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배도 채웠겠다 어제 구해온 목재로 교관이 앉던 것과 닮은 의자를 만들고 있던 장진수는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나호경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뭔데! 나호경이! 그러다 기껏 외상으로 가져온 나무로 수리해놓은 문 부서지면 니가 책임질거야? 책임질거냐고! 그거 수리하는 것도 다 돈이야! 돈! 이전처럼 어디 가서 돈 내놓으라고 하는 짓거리도 이젠 안할 건데 돈이 썩어나냐? 썩어나?”
“아! …죄송합니다.”
“아~ 됐고!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 씩씩거리면서 온 건데?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이건 아닙니다.”
“그니까 뭐가 아니야 뭐가? 내가 무슨 교관님도 아니고 눈빛만 보면 아냐? 말을 해야 알지. 인마!”
“기껏 뜨신 밥 먹은 놈들이 밥 먹고 나선 아무 것도 안하고 다들 짱박혀서 시간만 보내는 건 너무… 한심합니다. 밖에 나가서 한번 보십시오. 이놈들이 뭐 하고 있는지.”
직접 교관이 앉던 멋들어진 의자를 만들어 앉아볼 생각에 빠져 의자를 만드느라 분주했던 분타주 장진수는 갑작스레 찾아와서 언성을 높이는 나호경에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나호경의 말대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를 모르고 허송세월하는 부하 거지들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확실히 호경이 놈 말대로 젊은 것들이 저렇게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꼬라지는 좀 아니긴 해.’
“정 애들 노는 꼬라지가 보기 싫으면 니가 직접 애들 데리고 동네 한 바퀴라도 뛰고 오던가!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럼 됐지?”
“그래도 됩니까?”
“그래. 제발 좀 알아서 해 이제~ 나도 좀 니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내가 니들 엄마도 아니고 언제까지 쫓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다 해줘야 되냐, 안 그래?”
“죄송합니다…….”
분타주로부터 확실하게 분타의 인원들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대리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나호경은 이제 막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와서 양지바른 곳에 돗자리를 깔고 바가지와 숟가락, 젓가락을 늘어놓고 있는 백의개들을 지켜본 뒤 분타의 모든 거지들을 소집했다.
“저희들, 뭐 하는 겁니까?”
“그래. 밥도 먹었는데 가볍게 동네 한 바퀴 구보나 하고 오자.”
“아… 그거 좋은 것 같습니다.”
“그, 그러냐?”
“안 그래도 애들하고 얘기해봤는데 다들 몸이 찌뿌둥한 것 같더라구요. 마음 같아선 개발원에서 나올 때 아주 늘어져라 쉴 생각이었는데… 막상 쉬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더 불편해서…….”
“자식들! 잘 생각했다. 적당히 몸 풀고 출발한다.”
“좋습니다~”
“예!”
밥 잘 먹고 그냥 늘어질 생각뿐인가 싶었던 부하 거지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나호경은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몸을 움직이기 전에 항상 준비운동을 강조했던 인재개발원에서의 생활처럼 준비운동을 마쳤다.
“자, 이동 간에 걸가한다! 걸가는 진짜 사나이!”
“진짜~ 사나이!”
“하나 둘 셋 넷!”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사천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한 떼거리의 개방도들이 인솔자인 나호경의 옆에서 4열 종대로 길쭉하게 늘어서 절도 있게 성도 시내를 달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저, 저게 뭐하는 거래요?”
“그러게요.”
“개방도들이 어디서 옷을 주워 입었는지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질 않나, 생전 하지도 않는 짓거리를 하는 걸 보니 내가 오래 살긴 했나 보이.”
“아유, 머리모양도 항상 지저분~했는데 꼭 소림사 스님들만큼은 아니지만 짧게 머리도 밀고 저렇게 하고 다니니까 남자답고 보기 좋네요.”
“내 평생 거지들이 저렇게 절도 넘치는 건 또 처음 보네. 크크큭, 저것들이 뭘 잘못 처먹었나 아니면 점심 잘 먹고 기운이 넘쳐서 그러나.”
