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기회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다. 하나 하나의 가능성이 모여 시너지를 이룸으로써 기대한 것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기회는 서로 더해진다고 해서 1+1=2처럼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대단한 기회라 할지라도 그걸 온전히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보다 더 큰 소화력으로 그 기회를 씹어삼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그때가 오길 기다리며 더 멀리, 더 높이 뛰기 위해 잠시 웅크리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용운 님, 저 배가 아파서 도저히 더는…….”
“한번만. 응?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한번만 더. 괜찮지?”
“시, 싫습니다!”
“그럼 지금부턴 홍탕(红汤)만 먹는 게 아니라 처음 먹어봤던 백탕(白汤)을 준비해줄테니까 그거에 익혀 먹게 해줄게. 홍탕 1번, 백탕 2번 이런 식으로. 어때?”
“홍탕은 더 이상 못 먹겠습니다. 못 먹겠어요! 앞으론 백탕만 먹게 해주는 게 아니라면 화과는 싫습니다!”
배를 움켜쥔 게사르는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더니 문을 열고 운룡대팔식까지 사용해가면서 뛰쳐 나가버렸다. 솔직히 도망치는 게사르를 잡으려고 한다면 못 잡을 것까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신메뉴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게사르를 그렇게 대하고 싶진 않았다.
“후…역시 안되는 건가.”
“그러게 내일 먹이자니깐. 매일같이 삼시 세끼로 화과(火鍋, 훠궈)라는 이 매운 음식을 먹이니까 못 버틴 거잖아요. 나약한 게사르는 백탕밖에 못 버티는 남자라구요.”
‘초절정고수가 나약해? 그럼 넌 뭔데? 넌 왜 홍탕을 매일같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건데…….’
“음… 다진아, 넌 어때? 넌 괜찮아?”
“네. 처음에 화과를 해줬을 때는 확실히 너무 매워서 입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매운 정도가 낮아져서 그런가? 입맛에 딱 맞고 좋아요. 먹으면 뭔가 내 안에 쌓인 화가 풀어지는 것도 같고.”
“그래?”
“그리고 매워서 그런지 몸에서 땀을 흘리면 개운한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이거 먹고 매일 화… 아니다… 이건 말 안 할래요.”
“응? 화? 화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하게. 빨리 말해줘. 혹시 모른다고. 사람들에게 화과를 알리는 용도로 쓸 만한 선전 문구로 쓰기에 좋은 걸 수도 있으니까 말해줘.”
‘미쳤나봐. 3~5일에 한번씩 가던 화장실을 이거 먹은 뒤로 매일 하루 2번씩 가서 속이 편해졌다고 어떻게 말해. 근데 이걸 동네방네 사천 사람들한테 소문을 내겠다고? 그것도 매운 화과 먹고 매일 2번씩 큰 거 보러 가는 여자가 있다고? 그건 안 될 말이지. 아무렴. 우리 집안에 X칠하는 짓이야. 다른 건 몰라도 변비녀로 소문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안되겠다. 그걸 써야겠어.’
다진은 간곡한 용운의 부탁에도 들어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용운이 보면 이상하리만치 긴장하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아 또 왜. 왜 저 표정이 나오는데. 이것도 여자들한테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비아는 진짜 개똥도 아닌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땐 꼭 로그아웃 상태고. 이걸 어디에 물어보지.’
이런 사소한 걸로 현재 매실나무밭을 늘리느라 바쁜 아미파에 가서 멸마사태나 다른 스님들께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갑하구만.’
다진이는 ‘나 지금 불편하니까 건들지 말아요.’ 상태인데도 꾸준히 양고기 꼬치와 소고기 꼬치를 홍탕에 담가 익힌 뒤 하나씩 꺼내서 양념장에 찍어 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얘 진짜 삐진 거 맞나? 아닌가? 에이, 모르겠다.’
