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냥 풀어주라고? 혹시라도 개방도들을 풀어주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쯧, 여전히 자네는 전생에 가지고 있던 약자의 습성을 버리질 못하고 있어. 이젠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겁먹지 말게. 설령 문제가 되면 어떤가. 도망치는 것에 익숙해지지 말고 겁을 먹을 필요도 없다네. 겁을 먹고 당황하면 시야가 좁아져서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돼. 언제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는 게 지도자의 책무야.]
비아는 이게 표면적으로 일월신문과 개방의 대립이 아니라 하오문과 개방의 대립일 뿐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르네. 하오문과 은월이 사실은 신교의 위장막일 거라곤. 언제고 중원 전역에 하오문이 풀려난 이후에 정파와 하오문은 한번은 부딪혀야만 하지 않나. 내가 보기엔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보네. 이왕 부딪히는 거 만만하지 않은 상대임을 중원에 알릴 필요가 있어. 그래야 하오문에 들어온 문도들도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지 않겠나?]
일리가 있었다. 하오문의 고수들이 진정 하오문을 보호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증명한다면 하층민에 속한 이들은 믿음을 갖고 좀 더 많은 이들이 하오문에 문을 두드릴 것이고 그건 하오문의 확장으로 이어질 테니.
[강자는 약자의 냄새를 빠르게 눈치채는 법이야. 설령 본인이 약자라고 할지라도 약자라는 걸 주변에 쉽게 들켜선 안 돼. 아무리 덩치가 커다랗다고 한들 맞고도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 강자는 본능적으로 알아채버려. 자신이 마주한 상대가 그저 외형만 큰 약자라는 걸. 그렇게 한번 약자로 낙인이 찍혀 버리면 그때부턴 강자들은 비열하게 약자를 괴롭히지. 왜 그럴까? 그저 강자의 인성이 비열하고 나빠서? 그건 패자의 논리야. 강자는 약자를 괴롭힘으로써 주변에 아주 쉽게 본인이 강자임을 알릴 수가 있기 때문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약자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 적어도 괴롭히는 녀석이 약자가 아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아무리 문명화된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게. 맞으면 내키지 않아도 받아쳐야 한다는 걸.]
“훗. 간단하게 무림에서 왕따 당하기 싫으면 억지로라도 열을 올릴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래! 고슴도치처럼 물려고 드는 상대의 주둥이에 피가 나게 만들어도 좋고, 스컹크처럼 악취를 내뿜어도 좋네. 정파가 어찌하여 사파를 모두 없애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그게 다 건드려서 그다지 좋을 게 없다고 경험적으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야. 뿌리가 얕았던 일월신교는 과거에 정파의 연합에 너무 손쉽게 겁을 먹고 꼬리를 말았네. 적어도 우릴 건드리는 것들은 피를 볼 것이고 그 피가 결코 적지 않을 거라는 걸 보였어야 했어. 그러니 앞으로 신생 문파 하오문은 최소 그렇게 인식되도록 해야 하네. 균형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걸 잊지 마.]
“좋아. 그렇다고 해서 달려드는 족족 죽이지는 않겠어. 맹획의 칠종칠금(七縱七擒)처럼 몇 번이고 잡아서 무릎 꿇려주지. 아무도 죽이지 않지만 덤벼드는 자들에겐 가차없음을 보여줘야겠어.”
“가라.”
“뭐?”
“무슨 속셈이냐?”
개방도들은 이대로 어딘가로 끌려 노예로서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절망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하오문이라는 놈들은 후환(後患)이 두렵지도 않은지 자신들을 풀어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거지새끼들 데려다 사람 만드는 건 우리 입장에서도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이야. 냄새나는 너희들을 죽일 게 아니라면 일단 씻겨야 할 거고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는데 돈이 땅바닥에서 솟아나냐? 그러니까 풀어줄 때 가라고.”
“진짜지? 나중에 다른 말하면 안 된다.”
