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분타주라는 직위는 도박으로 딴 게 아닌지 장진수가 자신들이 돈을 구해온 방법을 바로 알아맞히자 나호경과 선임 거지는 이에 깜짝 놀랐다.
“이야, 역시 분타주님! 앉아서도 천리를 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분타주님 정도 되면 이 돈뭉치만 봐도 이 돈이 어떻게 벌어온 돈이다 하는 게 보이는 겁니까?”
“이, 이 빌어먹을 놈들이! 뭔 헛소리들을 하는 거야. 가서 몸이나 풀고 오랬더니! 어디냐! 누굴 줘 팬거야? 가자. 빨리 사과하고 돈 돌려주고 오게. 하오문에서 소식 듣고 와서 우리 끌고 가기 전에 빨리 가자고.”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정확한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서로 간의 오해와 불신으로 하마터면 분노한 분타주로부터 몽둥이 찜질을 받을 뻔한 나호경과 선임 거지는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하고 나서야 분타주의 의심과 분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니 놈들이 우연히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던 무후파 잡놈들을 만나서 그 놈들을 쥐어 잡고 가게 주인으로부터 감사의 의미로 받은 소정의 사례금에다 그 놈들 무기 팔아서 번 돈을 합친 게 이거라는 거지?”
“예, 정확합니다. 저희들은 그저 목재상에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왔으니 어서 빨리 갚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진짭니다.”
“그래? 흐음…….”
모든 상황을 전부 듣고 다른 거지들을 불러 교차 대조까지 마치고서야 일말의 의심을 모두 거둔 분타주는 나호경과 다른 거지들을 향해 생각할 것이 있으니 나가 있으라고 했다.
분타주의 방으로부터 빠져나온 나호경을 제외한 다른 거지들이 적당히 안 들릴 만한 거리가 되자 투덜투덜거렸다.
“후우…이거 괜히 돈 벌었다고 신나서 분타주님께 갖다 드린 거 아닙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몰래 우리끼리 실컷 술이나 사 먹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같은데.”
“이결(李結)개야. 니가 그러니까 아직까지 고작 매듭 두 개짜리 이결개인거야. 그렇게 코 앞만 생각해선 짧은 시간 내로는 나처럼 삼결(三結)개가 될 수가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대로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돈은 돈대로 다 주고 욕까지 드셨으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아십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지.”
“욕을 먹었는데 기분이 좋다구요?”
‘변태야?’
“이건 챙겼거든.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랄까?”
나호경의 가슴에서 나온 것은 분명 무후파 놈들에게서 뺏었던 돈주머니였다.
“그게 왜 거기서 나옵니까? 아까 분타주님한테 다 드린 거 아니었습니까?”
“크큭, 내가 부분타주를 아부해서 딴 것 같냐? 나도 거지생활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 녀석아. 물론 그놈들에게서 빼앗은 칼이랑 그놈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랑 옷까지 자질구레한 거 다 팔아치운 돈이랑 가게 주인이 준 사례금은 다 드렸지. 어차피 그런 건 나중에 금방 들키거든. 대신 힘들게 땀 흘려서 돈을 벌어온 건 우린데 어떻게 다 드리겠니. 우리도 나름 혜택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당연히 살짝 수고비 정도 챙겼지. 목만 좀 축일 정도로. 그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으니 이건 알더라도 나중에 뭐라고 못하실 게다.”
“크~ 역시 우리 사천분타의 지낭(智囊)! 세수 앞을 보시는 군요.”
“자식, 애들 모이라 그래. 좋은 일 하고 사람들한테 서 환호성도 듣고 기분도 좋은데 오늘은 이걸로 내가 한잔 사마.”
“좋습니다!”
나호경과 거지들이 다시금 10대 걸가를 부르며 신이 나서 사천 분타 밖으로 나갈 때 장진수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이거였구나. 교관님께서 인재개발원에서 떠나기 전에 ‘착하게 살면 언젠가 꼭 보답받을 거다.’ 라고 하신 게! 앞으로 우리가 사람답게 돈 벌 구멍이 뭔지 확실히 알았다.”