현대의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식 메뉴 베스트3에 손꼽히는 훠궈는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확고부동한 성공의 외식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매운맛의 정도 조절이었다. 매운맛이 너무 약해도, 너무 강해도 사람들은 그 미묘한 차이로 인해 발길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많은 외식을 경험했던 손님으로서의 내 입장을 떠올려 보면 맛이 없다고 해서 사장에게 어떤 점이 별로였는지를 설명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족하지 못한 손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에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전달한다. 백날 전단지 돌리고 홍보행사를 통해 가게에 손님을 끌어모은다 할지라도 찾아온 손님에게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만족스러운 경험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 손님은 돈을 크게 써서 실행한 한 번의 커다란 홍보 이벤트보다 가게에 더 큰 악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것의 이유는 음식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탐색재(search goods)가 아닌 스스로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경험재(experience goods)이기 때문이다.
“근데요, 용운 님. 화과요, 꼭 용운 님이 매운맛의 정도를 미리 정해놓고 팔아야 해요?”
“어?”
“어차피 매운맛을 결정하는 건 국물의 양이 일정하다고 할 때 양념의 투입량에 의해 결정되잖아요. 그렇다면 미리 매운맛의 정도를 나눠서 손님에게 어느 정도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게 하고 우리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매운맛의 정도에 맞춰 양념의 투입량을 조절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적당히 맵다고 해봐야 이건 우리 입맛이고 사람 입맛이라는 게 다 다른데 누구는 지금 우리가 먹는 것보다 훨씬 매운 걸 먹고 싶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그렇지. 우리도 떡볶이라든가 하는 매운 음식들은 대개 단계를 설정해놓고 팔잖아. 이지, 노멀, 하드라든가 1단계, 2단계, 3단계라든가 뭐 이런 식으로!’
나는 꽤나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다진이를 낯선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현대인이었떤 나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지만 다진이에겐 아니지 않은가.
‘누구냐, 넌?’
“그럼 안돼요?”
“되지! 되고 말고! 모자라? 어떻게 더 꼬치 좀 더 갖다 줄까?”
내가 잊고 있었던 정보를 깨닫게 해준 다진이가 갑자기 예뻐 보였다.
“화과는 됐구요. 저번에 해줬던 마라향과(麻辣香鍋 마라샹궈)나 해주세요.”
“마라향과를? 배부르지 않겠어?”
“에이, 꼬치 고작 몇 개 먹었다고 배가 차요?”
“고작 몇 개?”
내 눈앞에 놓인 꼬치의 개수만 해도 얼추 100개는 가뿐히 넘어 보였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도 이 정도 먹으면 배가 부를 거 같은데 다진이는 고작이란다.
‘이 돼지. 도대체 얼마나 먹으려는 거야.’
“뭐에요? 그 눈빛은? 굉장히 불순해 보였는데.”
“에이, 마라향과 먹고 싶다고 했지 기다려봐.”
‘아… 앞으론 내가 움직여서 영상 찍는 게 아니라 쟤 보고 그냥 먹으라고 하고 먹방이나 찍을까? 예쁜 여자들이 먹방 찍으면 남자들 영상보다 조회수가 잘 나오던데.’
마음 한구석에서 살짝 의구심이 피어올랐지만 그렇다고 생각한 대로 섣불리 다진이를 데리고 먹방을 찍을 자신은 없었다. 특별히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만약 다진의 먹방 조회수가 내가 찍힌 영상들보다 조회수가 많으면 그동안 내가 뭐하려고 땀을 흘려가며 영상을 찍어왔나 싶어 자괴감을 느낄 것만 같아서.
* * *
많이 먹어서 그런지 졸립다며 다진이가 들어간 후 혼자 다진이가 먹은 잔해들을 치우고 있는데 아까 밖으로 도망쳐 나갔던 게사르가 요상한 표정을 하고 들어왔다.
‘자식, 또 뭐라고 할까봐 괜히 쫄아서 그러는구만? 에휴, 내가 먼저 받아줘야지.’
“어, 왔냐? 속은 괜찮고?”
“요, 용운 님!”
“됐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지, 진짜입니까?”
“뭐가? 게사르 너한테 앞으로 화과 안 먹어도 된다고 한 건데. 이거 아니야?”
“역시 모르고 계셨구나.”