“그래. 알았으니까 꺼져! 니들 몸에서 나는 썩어빠진 냄새 맡기도 지겨우니까.”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손짓을 하자 하오문의 고수들이 칼을 들고 개방도들에게 다가갔다. 개방도들은 지금껏 풀어주겠다고 말을 해놓고 정작 칼을 들고 다가오니 움찔했지만 하오문의 고수들은 조용히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만 끊어놓고 뒤로 다시 돌아갈 뿐이었다.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꺼져!”
“이익!”
나름 사천 분타에서 한가닥 하는 개방의 고수들인 자신들이 흑도무리 취급을 받는 것 같다는 걸 느끼자 기분이 나쁘지만 당장 여기저기 다친 몸으론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취급을 받고 가슴 안에 차오른 응어리를 풀어내지 않은 채로 꼬리를 만 개처럼 도망칠 수 없었던 개방도들은 어느 정도 뒤로 물러선 뒤 갖가지 욕을 내뱉었다.
“퉷!”
“이번엔 이렇게 우리가 물러가지만 다음에도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개방을 무시한 죄는 기필코 돌려받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이랑 다를 것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아우, 지겨워. 아직도 썩은 내가 나네. 야, 소금 뿌리고 쟤들 있던 곳 깨끗이 치워라. 쟤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옙.”
이렇게 쏘아붙이면 몇놈은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오문은 진짜 자신들을 거지취급하듯 손으로 절레절레 휘젓고선 장원의 문을 닫아버렸다.
“저희들, 지금 거지 취급 당한 겁니까?”
“그, 그런 것 같은데?”
“아니! 역사도 없는 것 같은 신생 문파 놈들이 감히 우리 대(大)개방도들을 뭘로 보고!”
“거지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우리가 개방인 건 맞잖습니까?”
“넌 인마! 우리가 그냥 거지야? 우리가 누구냐? 개방이야! 개방!”
“예… 거지들이 모여서 만든 문파 개방이요…….”
“나호경이 너 진짜! 아오오……. 넌 나중에 몸 낫고 봐.”
“제가 뭐 틀린 말 했다고…….”
패잔병 신세가 되어 분타로 돌아가는 거지들의 발걸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꼭 개방에 입문하기 전 어릴 적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거지 신세로 돌아간 것 같아서.
“다 보냈어?”
“예. 말씀하신 대로 적당히 자극하면서 보냈습니다.”
“잘했다.”
“저기… 이렇게 하면 개방에서 나중에 또 처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오라 그래.”
“예?”
“오라고 하라고. 몇 번이고 깨부수면 되니까. 어려울 것 같아?”
“그건 아닙니다.”
“이번에 개방도랑 싸우다가 다친 애들 몇 명 있었지?”
“예. 아무래도 거지들이라서 그런지 합을 맞춰서 진형을 짜고 싸운다기보단 난전(亂戰)이다 보니까 다친 인원들이 있었습니다. 아! 그래도 큰 부상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전이라 다쳤다? 난 그게 변명으로 들려.”
‘어떻게 싸움이 났는데 아무도 안 다칩니까…….’
열심히 싸운 자신의 부하들이 다친 게 변명이라니 삼대주는 교주님이 왜 이러나 싶었는데 이어 나온 교주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너희들은 내 허락 없이는 다치면 안 돼. 우리 신교를 지킬 기둥들이 저런 거지들 상대하느라 다쳐서야 쓰겠어? 난 그거 마음 아파서 못 본다.”
“예. 그렇죠.”
‘역시 우리 교주님이시다. 우리를 이토록 아껴주시다니.’
하지만 다음에 나온 교주의 말에 잠시 좋아졌던 기분은 땅 속 깊이 지하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특별훈련이다. 다시는 저딴 거지 같은 놈들에게 이번처럼 다치지 않게. 아니, 개방도쯤은 몇 번이고 부딪혀도 가볍게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직접 지도해주지.”
‘아니… 교주님?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잘 못 들었습니다?”
“못 듣긴 뭘 못 들어. 다 들었잖아. 애들 모아. 오늘부터 훈련이라고. 앞으로 내가 가려는 먼 길에 함께하려면 너희들이 지금처럼 약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강해져라.”
‘특별훈련이라니…….’