“왜요, 보기 좋기만 한데. 맨날 어디 가서 돈 뜯고 행패 부리는 꼬라지보다 훨씬 낫지.”
“그건 그렇지.”
“멋있다~”
“그나저나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귀에 쏙쏙 박히네~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남자답고 힘찬 게 아주 듣기 좋아.”
무공을 익힌 나호경과 개방도들의 귀에도 사천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많은 대화들 중에서 들려온 것은 자신들을 향한 칭찬의 말들이었다.
‘오… 멋있어 보인다 이거지.’
‘우리 좀 괜찮아 보이나?’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 개방도들과 나호경은 목소리를 키워 더욱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사천 사람들 개방 믿고~단잠을 이룬다~”
다른 10대 걸가를 부르려고 나호경이 구령을 맞춰 외치려고 할 때 어딘가에서 박살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장사를 하려면! 보호세를 내야 할 거 아니야!”
“어이!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해?”
“사람이 경우가 있어야지. 경우가! 이렇게 우리들이 애를 쓰고 당신들 지켜주려고 하는데 성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니야!”
나호경과 개방도들은 자신들이 해봐서 잘 아는 고함이 들리자 서서히 구보 속도를 낮추다가 의자가 날아와 자신들의 근처에 떨어지자 걸음을 멈췄다.
“뭐야! 형씨들? 구경 났어? 구경 났냐고!”
“저것들은… 또 뭐야.”
“어이! 가던 길 가~”
“혀, 형님… 뒤에 사람 수가 좀 많아 보이는뎁쇼…….”
뒤를 따라 오던 인원이 척척 모이자 그 수가 49명이나 되었기에 고작 6명밖에 되지 않은 무후파(武侯派)라는 이름의 흑도 조직원들은 살짝 쫄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뭔데!”
“너희들 우리가 누군지 알아? 사천에서 악명 높은 무후파야 무후파!”
“칼맛 보기 싫으면 알아서 꺼져!”
개방도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비록 자신들이 고작 분파이긴 하지만 9파 1방에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개방의 분파인데 저런 흑도 나부랭이들이 자신들을 몰라보고 칼을 꺼내들고 나대고 있으니 착하게 살려고 마음먹은 자신들을 시험하려고 하오문에서 준비한 덫인가 싶을 정도였다.
“뭐, 뭔 맛? 저, 저것들 뭐라는 거냐?”
“부, 분타주님… 저것들 가만히 둡니까?”
“잠깐만 있어봐. 주변에 하오문도들이랑 비슷한 복장 입은 사람들 없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확인해보겠습니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인원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퍼지자 무후파의 인원들은 자신들의 외침에 수십명의 인원이 허둥지둥하는 걸로 오해해서 더욱 기세등등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박도를 꺼내 휘둘렀다.
“거 아래춤에 달린 건 장식용인가 보구나!”
“하하하하.”
개방도들은 면밀히 주변을 살펴봐도 하오문 비슷한 흔적도 보이지 않자 나호경에게 돌아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덫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저 놈들 확실히 무후파 놈들 맞다고 합니다.”
“아이씨…괜히 쫄았네.”
하오문에서 판 덫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개방도들 입장에선 이제 거칠 것이 없어졌다. 물론,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해하여선 안된다는 하오문에서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죽일 생각까진 없었으나 감히 자신들을 모욕하고 함부로 떠든 흑도 나부랭이들과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대화만 하고 끝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얘들아?”
“예.”
“저것들 잡아와서 내 앞에 무릎 좀 꿇려놓고 이야기 좀 들어보자. 감히 대(大)개방의 일원들이 돌아다니는 구역에서 앞으로 우리가 돈을 뜯고 살 생각은 아니지만 저딴 식으로 함부로 숟가락 들이미는 놈들이 있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예!”