“응?”
“아까 제가 밖으로 나갔지 않습니까.”
“그랬지. 더 이상 이런 음식을 먹고 살 수 없다고 하면서.”
“크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게사르의 말에 따르면 이전부터 사천에 자리를 잡고 있던 개방과 얼마 전부터 그 영역을 공격적으로 넓혀가고 있는 하오문의 사이가 크게 벌어져 길거리에서 크게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사람들은 다들 처음에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해도 개방이 가볍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방이 거지들의 문파고 사천이 겨우 일개 분타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래도 9파 1방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방 아닙니까? 그런데 개방의 고수들이 하오문의 고수들에게 박살났습니다. 개방의 거지들이 조직적인 하오문의 고수들에게 각개격파 당해버렸죠.”
“그, 그래? 그거 참…크흐흠.”
‘잘했군, 자식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이것 저것 가르쳐준 보람이 있어. 음.’
내가 키운 녀석들이 개방의 거지들을 이겼다고 하니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은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게사르,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이것 좀 치워줄래?”
“예? 저보고 이걸 다 치우라구요?”
“그래, 부탁 좀 할게. 내가 바빠서 그래.”
“저번처럼 나갔다가 다음날 들어오시려고 그러면 안 됩니다. 다진 님이 또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그런 거 아니야. 오늘은 금방 돌아올거야. 잠깐만 갔다 올 거거든.”
“에이,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진짜야. 사람 말을 못 믿니?”
‘용운 님은 사람이 아니라 용이잖습니까.’
“다진이 깨기 전에 돌아올거야. 잠깐만…그러고 보니까 넌 왜 내가 아니라 다진이 눈치를 그렇게 보냐? 내가 나갔다 오겠다는데.”
“그, 그게……. 이것만 치워두면 되는 거죠? 급하신 거 아닙니까?”
“그, 그렇지.”
“그럼 뒷정리는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용운이 앞치마를 풀러 게사르에게 전달한 뒤 밖으로 나가자 게사르는 앞치마를 손에 들고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자기가 뒷정리하기 싫어서 나한테 떠넘긴 것 같은데? 나 지금 당한 거지? 어우, 뭐 이렇게 많이 먹었냐. 꼬치 수가 몇 개야. 10개, 20개……. 못해도 150개는 되는 것 같은데. 마라향과도 먹었어? 이 용들은 아무튼 정도라는 게 없어. 사람인 척 위장을 하려면 사람처럼 적당히 먹어야지. 이젠 내 앞에선 사람인 척하려는 시늉도 안 한다니까?”
밖으로 나온 나는 빠르게 은월의 본거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교, 교주님! 충성!”
“충성!”
은월의 요원들이 맨날 날 보면 부복을 해대면서 두 무릎을 바닥에 꿇어대기에 군대식으로 서서 간단하게 경례를 하는 걸로 바꿨더니 은월의 창구를 담당하는 요원 둘은 날 보자마자 기립하여 경례로 맞이했다.
“쉬어. 삼대주 여기 있지?”
“예. 방금 전에 있었던 일로…….”
“어, 그거 때문에 온 거야. 자세한 내용은 삼대주한테 직접 들을게.”
“예. 충성!”
“응, 수고해.”
삼대주가 있는 공간에 올라가자 여러 은월의 요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느라 그런지 시끌시끌한 것 같았다.
“충성! 오셨습니까, 교주님? 안 그래도 이따가 자료를 정리해서 찾아뵐려고 했는데.”
“삼대주, 그래도 되긴 하는데… 혹시 몰라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왔다. 어차피 전략을 수립하고 거기에 대해서 회의를 진행한 뒤 따로 내게 정보를 전달해서 다시 의견을 받아서 절차를 진행 하는 것보단 내가 직접 회의를 주관하는 게 의사교환의 속도에선 빠를 것 같아서 말이야. 다른 정파들이 개방과의 충돌로 인해 차후 우리 하오문과 개방과의 대립에 개입할 것인지도 알아야 하고.”
“예. 그럼 오늘 있었던 개방과의 충돌 이유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