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언뜻 보기에 자신과 비등해보이는 게사르의 무공에 놀라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기호에겐 상대방을 죽일 각오만 선다면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그 ‘무기’를 쓴다면 쥐새끼처럼 자신을 피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오랑캐놈을 단번에 죽일 수야 있겠지만 그 무기를 쓰는 순간 당가의 사람을 제외하고 무기를 본 모든 이들을 죽여 증인을 없애야만 했다.
물론 당기호는 비장의 ‘무기’를 쓸 정도로 그렇게까지 흥분한 것은 아니었다. 절정고수를 한참 뛰어넘는 놈의 무위에 상황이 살짝 꼬였지만 처음의 목적은 그저 어린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만약 그저 가르침을 내리는 게 아니라 명문정파인 곤륜의 제자인 놈을 죽이려 한다면 그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 없이 곤륜의 제자를 죽여버리고 아무렇게나 맞춰 거기에 명분을 만들려고 한다면 당문을 정사지간(正邪之間)이라고 떠들면서 폄하하는 이들의 말에 무게추를 더해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살심(殺心)을 억누르며 깐족깐족 이리저리 날뛰는 놈을 상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사람의 심지를 뒤흔드는 강력한 기파가 담긴 소리에 당기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만!”
‘이, 이게 무슨!’
그건 당기호가 몸만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화운이란 상인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파였다. 온몸을 후려치는 듯한 강렬한 기가 담긴 외침은 소림의 사자후(獅子吼)에 비견될 만한 용의 외침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거기까지 하는 걸로 합시다. 노인장. 이러다간 남의 영업장 다 부수겠소.”
방금 전까지 자신을 어르신 대접을 해주던 상인 놈은 어디로 가버리고 당기호의 눈앞에는 무림인만이 서 있었다. 비장의 한수를 쓴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을 주는 그런 강자가.
‘무림맹주 정도에게서나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용운의 사자후(獅子吼)에 놀란 것은 당기호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금방 오랑캐놈을 제압할 거라고 생각해서 의자에 앉아 편히 구경하고 있던 당추향 역시 강하다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강한지는 몰랐던 화운의 무위에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 역시!”
물론 게사르는 당연히 용운의 강력함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터라 노망난 노인네를 멈추게 해준 용운의 중재에 든든함만 느꼈다.
‘노인네, 바짝 쫄기는. 어디서 용을 만나보긴 했겠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니 눈이 동그랗게 되었네.’
용운이 둘을 일단 멈추고 어지러진 영업장을 보면서 이걸 다시 꾸미려면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를 속으로 비아와 가늠하고 있는 사이 처음 만난 이후로 줄곧 깔고 보던 당기호가 태도를 달리해 용운의 옆으로 다가왔다.
“허허…내 눈이 옹이구멍이었던 것 같구려…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옹이구멍. 그래, 화운님, 사실은 상인이 아니라 화경의 고수였던 게요?”
“화경이 아니라 그저 내가 익힌 무공이 특이해서 그런 것일 뿐이오. 그리고 나는 상인이 맞소.”
“뭐,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그런 걸로 해드리리다.”
용운은 사실 그대로 아직은 화경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의 무위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지만 이미 거대한 기운으로 온몸을 후려치는 것만 같은 기파를 경험한 당기호에게 용운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용운의 경지를 무공을 익혔음에도 도리어 평범한 이처럼 아무런 기세가 드러나지 않는 반박귀진(返璞歸眞)로 오해한 당기호는 용운의 옆에서 게사르가 깐족대건 말건 용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하하, 화운 님,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게 아니라 그저 그 회중시계란 물건을 한번만 더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 뿐입니다. 이왕이면 시계라는 물건을 고안해내신 장인 분을 만나 뵙고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함께 배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네네. 그러시겠죠. 아무렴요~”
“크흠. 진짜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 진심을 알아주시겠습니까?”
용운은 차라리 당기호가 괄괄하게 굴면서 자신을 막대하게 굴 때가 편했다. 자신이 무슨 변태적인 감성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이를 내치는 것은 아무런 마음의 짐이 없으나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노인이 물건 하나를 팔기 위해 애쓰는 영업사원마냥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하네. 이 할아버지는.’
[자네도 참. 나이 먹은 노인네가 저렇게 애교를 부리게 만들다니 참으로 몹쓸 남자로군.]
‘뭐? 내가?’
[그렇지 않나. 시계를 어찌 만드는지까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고 해도 한번 보여주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을텐데? 노인네가 한번 쓱 본다고 해서 따라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아니지 않은가?]
‘그거야 그렇긴 한데.’
[어차피 팔아먹으려고 만든 건데 이 기회를 홍보의 기회로 삼는 건 어떤가? 평생 품에 끌어안고 살려고 만든 것도 아니고. 저 노인네 정도면 주변에 돈 많은 치들도 많이 알고 있으니 꽤 도움이 될 거라고 보네.]
혹시 자신이 날 불편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다면서 무릎까지 꿇을 것처럼 구는 당기호의 처세와 나름 일리가 있는 비아의 말에 용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하시오. 노인장. 시계를 어찌 만드는 지까지는 가르쳐 줄 수 없으나 어찌 생겼는지 구경 정도는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진정이십니까?”
“와! 진짜요?”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허락은 그녀의 할아버지에게만 했는데 허락한 적도 없는 당추향이 덩달아 자신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좋아하자 살짝 장난기가 동한 용운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소저는 빼고. 그대의 할아버지만.”
“네?”
