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래, 어떻게 해결책은 나왔습니까?”
“아직이요.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스님. 그걸 알려주셔야 적절한 해결책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솔직히 말하면 자신만만하게 나불댄 것치고는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이 고작 궁금한 거 하나 알고 싶은 거라면 별로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것도 우리 아미파를 도울 방법을 알려주시겠다는데.”
“그래도 9파 1방이라고 불리던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아미파인데…어찌하여 이렇게 운영이 힘든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부자가 망해도 3대(代)는 먹고 사는 법이라는데 아미파는 중원에 이름을 알릴 정도로 꽤 오랜 전통을 가진 문파 아닙니까? 소림과 무당도 이렇게 힘들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다… 스님들이 불법(佛法)을 따르지 않고 무림의 율법을 쫓으며 살던 과거의 일이지요. 화무백일홍 인무천일호(花無百日紅 人無千日好)라 하지 않습니까? 스러져가는 아미를 다시 되살리고자 소승도 한 때 부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과거 아미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이 제게 준 멸마사태(滅魔師太)란 허명에 취해 무력을 휘두르며 스님이 아닌 무림인이라는 정체성에 빠져 외도(外道)를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제 오른팔이 잘린 건 제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그 멸마사태라고? 마두들만 보면 눈이 뒤집어져서 대화가 아니라 우선 검으로 팔과 다리부터 잘라버리고 다녔다는?’
그녀가 보여준 것은 가사에 감쳐줘 있던 팔이었다. 그녀의 팔은 팔꿈치 부분까지 잘려있었는데 팔이 잘려져 나간 때가 오래되었는지 끝은 진작에 다 아물어 있었다.
“어쩌다가 그런…….”
“소협, 무명(武名)에 취하면 언젠가 세상이 모두 내 발 아래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본인이 자만하는 걸 깨우치지 못하면 그 못남을 깨우치라고 시련을 줍니다. 저는 그 시련에 저항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그걸 제 능력으로는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가를 저만 치르면 좋으련만 불민한 저로 인해 그 짐을 아미의 제자들까지 지게 하고 말았어요. 적당히 허명을 취하고 그걸로 아미파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게 내실을 튼튼히 했어야 했는데…명성이라는 마구니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장문인이라는 위치라 어디에도 자신의 속을 풀어놓을 수 없었던 노승은 우연히 만난 나에게 무슨 연유인지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풀어냈고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때론 통쾌해하며 웃고 때론 슬퍼하며 눈물지었다. 그녀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밖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아이들이 깰 시간이군요. 화 소협은 이만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정신없이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 버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벌써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니.”
“젊음도 그와 같지요. 평생 함께할 것만 같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자기 혼자 휙하니 떠나버린다는 점에서…소협은 저와 같은 우를 범하지 마시길.”
손님을 배웅하고자 문을 열어주며 말하는 노승의 표정에서 깊은 회한과 아쉬움. 후회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올 때는 밤이기도 하고 크흠… 몰래 찾아뵙느라 제대로 보질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아미파 주변엔 나무가 정말 많네요.”
“선사(先師)들께서 좋아하셔서 매실나무를 주변에 참 많이도 심어놨지요. 이 사천에서 아미파처럼 매실나무가 많이 나는 곳도 없습니다. 워낙 매실이 많이 열리다 보니 매실차를 담가 먹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요. 물론 그래 봐야 굶주린 배도 채울 수 없지만…그래도 다행히 화소협께 매실차를 대접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덕분에 차 잘 마셨습니다. 다음에 찾아올 땐 오늘 배운 가르침과 차에 대한 값을 두둑히 챙겨서 돌아오도록 하지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화소협께 이야기를 해서인지 그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큰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찾아오세요. 대신 그때는 오늘처럼 몰래 말고 정문으로 제대로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호호호.”
“…몰래 찾아왔던 것에 대해선 진심으로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슬슬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멀리서 느껴져 서둘러 멸마사태에게 인사를 드리고 경공으로 조심스럽게 경내를 빠져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시죠? 어제 오후에 가셨던 분이 아침이 되어서 돌아오셨네? 어떻게 밤새~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요? 여승들 따라가서 뭐가 그렇게 재밌으셨나 몰라?”
숙소에 있는 다진이는 일찍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잠을 안 잔 것인지 팔짱을 끼고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꼭 바가지 긁는 내 반려같군. 조심하게. 자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차후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으니 되도록 불리한 발언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건 인생의 선배가 해주는 조언일세.]
‘응?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어? 다진아. 아까…가 아니라 어제 잘 들어갔지?”
“예~ 아까가 아니라 어제! 누가 친절하게 미리 안전히 숙소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람을 챙겨주셔서요. 덕분에 아주 편~하게 숙소로 돌아왔답니다. 어!제!”
분명히 다진이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았는데 다진이가 하는 말은 어째서인지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무공도 안 배운 애가 말에 무슨 기세가 실리는 것 같아.’
[아녀자의 원한은 천년을 가는 법이라네. 아주 독하지. 고수가 살기(殺氣)를 뿜어낼 수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신기하게도 타고난 것인지 원기(冤氣)를 내뿜곤 해.]
