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목재상은 개방도들을 잔뜩 데리고 와서 말로만 정중한 척 7할을 후려치곤 연신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사천 분타주와 개방도들을 향해 실컷 욕을 박고 싶었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 속에서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자식들이 눈에 아른거려 그렇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참자. 참아야 해.’
“펴, 편한대로 하십시오.”
“대신 필요한 목재는 배달해줄 필요 없이 모두 내 부하들이 들고 갈 테니 걱정하지 말게. 얘들아.”
목재상은 사람들이 드문 야심한 밤도 아니고 대명천하(大明天下)의 백주 대낮에 뻔뻔하게 거지들을 잔뜩 끌고 와 자신의 가게를 털어가는 사천 분타주의 모습을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모두 지켜만 봐야 했다. 이 분함을 풀고자 관청에 가서 신고한다고 한들 무림과 관은 서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에 관에선 도리어 엉뚱한 일로 관을 귀찮게 한다며 자신을 향해 치도곤을 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었다.
‘하늘이 니 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리라! 평생 빌어먹을 놈들!’
“역시 교관님께 배운 대로 다른 사람을 정중하게 대하면 이리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거였군. 예절이라…좀 더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겠어.”
장진수는 예전의 자신처럼 아무렇게나 내놓으라고 겁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좋게 정중한 예의로 사람을 대한 게 먹혔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생각을 하며 기뻐하는 부하들과 함께 분타를 수리하고 몸을 뉘일 침상을 만들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꼭 인생을 다시 시작한 것만 같구나! 하하하. 이동 간에 걸가(乞歌)한다~ 걸가는 중원 사나이. 시이작~”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쭈욱 펴면~고향의 안방~”
침상을 만들 생각에 너도 나도 신이난 개방도들이 어깨 위에 나무를 잔뜩 나눠서 들고 길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지만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사천 분타의 개방도들은 그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 * *
천장에 뚫린 구멍을 틀어막은 뒤로 각자가 생활할 개인 침상이 생기는 변화와 함께 사천분타의 개방도들은 다음날부터 일상에서도 많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우…도저히 잘려고 해도 잠이 안 오네.”
“저도 그렇지 말입니다.”
분명 기상 나팔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건만 마치 환청처럼 들려오는 기상 나팔 소리에 모두가 일어나 침상에 앉아 있었다.
“몸도 찌뿌둥한데 나가서 체조라도 좀 하는 게 어떻겠냐?”
“역시 아침은 도수체조(徒手體操)로 시작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나가시죠.”
각자의 잠자리를 정리하고 인원들은 건물 밖으로 나와 자연스럽게 오와 열을 맞춰 섰다.
“너희들 왜 아침부터 시끄럽게 떠들고 있냐?”
“분타주님 기상하셨습니까?”
“그래…….”
“아…저희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몸도 좀 뻐근하고 그래 가지고 도수체조라도 할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냐?”
장진수는 6주간 해왔던 것처럼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가서 서서 멀뚱히 호각소리를 기다렸지만 어디에서도 호각을 부는 이가 없었다.
“뭐야, 왜 시작 안 해?”
“교관님이랑 조교님들이 없으니까 분타주님이 직접 구령을 불러주셔야 합니다.”
“아! 그랬지…….”
수동적 자세로 그저 따르기만 했던 훈련 기간은 이제 끝났건만 정신은 아직도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지 그대로 따르려고 했다.
“자, 오늘은 호각이 없어서 대신 구령으로 할 테니까 알아서 잘 따라할 수 있도록!”
“넵!”
“하나! 둘 셋~넷!”
도수체조를 통해 잠자며 굳은 몸을 푼 이들은 자연스럽게 식사 전까지 주변을 청소할만한 도구를 찾았지만 거지들이 모여 사는 소굴에 청결 유지를 위한 도구같은 것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기… 분타주님.”
“청소 안하고 왜?”
“청소를 하려고 해도 청소할 도구가 없습니다.”