본인들도 내심 원했던 부분타주로부터의 지엄한 명이 떨어지자 다들 인재개발원에서 호되게 맛을 보고 몽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몸소 얻게 된 개방도들은 목재상으로부터 구해온 나무들로 틈날 때마다 깎은 몽둥이들을 쓸 기회라고 생각하여 싱글벙글하며 허리 뒤춤에서 꺼내 들었다.
“이렇게 빨리 손맛을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살려는 드릴게!”
“오, 오지마!”
“가만 안 둔다!”
“이녀석들. 우리가 누군줄 알고? 귀엽네. 우리 개방이야, 개방!”
“뭐? 개, 개방?”
“개방이 왜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중처럼 하고 다니는 건데?”
“일루와~ 맞고 이야기하면 돼. 우쭈쭈~”
무후파의 6명이 아무리 칼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몽둥이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자신들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꽂는 48명의 개방도들을 감당할 순 없었다.
퍽퍽퍽! 끄아! 거긴 안돼! 돼! 아흑―
여러 소음과 비명이 섞이는 혼란의 시간이 지나가자 잘 다져진 6명의 무후파 인원들이 모든 무기와 겉옷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까지 싹 개방도들에게 압수당하고 속옷만 입은 채로 무릎 꿇려졌다.
“아이구… 여러분들이 무후파에서 나오신 분들이라고 하셨죠? 칼 들고서 우리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넵. 저희는 대협들이 개방에서 나오신 분들인줄 모르고 그런 겁니다. 예.”
“이야~ 우리가 개방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하실라고 했던 건 맞다는 거네?”
“아, 아닙니다!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우리가 만만했으면 그 칼로 우리 쑤시려고 했다는 거 맞잖아!”
“히이익.”
나호경은 무후파 무리의 중간대장 정도로 보이는 놈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는데 니들 대장이랑 근처 흑도 놈들한테 전해.”
“옙”
“오늘은 경고야. 한번은 실수니까 괜찮아. 거기까지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줄게. 나도 한때 너희들 같았던 때가 있어서 이해하거든. 근데 두 번부터는 안 돼. 그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니까. 그때부턴 이 몽둥이로 몸을 통해 직접 배우는 수밖에 없어. 오늘처럼 또 배우고 싶으면 한번 해봐. 기대할게.”
“죄, 죄송합니다.”
“이제 너희들이랑 할 말 없으니까 더러운 몸뚱아리 그만 보이고 꺼져.”
“가, 감사합니다.”
속곳만 입은 채로 6명의 사내들이 욱씬거리는 몸을 서로 의지한 채 절뚝이며 도망가자 주변의 상인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멋있다!”
“딸만 있었으면 우리집 사윗감 삼고 싶다!”
“아이구~ 저 빌어먹을 잡것들을 빨랫감 털 듯이 몽둥이로다가 신나게 두들겨 패주는 걸 보니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감사합니다. 협사(俠士)님들. 어디서 나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아니었으면 딸아이 시집보낼 때 쓰려고 모아놓은 돈까지 다 털렸을 겁니다.”
“사천 분타가 최고다!”
개방도들은 그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에게 몽둥이로 흠씬 패주었을 뿐인데 가게 주인을 비롯해 사천 사람들로부터 생전 들어본 적도, 받아본 적 없는 이런 환호와 찬사를 받게 되니 그 감회가 신기하면서도 그 기분이 영 싫진 않았다.
‘조, 좋은데?’
‘사람 패고 이렇게 칭찬받아 보긴 처음이야.’
“분타주님, 저희들 돌아왔습니다.”
“어, 왔냐.”
“그리고 저희들이 돈 좀 벌어왔습니다. 목재상에게 밀린 외상 갚는데 쓰십시오.”
“어? 니들이 어디서 돈을 벌어와?”
나호경이 두둑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불쑥 들이밀자 장진수는 횡재했다는 느낌보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먼저였다.
“이, 이게 무슨 돈이냐? 니들 어디서 사람 줘패고 돈 뜯어 온 거 아니지?”
“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분타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