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당기호는 겉만 멀대같이 큰 사내놈이 무슨 계집애처럼 얼굴만 허옇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랬던 놈을 직접 붙잡아 보고 깜짝 놀랐다. 옷으로 가려져 있을 땐 몰랐는데 몸이 어찌나 단단한지 처음엔 상인 놈이 지 몸 하나 지키겠다고 평소에도 보의(寶衣)라든가 쇠로 된 갑옷을 속에 차고 다니고 다니나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이왕 만진 김에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놈의 몸 여기저기를 주물럭거리며 확인해 봤지만 결코 오해가 아니었다. 놈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최소 외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 놈 태양혈만 봐선 밋밋한 게 무공이라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잠깐, 그러고 보니 추향이 녀석이 분명 일전에 이 녀석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했었던 게 이제 기억이 나는구나. 그래… 그랬던 것 같은데… 그렇단 말은 내공은 안 키우고 외공만 단련했다는 건가?’
손녀가 재롱처럼 하는 말이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이 놈의 몸을 만져보고 나니 확실히 떠올랐다. 손녀인 당추향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정도로 무공수위가 뛰어났다고 하는 말이. 슬쩍 몸으로 내공을 흘려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자신을 떼어내려는 놈의 강력한 저항에 내공이 있는지까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아… 제발 좀!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 할아버지!”
당추향은 자신도 못 만져본 저 남자의 몸을 무슨 푸줏간 고기마냥 마구 만져대는 할아버지의 기행(奇行)에 놀라움과 함께 내심 부러움을 느끼며 할아버지를 말려야 했다.
‘이 손이… 저 남자의 몸을 더듬은 손인가?’
방금 전까지 남자의 몸을 헤집어서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며 떠오른 생각에 당추향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지만 다점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녀의 얼굴에 집중하는 이는 없었다. 단 한명 용운의 옆에 있던 삼대주만 빼고.
“부탁하네. 내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간절하게 부탁하는 노인네를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다음을 약속하고 겨우겨우 떼어낼 수 있었다.
“감히 누구 미래 먹거리 산업을 빼먹으려고.”
이미 몇 년 전에 뿌려놓은 섬유 산업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긴 했지만 시계산업은 제약산업과 함께 차후 위구르 사람들과 신교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것을 기대하고 육성 중인 차세대 산업이었다.
정밀한 부품 하나하나를 만들어 순서에 맞게 조립하여야만 완성할 수 있는 시계는 그 제작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차후 다른 정밀산업에 있어 밑바탕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계 그 자체로도 후발주자가 기술력을 쌓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계는 다른 상품들에 비해 그 부피는 현저히 작지만 부가가치가 굉장히 높은 상품이라 중원으로부터 멀리 있는 위구르에서 옮겨와 판매하기에도 매우 용이했다. 산 넘고 물 건너 다른 지역으로 시계를 보따리 한가득 담아 팔기만 한다면 중원의 부자들이 황금을 들이밀며 달려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선문 시계는 앞으로 신교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줄 존재야. 신교의 사람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줄 수 없어.’
* * *
당기호는 그 날 회중시계라는 걸 본 이후로 금속으로 된 그 시계의 모양이 잡힐 듯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아 미칠 것 같았다. 상인답지 않게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허여멀건한 얼굴을 한 상인놈은 자신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인을 뿌리치고 떠나는 부랑자처럼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다점을 떠난 뒤로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점을 찾아가 봤지만 다점에선 놈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휴…….”
당문의 문주인 당건원(唐建元)은 자신의 딸과 외출을 한 뒤로 툭하면 한숨을 쉬며 끙끙 앓는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별일 아니다.”
“별일이 아니긴요. 태상문주인 아버지께서 며칠동안 그렇게 한숨을 쉬고 계시는데 어떻게 별일이 아닙니까?”
“어허, 녀석두. 별일 아니라니까.”
당기호는 당문을 중원의 으뜸가는 문파로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키운 자신의 아들의 앞에서 자신으로선 결코 만들 수 없는 그 시계라는 물건을 만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장인이 있는 것 같다는 한심한 이야기와 자신의 부탁을 잡상인 대하듯 매몰차게 뿌리치고 떠나버린 상인 놈의 이야기를 꺼내자니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답답해서 그럽니다. 아버지만 이러시면 모를까. 추향이도 이래요. 저번에 같이 외출한 뒤로 몇 날 며칠을 아버지처럼 한숨만 푹푹 쉬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으면 뭔가 말할 듯 말 듯 말다가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딸도 그러지, 아버지도 이러시지. 제가 답답하지 않고 배깁니까?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도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속 시원히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뭐? 추향이가?”
“예! 그렇대두요.”
자신은 그 회중시계라는 물건이 원인이었는데 도대체 손녀는 무슨 이유로 자신처럼 끙끙 앓는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자신의 손녀도 자신처럼 회중시계라는 물건에서 당문의 미래를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추향이랑은 내가 이야기해보도록 하마.”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실 거구요?”
“나중에… 나중에 말해주도록 하마. 조금만 시간을 다오.”
당추향은 자신이 존경해왔고 독장이라는 별호로 명망도 높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화운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무슨 매병(呆病 치매)에 걸려 노망이 난 사람처럼 언제고 한번 제대로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꿈에 나오기까지 한 그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도망가는 정인을 놔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애타게 구는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이도 많으시니까 그럴 수 있지. 그건 이해해. 근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한테 그러셨냐고! 왜~ 앞으로 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봐! 쪽팔려서 어디 가서 이야기도 못하겠다고.”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서 어디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답답한 심정에 물건을 걷어찰 수 없어 그저 침상에 누워 이불만 먼지나게 몇 번이고 걷어차 봤지만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고 그 날의 순간과 그 날 그 남자가 지은 당황스럽고 황망한 표정은 가슴에 박힌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아우, 짜증나! 짜증나!”