“도구가 왜 없… 는 게 맞지. 그런 거 우리는 필요한 적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근처에 가서 좀 빌려달라고 그래.”
“아침 댓바람부터 거지들이 몰려가서 빗자루 내놓으라고 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이전 같았으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 자체를 할 리가 없는 개방도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최대한 피해를 끼쳐선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크흠…오늘은 일단 빗자루 빌려달라고 부탁해서 그걸로 청소작업 진행하고 빌린 대가로 그 주변도 우리들이 청소해준다고 그래. 자기들 대신에 청소해주겠다고 하는데 싫어하겠어? 그리고 모두 다 같이 청소하긴 어려울 거니까 인원을 나눠서 일부는 목재 가게에서 빗자루 만들 만한 자재들 좀 외상으로 달라고 해. 손재주 좀 좋은 놈들 자원 받아서 우리가 사용할 청소도구들 좀 만들면 내일부턴 안 빌려도 될 거 아니야?”
“역시 우리 분타주님!”
“저기, 근데 돈은 어떻게 합니까? 자꾸 외상 달라고 하면 싫어할 텐데…….”
“그건….좀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자. 어떻게든 돈 생길 구멍이 없겠냐?”
거지들이 일반인들처럼 집에 돈을 모아놓고 지내면 그게 거지겠는가. 사천 분타의 운영은 기본적으로 사천 사람들의 자발적(?)인 성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교관이었던 하오문주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다시 자신들을 만나게 될 것이란 강력한 경고가 있었기에 그건 이제 불가능한 방법이 되어버렸다. 조만간 돈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긴 하겠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 천성이 거지로서는 머리 아픈 일은 미루고 싶었다.
사천의 거지들은 그리 크지 않은 분타 건물 내부와 주변을 좀 더 깔끔하게 청소하고 빗자루라든가 청소도구를 빌려준 집들 주변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주변을 청소하고 나니 문제가 발생했다.
“이거… 여기까지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건 그런데…….”
3개의 매듭을 가진 선임 거지 나호경은 자신에게 어디까지 청소를 하면 되는지를 묻는 하급 거지들의 질문에 자신이 봐도 청소되지 않은 거리가 거슬린 탓에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없이 결정했다. 스스로 사천분타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나호경은 이때만 해도 자신의 결정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일단 보이는 부분에서 걸리적거리는 곳 없을 때까지 청소해. 어차피 우린 할 일도 없잖냐.”
“예.”
이전이라면 3결(三結) 거지가 지시를 내렸다고 한들 이런 지시를 매듭이 없는 하급 거지들이 따를 리 없었지만 아직 군기(?)가 빠지지 않은 사천 분타의 거지들은 아무런 반발 없이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이른 아침부터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혹은 일을 나가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천의 사람들은 덕분에 신기한 구경을 하게 되었다.
멀끔한 복장을 한 인원 수십이 나와 거리에 있는 낙엽이라든가 더러운 것들을 비롯해서 일반인들은 치우기 어려운 무거운 것들까지 싹싹 치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저 사람들은 누군데 여길 청소한데요?”
“분명히 저 사람들은…어제 그 사람들인데.”
“그게 누군데요?”
“왜 있잖아. 요 앞 사천 분타라고 해서 거지 소굴에 모여 사는 개방도들.”
“히익?”
“저 치들이 그 거지들이라구요?”
“저렇게 깔끔하게 차려입고 길을 청소하고 있으니 전~혀 그렇게 안 보이네요.”
“그러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때쯤 한 노파가 어디를 치우라고 지시를 내리는 나호경에게 다가와 뭔가를 건네줬다.
“저기…어르신, 이게 도대체 뭡니까?”
“아유~ 그동안 내가 저 큰 나뭇가지를 치워줬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해도 아무도 안 치워주더라고. 그런데 오늘 소협들이 이렇게 나타나서 치워주니 마음을 눌러놓고 있던 짐이 싹 사라진 것만 같아서 그래요. 정말 고마워요~소협들.”