손녀인 자신을 배제한다고 했건만 할아버지인 당기호는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마치 둘만 있어서 더 좋다는 것처럼. 당추향은 아이처럼 희희낙락한 자신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머리에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지만 자신의 오해일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내 오해일거야.’
어린 아이가 당과를 선물 받게 된 것처럼 좋아하며 용운을 따라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고개를 젓다가 둘이 들어간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궁금히 여겼던 당추향은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
‘혹시 모르니까…….’
“게사르 소협이라고 했나요?”
“커험.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소저.”
겉보기에는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당추향이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짓자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게사르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런 게사르의 내심은 당추향에 의해 정확히 읽혀지고 있었다.
‘이 남자, 여자에 대한 내성같은 게 전혀 없네. 이러면 쉽지.’
“저기…차를 많이 마셨는지 제가…좀……. 그런데…측소(厠所 화장실)가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
다 큰 처자의 입에서 측소라는 단어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니 그 부끄러움의 정도가 결코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사르는 방금 전까지 위장하고 있던 자신의 자세를 버리고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댔다.
“그, 그게…그러니까. 저쪽으로 가시면…아니…음…제가 안내를?”
“직접 안내해주실 필요는 없고…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갈게요.”
“아…그게 편하실까요? 음…확실히 그렇겠군요…….”
상세하게 측소를 가면 되는지 친절하게 안내해준 게사르는 당추향이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측소를 찾아가자 방금 자신의 대응이 꽤나 멋있지 않았나 생각하며 어느새 식어버린 차를 마시며 자화자찬에 빠졌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았지? 크~ 좀 멋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간단하게 미인계로 게사르를 속여넘긴 당추향은 뭐가 좋은지 혼자 실실 쪼개는 게사르를 기둥 뒤에서 몰래 확인하고 살금살금 할아버지와 그 남자가 간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쪽이었던 것 같은데.”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을 찾을 수가 있었다.
“허허허, 소협. 이 물건의 앞도 아름답지만 뒤, 뒤를 한번 열어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뒤가 보고 싶소?”
“늙은이가 이렇게 부탁드리오.”
묘하게 달뜬 것처럼 달아오른 할아버지의 음성에 당추향은 망측한 생각이 떠올랐다.
‘대화 내용이 좀…뒤를 본다니…….’
용운은 기감을 통해 밖에 당추향이 왔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여자는 왜 저기서 몰래 엿듣고 있는 거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무슨 계략같은 게 있는 거야?’
시계의 뒤를 살짝 열어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더니 휘둥그레진 당기호의 눈에선 딱히 그런 음모의 씨앗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감탄을 토해내기 바쁜 당기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망이 넘치는 기술자의 모습이었다.
“하아…차.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워요. 이,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대협. 쓰읍.”
절대반지를 본 골X처럼 정교한 무브먼트의 움직임에 하악대기 시작한 당기호의 반응에 용운은 공돌이들은 어딜 가도 비슷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계의 설계도를 처음 봤을 때 태걸욱 할아버지 반응도 딱 이랬었지.’
회중시계를 처음 완성했을 때 다 늙은 할아버지가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던 모습이 떠올랐다. 당기호가 보여준 순수한 기술자로서의 모습에 용운은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나 좋으십니까?”
“아무렴요! 그렇고 말구요! 허허허.”
숨을 헐떡이며 괜스레 솟아오르는 군침을 삼키기 바쁜 당기호의 소리를 듣고 당추향이 얼굴이 벌개져 오해를 하고 자리를 떠나건 말건 그 뒤로도 시계에 대한 노소(老少)의 질답은 계속되었다.
* * *
“주우탱…이 빌어먹을 놈.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무림맹주 정명열(正明悅)은 황제와 만나고 나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서 화가 나고 살심이 피어올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사실 홍치제는 방탕한 황제들에 의해 무너져 내려가던 명나라를 다시금 일으켜 세운 유능한 황제가 맞았다. 명나라 사람들 사이에선 괜히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는 말이 도는 것이 아닐 정도로 홍치제가 집권을 시작한 이후 세상의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달라져 버렸다.
부친이었던 성화제가 말년에 노망이 난 것처럼 불교와 도교에 심취해 국고를 낭비하던 것과 다르게 홍치제는 집권하자마자 막대한 국고를 쏟아내며 궁에서 행하던 불교와 도교의 행사를 모두 금지시키고 궁 안에 자신의 아비가 들였던 법사와 도사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쫓았다. 뿐만 아니라 성화제의 총애를 받아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던 간신들을 모두 처벌했는데 당시 홍치제의 황궁 청소 기간에 파면 혹은 귀양형을 받은 관리만 1천명이 넘을 정도였다.
홍치제는 이후로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해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를 읽고 비준을 하던 그동안의 관례를 폐지했다. 자는 시간까지 쪼개어 어느 상소든 빠짐없이 모두 본인이 직접 읽고 판단을 하는 만기친람(萬機親覽)을 시행할 정도로 명나라를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진심인 황제가 바로 그였다. 그렇다고 홍치제가 신하들의 말은 듣지 않고 군림하며 독단적으로 국가를 이끌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홍치제는 신하의 말을 듣는 데 있어서도 항상 열려 있는 군주였다. 진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간언이라면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서라도 받아들이는 현명한 군주이기도 했다.
정명열도 무림인이 아닌 일개 백성이었다면 홍치제를 명의, 명에 의한, 명을 위한 황제로서 인정하고 따랐을지 몰랐겠지만 선대의 맹주들처럼 정명열은 무림인이자 무림맹주로서 그와 엮이고 말았다.
“어찌하여 하늘은 그를 황제로 만들고 나를 무림맹주로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