가 있단다.”
“어디에 쓰실 건데요?”
당추향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그러나 이에 나온 할아버지의 반응은 꽤나 이상했다.
“어허. 어른이 말씀하시면 그런가보다 하면 될 일이지. 어른이 하는 일에 뭘 이리 꼬치꼬치 캐묻느냐. 아범이 이리 가르쳤느냐? 이따가 집에 가서 내가 아범을 불러 추향이 네 버릇에 대해 단단히 일러야겠구나.”
“아니…그게 아니라…저는 그냥…….”
당추향은 갑자기 왜 혼이 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할아버지의 뒤에서 화운이 선물한 옷감을 꾸깃꾸깃 구겼다가 조물락거리며 할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어라? 뭐지?’
그저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꾸중에 기분이 상해서 아무 생각 없이 만지고 있었는데 화운이라는 남자가 준 옷감의 촉감이 매우 신기하고 이상했다.
“이거 재질이 좀…….”
촉감만 봐도 알았다. 옷의 재질로 보아 비단은 확실히 아니었다. 당가의 직계로서 어릴 적부터 입고 자란 것이 비단옷이었으니까. 비단으로 만든 옷은 이렇게 광택이 없지도 않았고, 뻣뻣한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직(麻織)은 이것보단 더 거친 편인데…그 말은 이 옷이 면직(綿織)이라는 거야?”
당가의 여자도 무림의 여자이기에 규중처녀(閨中處女)들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국은 중원의 여인이기에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당추향 역시 어릴 적부터 자신의 어머니에게 직접 옷감을 짓는 법에 대해 다양한 교육을 받고 바느질을 하며 자랐다. 하지만 당추향은 이렇게 튼튼하고 정교한 면직물(綿織物)이 있다는 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고, 들은 적도 없었다.
당추향이 길을 걷다 갑자기 멈춰 서서 화운이 준 옷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자 초절정고수인 당기호는 자연히 뒤를 돌아서 당추향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할아버지, 이 옷이 면직으로 된 옷이라는 거 알았어요?”
“비단도 아니고 마도 아니니 당연히 면직이지 않겠느냐?”
당추향에게 당기호의 대답은 이 옷이 면직으로 되어 있다는 건 대충 알고 있지만 이 옷이 진정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운이라는 남자는 이런 물건을 어디서 만들어서 가져온다고 한 것인지 당추향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자신은 보지 못한 시계라는 물건에 대한 할아버지의 설명까지 감안한다면 화운이라는 남자가 가진 힘이 확실히 무공만 있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이 훈련복이라는 옷 한번 제대로 살펴보세요.”
당기호는 그저 튼튼해 보이고 주머니가 많아서 좋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인 옷가지 따위를 보고 저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손녀는 거기서 한술 더 떠 사람들에게 잠시 자신이 살펴본 훈련복이라는 옷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듯 둘둘 말아 자신의 소매에 숨기고선 재촉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전부 말씀드릴 순 없고 집에 가서 상세히 말씀드릴게요.”
“그, 그렇게 하거라.”
두 조손은 굳이 경공을 써가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일 없이 약간 다른 사람들보다 걸음을 빨리하여 사천당가라는 명패가 적힌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왔다.
꽤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돌아온 두 조손을 본 당건원은 매일같이 사천의 다점들을 뒤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왜 저러고 돌아왔나 궁금해졌다.
“아버지, 오늘은 꽤나 일찍 돌아오셨네요.”
“건원이냐?”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버지도 그렇고 추향이도 그렇고 둘 다 표정이 참…”
“아빠, 마침 잘됐어요. 누구한테 시키지 말고 아빠가 직접 엄마 찾아서 빨리 같이 할아버지 거처로 오세요.”
“뭐? 니 엄마는 뭐하러? 아마 지금 저녁 식사하고 있을텐데?”
“그래요? 잘됐네요. 중요한 일이니까 꼭 엄마랑 같이 오셔야 해요. 알았죠? 할아버지, 우리는 먼저 가요.”
“알았다.”
당추향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선 서둘러 당기호에게 움직이자고 재촉했고 당기호는 그런 손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선 한 마음으로 손녀와 같이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이동했다.
“두 사람…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윽고 당기호의 거처로 네 사람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얘, 도대체 무슨 중요한 일인데 이 시간에 저녁식사 감독해야 하는 이 엄마까지 부른 거니?”
“엄마, 엄마! 이거에 비하면 엄마가 직접 밥 하는 것도 아니고 식사 제대로 준비하는지 감독하는 건 하나도 안 중요해. 그러니까 다른 말 필요 없이 이거 한번 봐봐. 빨리.”
당추향의 엄마 당소소(唐蠨蛸)는 급하다고 불러놓고 딸이 호들갑을 떨며 자신에게 건넨 주머니가 잔뜩 달린 짙은 녹색으로 염색되어 있는 옷감을 받아 들고선 딸을 째려봤다.
“너 중요한 게 아니기만 해봐.”
“한번 제대로 보기나 하세요~”
당추향이 하도 빨리 옷이 어떤지 제대로 보라고 성화를 부리자 당기호와 당건원 부자 역시 당추향이 왜 그러는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면직물이네? 응? 면직물이 왜 이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