“일다경(一茶頃) 준다. 복장 갖추고 지하훈련장에 인원 소집할 수 있도록.”
“존명!”
삼대주는 교주의 눈에 담긴 불꽃을 보니 이번 훈련은 꽤나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했던 이가 갈렸던 지옥훈련만큼이나.
분타의 인원들이긴 하지만 풀려난 개방도들로 인해 사천에선 하오문의 무력이 일반 흑도의 무리들보단 높다는 평이 돌았다. 그러나, 개방의 진정한 힘은 전역에 흩어진 수없이 많은 인원에 있으므로 본산이 사천에 있는 점창이나 청성은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보냅니까?”
“몇 번 묻냐. 인마! 본부에 보내라고! 사천에 더 많은 고수들을 보내달라고 해야해. 개방이 이렇게 졌다는 게 사천에 소문이 나버리고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동냥질하고 다닐래? 영업장에서 수금이 되겠어? 만약 하오문에 가입해버리고 앞으로 돈 못 준다고 하면 어쩔 거야? 당장 보내!”
죽은 이는 하나 없지만 다들 자근자근 밟혀서 사천의 분타 하나가 작살이 나버렸다. 분타 여기저기서 거지들이 끙끙 앓는 소리에 여기가 의원인지 거지 소굴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사천의 분타주인 장진수(張眞修)는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천의 왕초로서 굉장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냄새가 나. 아주 지독한 냄새가.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단 말이다.”
“킁킁. 죄송합니다… 측간에 갔다가… 물로 닦는다고 닦았는데. 제대로 안 닦였나 봅니다. 이런…….”
“아우 더러워! 넌 인마 앞으로 냇가에 가서 제대로 씻기 전까진 내 근처론 세발짝 이내로 오지 마라. 알았어?”
“…….”
‘지는 깨끗한 줄 알아. 지도 그래봐야 거지인 건 마찬가지구만.’
“왜 대답이 없어, 인마?”
“알겠습니다.”
장진수가 눈을 부라리며 괜스레 처맞고 쌓인 울분을 자신에게 풀 심산으로 성질을 내자 잔머리를 바탕으로 사천분타주 장진수의 최측근이자 부분타주를 맡고 있는 나호경(羅豪卿)은 진심 이럴 때마다 거지 생활하는 게 거지 같다고 느꼈다.
‘내가 진짜 여우 같은 자식들이랑 토끼 같은 마누라만 없었으면 이딴 거지생활은 진작 때려쳤다. 진짜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나호경은 서찰이 담긴 통을 다리에 매달고 저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전서구가 너무나 부러웠다.
* * *
용운의 훈련은 철저히 과학적으로 진행되었다. 체력과 심폐능력을 강화시키는 고강도의 인터벌 트레이닝에 지구력과 근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서킷 트레이닝을 병합한 용운의 훈련법은 짧은 기간에 발전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훈련법이었다. 용운의 훈련법에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건 훈련을 수행해야 하는 당사자들은 죽을 맛이라는 것 정도?
“다음!”
“헉헉헉헉.”
훈련 중에는 내공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명에 훈련을 받는 요원들은 오로지 맨몸으로 훈련을 받느라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교주님이 직접 주관하여 훈련을 시작한다고 할 때만 해도 하얗게 질린 표정을 한 삼대주의 얼굴이 이해가 되지 않아 비웃던 과거의 자신들을 크게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나름 고수라고 자부하던 요원들의 체력과 근력을 용운이 마른 오징어에서 액기스를 짜내듯 한계까지 쥐어짜는 데는 반시진(1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만이라는 구호와 함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모두가 바닥에 널부러졌다.
“여기까지.”
“헉헉헉헉. 하늘이 노랗다.”
“죽겠다. 죽겠어.”
“…후읍후읍후읍…….”
“오전 훈련도 모두들 수고했고. 지원요원들이 제공하는 비타민(肥佗閔) 음료를 섭취하면서 휴식 취한 뒤 이동해서 식사하고 대기할 수 있도록.”
“어어어…….”
“살려줘.”
“아니야, 그냥 이대로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