* * *
“…그러니까 개방도들이 요즘 매일같이 길거리를 청소해주고 흑도 패거리들이 상인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걸로 자기들 밥벌이를 한다 이거지?”
“예. 자기들 말로는 ‘사천자치회’라나? 회에 가입한 가입자들에 한해 구획에 대한 치안과 환경 관리를 모두 자기들이 대신해주는 조건으로 한달에 얼마씩 받고 활동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근본적으로 이전의 ‘보호세’가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가를 제공하지 않고 저지른 일방적인 강탈에 가까웠다면 지금 개방도들이 하는 행위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일종의 서비스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육이 영 쓸모없진 않았나보네.”
“예. 정말 신기합니다. 거지들에게 사람답게 살라고 가르친 게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걸 보면. 상인들의 호응도 꽤나 만족스러운 걸로 보입니다.”
“그래? 한번 구경이나 하러 가보자.”
“잠행 나가시는 겁니까?”
“사후관리 차원이지. 교육받은 인원들에게 부족한 건 없는지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하라고 조언을 할 건 없는지 확인도 할 겸.”
거리에 나와서 보자 개방도들이 영국의 근위대마냥 순찰을 돌자 거리에서 많은 상인들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재개발원에서 입혀 보낸 훈련복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보네.”
“워낙 튼튼한 옷이잖습니까.”
민무늬의 카키색 훈련복은 중원의 옷과 다르게 통풍은 잘 안되는 편이었지만 오랫동안 입어도 수시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거나 하지 않는 이상 쉽게 해지지 않는 소재로 되어 있고 건빵주머니라고 하는 주머니를 허벅지 양쪽에 달아놓고 상의와 하의 모두 여기저기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어 기능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편리한 복장이긴 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네. 사천 분타에 앞으로도 그렇게 죽 열심히 살라는 의미로 훈련복 좀 두둑히 챙겨 넣어서 보내줘.”
“예.”
간만에 외출한 김에 사천의 유명한 다점(茶店)에 들려 보이차를 마시며 차향을 즐기고 있는데 당추향이 꽤나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네와 함께 들어왔다.
“어머나~ 이게 누구시더라? 감히 당문의 금지옥엽인 나를 점혈로 묶어놓고 다음에 대결하자면서 도망가신 분이시네?”
“이 놈이 그 놈이더냐?”
“예, 할아버지. 저 놈이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그 놈이에요.”
딱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깐깐한 표정의 노인이 아무래도 독장(毒將) 당기호(唐奇好)인 것 같았다.
‘아니…왜 여기서 니가 들어와. 그것도 딱 봐도 문제 일으키기 좋아하게 생긴 사람까지 달고서.’
고개를 돌려 눈 밑에 점 하나를 찍고 아닌 척 하고 싶었지만 당추향이 너무도 태연하게 옆에 바로 와서 서서 말을 거는 바람에 누구시냐고 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 노인이 먼저 말을 거는데 매몰차게 잘라버리기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출신으로서 영혼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노인공경의식이 날 붙잡았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옆에 있는 노인을 향해 양손을 맞잡아 인사를 하는 포권(捕權)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풍가화. 옆에 있는 분은 처음 뵙습니다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흥! 오늘은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떨거지는 안 달고 있네요?”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떨거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저번에 눈깔 이상하게 뜨던 여자요!”
‘아…다진이 말하는 건가.’
“추향아, 사람들도 있는데 말을 좀 가리거라.”
“알았어요. 할아버지.”
두 사람은 나와 삼대주가 오케이를 하지도 않았건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합석을 시전했고, 우리는 서로 불편한 대면을 계속해야만 했다.
“저번에 못 다한 우리의 약속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너랑 나랑 결혼 약속이라도 한 줄 알겠다.’
“크흠…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또 세월과 함께 보내버리는 게 어떨까 싶소이다만.”
괜히 더 엮여봐야 이겨도 져도 피곤해질 것 같아 물에 물탄 듯 흘려보내길 원했지만 상대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당문은 원한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모래에 새긴답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그렇습니까?”