“별거 아닙니다. 저희는 무공을 익히고 있는 몸이니까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어렵지 않다고 해서 꼭 소협들이 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잖수? 내 마음이니까 받아둬요.”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이었지만 노파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까지 받게 되자 나호경과 그 부하 거지들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인재개발원에서 나오며 점혈이 풀리며 내공을 다시 돌려받은 일이 이토록 좋은 일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노파 하나가 고마움을 표하며 먹을거리를 갖다준 뒤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먹을 걸 챙겨주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래서 청소하던 인원들 몇이 분타로 돌아가 추가로 인원들을 데려와 먹을거리만 받아서 들고 다닐 인원을 배정해야 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저희 사천 분타에 있는 인원들 하루 먹을 양은 충분히 되겠는데요?”
“그, 그러게?”
청소를 끝낸 후 빌렸던 청소도구를 갖다 주러 갈 때쯤엔 사천의 개방도들 덕분에 사천의 성도(成都) 시내가 깔끔해졌다며 여기저기서 칭찬과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되자 개방도들은 이전에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환대와 따뜻한 시선에 꽤나 뿌듯함과 함께 묘한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분타주님, 오늘 청소를 하다가 받아온 겁니다.”
“이걸 다? 그냥 줬다고?”
“예.”
“혹시 니들 강제로 뺏어온 거 아니지? 나호경이!”
“아유!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절대 아닙니다. 모두들 저희들이 거리를 청소해줘서 고맙다고 준 겁니다. 애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진짜로?”
“진짭니다.”
거지들의 절대적인 규칙은 받아온 먹을 걸 나눈다는 것이었다. 백의개들을 데리고 청소를 나갔던 개목(3결)이 사람이 부족하다고 인원들을 추가로 더 데려오라고 할 때만 해도 뭔 일인가 싶었던 장진수는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막상 이들이 받아온 음식의 양은 50명이 되는 분타의 인원이 다 함께 배불리 삼시 세끼를 먹어도 남을 정도의 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아침부터 먹을 걸 달라고 거지들이 들이대면 아무리 자신들이 힘이 있다고 해도 좋은 표정을 하는 이들도 없었기에 어지간하면 거지들의 영업(?) 시간은 대체로 점심 전쯤 느지막히 일어나 멍 때리다 점심 때가 지나서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거지들이 말하는 영업이라는 것도 음식점이나 일반 가정집을 찾아가 먹을 걸 달라고 하면서 적당한 보호세를 받아 받아온 음식으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개방도가 아닌 거지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착취하여 얻은 돈으로 저녁에 술을 마시며 진탕 취해서 잠자는 것이었다. 나호경의 말대로면 음식을 챙겨주며 감사인사까지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겨우(?) 그까짓 청소를 해줬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준다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해가면서?’
분타주는 부하들과 모여 앉아 부하들이 자신의 몫으로 바가지에 음식을 챙겨준 음식을 나무를 깎아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받아온 음식을 모두가 똑같이 나눠 먹는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백의개들이 선임 거지들의 바가지와 숟가락 젓가락을 챙겨 하천으로 설거지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분타주님, 저희들…이제 뭐합니까?”
“이 자식이! 나호경! 개방도가 이 시간에 하긴 뭘 해? 지금 점심 때도 안됐어. 그냥 가서 퍼질러 자든 무공 수련을 하든 알아서 하면 될 거 아니야! 나는 할 게 있다고.”
“아…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할 일이 없어진 1,2결 거지들이 여기저기 짱박혀서 쪼그려 앉아 있는 걸 본 나호경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아주 익숙하다면 익숙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눈에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사지육신이 건강한 놈들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6주간 매일같이 인재개발원에서 교관과 조교로부터 들어온 말이라는 걸 인식조차 못한 나호경은 괜스레 멀쩡한 놈들이 맥아리 없이 저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틀렸다.
백의개들은 알아서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움직이건만 어찌 그 위의 거지들이 본을 보일 생각은 않고 저러고 있는지 싶었다.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