이불을 걷어차다 지쳐 혼자 침상에 누워 씩씩거리던 추향이 겨우 오른 열을 식힐 때쯤 시비가 문 앞에 찾아와 말을 걸었다.
“추향님.”
“왜! 내가 부르기 전에는 나 찾아오지 말랬잖아. 생각할 게 있으니까 생각 좀 하게 해달라고. 기억 안나? 나 밥 안 먹어. 안 먹는다고!”
“그, 그게 아니라… 태상문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할아버지가 자신의 거처로 찾아왔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침상에 앉았지만 추향은 당장 할아버지를 만나 어떤 표정으로 인사를 드려야 할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음… 음… 그래! 아프다고 전해드려. 심한 병이라고 하면 걱정하실 테니까… 한질(寒疾 감기)! 그래 한질에 걸린 것 같으니 할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서 다음에 뵈어야 할 것 같다고.”
“저기…….”
“못 들었어? 빨리 가서 한질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드리라고.”
“태상문주님이 이미 추향님 방문 앞에 서 계십니다.”
추향은 시비의 떨리는 대답을 듣자마자 머리에 벼락이 내리꽂힌 것 같았다. 문 앞에 계셨다면 자신과 시비의 나눈 대화를 모두 들으셨을 것이 아닌가.
“크흠, 추향아.”
“하, 할아버지.”
추향의 속마음을 모르는 당기호로선 자신의 손녀딸이 당문을 위해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이토록 마음을 깊이 쓰고 있는 걸 보고 과연 문주의 딸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문의 미래를 걱정하기엔 자신의 손녀는 너무 어렸으며 이는 당문의 어른인 자신과 아들인 문주가 해야할 고민이라고도 생각했다.
“내가 니 마음 다 이해한다. 니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미리 우리 손녀의 심정도 헤아렸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던 것 같구나.”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손녀에게 진심을 전하자 마음이 통했는지 닫혀 있던 손녀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탁
“할아버지!~”
“그래, 그래.”
당기호는 5~6살 어린 나이로 돌아간 것처럼 울먹거리며 자신의 품에 푹 안기는 손녀딸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둘이 그러고 있으니 시비는 자연스럽게 물러가 주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제 생각을 해주고 계시는데… 제가 너무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할아버지가 손녀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지.”
애틋하고 오붓한 할아버지와 손녀의 눈빛이 오가는가 싶었는데 글썽거리던 눈물을 닦은 손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저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때 왜 그러셨어요? 말해주세요.”
“응? 전부 봤으면서 뭘 묻느냐.”
“봤는데 할아버지께 직접 이유를 듣고 싶어서 그래요.”
“알지 않느냐. 그 녀석은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거 말구요.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 저 생각 많이 해봤는데 정말 모르겠거든요.”
손녀는 별호로 불리는 풍가화답게 자신의 생각보다도 그 속이 더 깊은 것 같았다. 일부러 대충 둘러댄 핑계를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누가 지었는지 별호를 참 잘 지었어. 내 손녀지만 참으로 생각이 깊구나. 이 녀석에게 먼저 제대로 이유를 말해줘야겠구나.’
할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며 풍가화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두 손을 마주 잡고 할아버지의 눈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지금은 매병이 발작한 것 같진 않아. 내가 가장 먼저 봤으니까 직접 확인해보자. 만약 할아버지가 진짜 매병이라면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할 테니까.’
“그 녀석을 만나고 내가 죽기 전엔 절대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꿈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입을 연 자신의 할아버지가 하는 말과 그 말을 하며 지은 짙은 애환(哀歡)이 담긴 표정에 당추향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매병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남색가(男色家)였다고? 진짜로?’
“그, 그래요?”
당추향은 넌지시 둘러서 표현한 할아버지의 대답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날 진짜로 나처럼 그 남자한테 반해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애타게 그 남자 바지를 부여잡고 몸을 더듬은 거라고?’
당추향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그 눈깔 이상하게 뜨는 것과 셋이서 그 남자를 쟁취하기 위한 연적(戀敵)으로 보는 게 맞는지, 그렇다면 연적인 할아버지의 손을 이대로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손녀를 믿고 한 남자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손녀로서 묵묵히 응원해야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못 들은 척하고 이 상황을 넘겨야 하는 것인지, 등등 어느 쪽으로 갈피를 잡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분명 회중시계 때문에 당기호가 용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이었지만 이미 당추향의 머릿속에선 그 기억은 가볍게 지워져버린지 오래였다. 덕분에 당추향은 너무도 혼란스러워서 할아버지의 고백(?)을 듣고 난 뒤로는 할아버지가 하는 대부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반대로 당기호는 손녀가 자신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손녀가 얼이 빠져 자신의 말을 듣던지 말던지 상관없이 그 날 이후 어디에도 말하지 못해서 갑갑했던 마음을 하소연하듯 죽 털어놨다.
“… 그래서 그랬던 거란다. 아! 그나저나 그때 그 녀석 몸을 만져보니 몸이 어찌나 단단한지 처음엔 무슨 금속 보의를 입은 줄 알았단다. 그제서야 추향이 네가 한 말대로 과연 강한 녀석인지 제대로 (내공)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만 일이 틀어져서 확인을 못해 본 것이 아쉽구나. 참으로 아쉬워. 다시 한번 그녀석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갑작스럽게 들은 충격적인 선언(?)에 놀란 정신을 겨우 겨우 수습한 당추향이 뒤늦게 보고 들은 것은 할아버지가 입맛을 다시며 화운의 몸을 더듬는 때를 떠올리며 아련함을 담아 손동작을 통해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정말 진심이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