일부러라도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옆에 계신 이 분은 누구신지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소저.”
“당신은 정말 보는 눈도 없군요. 딱 보면 모르나요? 중원 전역에 그 이름이 유명하신 독장(毒將)이신 제 할아버지를?”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니…중원에 무슨 신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튜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니 할아버지 얼굴을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쏴붙이고 싶었으나 옆에 나이 꽤나 먹은 양반을 앉혀놓고 그렇게 하는 건 너무도 경우 없는 짓이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하하…제가 좀 그쪽으로는 무지한지라…저는 선문 상단에서 일하고 있는 화운(貨雲)이라고 합니다.”
“그쪽 상단 사람이었어요?”
“흐음…상단? 화운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재화를 따라 구름처럼 쫓아다니는 천박한 상인답구나. 니 놈은 중원에서 일하는 상인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무림에 대한 학식조차 갖추지 못할 걸 보니 겉은 번지르르하게 생겼는데 속은 야물지 못한 게 야자과(椰子果, 코코넛 열매)같다고 할 수 있겠구나.”
어느새 점원이 가져다 준 차를 홀짝이던 노인네는 당신이 유명하지 않아서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몰라서 그런 거니 이해해달라는 겸양의 표현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뚫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관상은 사이언스라는 말이 맞는 건가…실제로 대충 지은 가명이긴 하다만 어쩜 말을 저렇게 하지. 언제 봤다고 사람을 속빈 강정 취급하는 거야.’
“지금 뭐라…….”
“(가만히 있어.)”
자신이 모시는 이가 하찮은 취급을 받자 삼대주가 이를 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슬쩍 저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전음을 날렸다.
‘그치…밥상머리 교육이 그 모양이니 얘가 이 모양이겠지. 애가 혼자 이렇게 이상하게 컸을 리가 있나.’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눠봐야 짜증만 날 것 같아서 삼대주에게 눈치를 줬더니 삼대주도 두 사람이 꼴보기 싫었는지 딱 센스 있게 가슴에서 회중시계(懷中時計)를 꺼내며 호응을 해왔다.
“도련님, 이만 다음 일정을 위해서 이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런…독장을 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군. 저희는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꽤나 쿵짝이 잘 맞게 상대방에게 우리 그만 헤어져를 예의를 갖춰 시전했건만 이 조손(祖孫)은 눈치는 진작에 엿을 바꿔 먹은 것인지 아니면 자기만의 세상이 너무 확고한 것인지 우리가 하는 말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 할 말만 떠들었다.
“잠깐만! 그게 무엇이더냐?”
“예?”
“방금 전 니 옆에 있던 놈이 가슴에서 꺼낸 그 조그마한 것 말이다.”
‘회중시계?’
신교에서 키우고 있는 장인들의 실력이 아직 시계를 손목시계의 형태로 소형화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어 현재 가장 최선을 발휘하여 만든 것이 지금의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만든 회중시계였다. 일정을 맞춰야 한다거나 작전에 들어갈 때 서로의 시간을 맞춰서 시행하는 것만으로 굉장히 높은 효율성을 발휘했기에 일부러 신교의 핵심인물들이라든가 요원들에게 보급한 물건이기도 했다.
“아! 혹시 이 회중시계(懷中時計)를 말씀하는 겁니까, 독장 어르신?”
두 사람에게 감정이 상했던 삼대주가 ‘니들은 이런 거 없지’를 시전하듯 자랑스럽게 회중시계를 꺼내서 보이며 말을 하니 노인네 눈이 번쩍이는 게 꼭 노인네가 던진 떡밥을 삼대주가 물어버린 것 같았다.
‘아이쿠…….’
“회중시계라…그 물건의 뜻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가슴에 품은 시간을 계산하는 기구라는 것 아니더냐? 허허…시계를 그렇게 작게 만들었다니 기기묘묘한 물건을 만들기로는 우리 당문을 따라갈 자가 중원에 없는데 우리 당문 말고 그런 물건을 만든 이가 있다고?”
‘된통 걸린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