‘우리 다진이는 그런 애 아니거든?’
[나도 그렇게 착각하던 때가 있었지. 그땐 내 반려도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아니, 그건 콩깍지가 씌였던 시절 나의 착각이었을까.]
“용.운.님? 밤.새 놀고 오셔서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영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 같은데.”
‘야! 비아, 너때문에 정신 팔려서 대화에 집중 못하니까 다진이 화났잖아.’
[글쎄~ 그게 과연 나 때문일까? 후후후. 곰곰이 잘 생각해보시게. 다진 양이 화가 난 이유가 나 때문일지. 생각난 김에 나도 내 반려 좀 챙겨야겠군. 역경을 잘 이겨내길.]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데 일조해놓고 비아가 책임감 없이 떠나자 나는 폭풍을 혼자 맞서야 하는 것처럼 고독한 기분이 들었다.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내쉰 작은 한숨은 다진이의 길고 큰 폭풍 잔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아니! 도대체 지금까지 뭐하고 돌아다니느라 지금까지 은월을 통해서 연락도 안하고! 어? 사람 걱정하게! 사천 땅에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하오문이랑 은월 빼고 누가 있다고! 난 혹시나 그 당문인가 하는 곳에서 암수를 쓴 건 아닌지, 독에 당한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고! 여태까지 누구는 잠도 못 자고 기다렸는데!”
“미, 미안해. 다진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인터스텔X의 남자주인공이 먼 과거의 자신을 지켜보면서 ‘No’를 외쳤던 것처럼 나는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안돼! 그러면 안돼!”를 외쳤다. 뒤늦게 상상으로만.
여자를 만나본 적 없는 모태솔로였을 시절엔 이해하지 못했다. 커뮤니티에서 가끔 “미안해”로 시작되는 알고리즘에 탄식을 내뿜는 수많은 남자들의 댓글들을.
‘미안해’로 시작한 알고리즘은 ‘뭐가 미안한데’로 이어지고 두가지의 옵션으로 나눠진다. 바로, 미안한 이유에 대해 그 이유를 ‘몰라.’와 ‘알아.’라는 대답으로. 그러나 어느 쪽도 해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는 묵비권 행사는 화를 더 키우기에 대답을 아니할 수도 없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라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 대화로 뭘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당신은 틀렸다. 여자를 화나게 만든 그 순간부터 남자는 잘못한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면 당신은 아직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연애고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요. 용운 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말도 없이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하다고 했지.”
“제대로 잘 대답하셨군요.”
본인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는지 게사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납득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런 게사르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게사르, 연애고자였구나. 너도 정말 많이 깨져야겠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어느 교수의 저서도 있었지만 나는 절대 공감할 수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깨져야 청춘이다. 어리고 모난 돌은 세상에 굴러 나와 끊임없이 깨지며 알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으며 자신이 단정지어 말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사실은 본인이 무지했음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신보다 어린 또 다른 모난 돌들이 자신처럼 깨지면서 배울 것을 떠올리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를 전하게 된다. 지금의 나처럼.
“너도…앞으로 갈 길이 멀겠구나. 에휴.”
“아니~ 지금 용운 님 이야기 하고 있는데 왜 제 어깨를 두드리시는 겁니까. 그 한숨은 뭡니까.”
“그냥 안타까워서 그래. 언젠가 때가 되면 지금 내가 니 어깨를 두드렸는지 이해하는 날이 올거야. 확실한 건 그날이 오늘은 아니라는 거고.”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피곤하니까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자.”
“용운 님! 초절정고수인 저보다도 강하신 분이 뭐 하룻밤 안 잤다고 피곤합니까? 저한테 제대로 설명을 해주셔야죠. 설명을.”
“육체는 안 지쳤는데 정신적으로 지쳤어. 길고도 짧은 밤동안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좀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마주했더니…….”
“그게 무슨?”
나는 뒤에서 부르는 게사르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서둘러 응접실을 떠나 내 방으로 들어와 씻지도 않고 옷을 입은 채로 드러누웠다.
“근데 일단 자신만만하게 멸마사태에서 찻값을 두둑히 주겠다고 내뱉기는 했는데 아미파에 뭘 들고 가야 하지?”
비아는 아직 반려와 꽁냥꽁냥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대답이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뭘 가져가면 좋을까?”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비아도 돌아와 나는 침대에 누워 비아와 함께 브레인스토밍 중이었다. 한 인간과 한 존재의 지능과 지식을 한데 모아 아미파도 돕고 나도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상부상조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자, 다시 정리해보지. 아미파는 곤륜파처럼 꾸준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익원이 필요하고 자네는 아미파를 도우면서 데바 선문객잔처럼 사천에 자리잡을 수 있는 사업체를 구상하고 싶다는 거 아닌가?]
“맞아, 그거야. 그게 내가 원하는 거지. 근데 사천에서 뭘 팔면 좋을까 싶다는 거지.”
[후후, 자네는 아직 멀었구만. 답은 이미 나왔다네.]
“답이 나왔다고?”
[자네의 행보에 이미 그 정답이 있네.]
“내 행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