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영아, 그나저나 우리 정말 큰일이다. 이렇게 조금 시주 받고 올겨울은 어떻게 보내지? 안 그래도 사람들에게서 받는 시주도 이전같지 않은데 하필이며 그 악독한 풍가화의 도발에 내가 넘어가는 바람에… 미안해.”
“아니에요. 길을 가다 개똥을 밟았다고 해서 그게 미영(美花) 언니의 잘못은 아니죠. 그냥 오늘은 재수가 없었던 거에요. 그런 일로 사과하지 말아요.”
“영이 넌…마음 씀씀이만 보면 얼굴만 이쁜 게 아니라 마음도 보살(菩薩)이 따로 없어. 나는 덩치만 커가지곤…….”
“풋, 언니는 이럴 때 보면 정말 귀여운 거 알죠?”
“그러니까~ 덩치는 천축(天竺, 인도)에 있다는 코끼리처럼 커다란 애가 이렇게 소심한줄 누가 알겠어.”
“야, 애경(愛景)아, 너랑 나랑 쌍생아(雙生兒)야. 나보고 덩치 크다고 하면 그거 누워서 침뱉기다. 걔가 나만 욕한 줄 알아?”
“그, 그래도 얼굴은 내가 좀 더 이쁘거든?”
“후…내가 거울 살 돈만 있었으면 산 거울로 가장 먼저 니 얼굴부터 비춰 줬을거야. 정신차려. 너랑 나랑 엎어치나 메치나 같은 얼굴이야…에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거울 살 돈은커녕 당장 우리 아미파 식구들 먹일 식량살 돈도 없는데.”
약간의 농담을 주고받던 그녀들은 척박한 현실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회전목마처럼 모든 이야기의 귀결이 먹거리로 돌아갔다.
‘여기나 저기나 먹고 사는 문제가 고민이군. 그나저나 아미파 정도로 이름 있는 문파에서도 그렇게 먹고 살기가 어렵나?’
기대했던 매콤한 요리도 못 먹은 판에 사천에 더 있을 생각이 없었는데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냄새가 났다. 곤륜파와 그랬던 것처럼 아미파와도 교분을 쌓고 사천에서도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은 강렬한 냄새가.
“네? 차에서 차향(茶香)이 나는 게 당연하죠. 차에서 향기가 나지 않으면 그게 차입니까?”
“응?”
“방금 뭔 냄새가 난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그랬나? 음~ 차향이 좋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게.”
나도 모르게 흥분했는지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게 입으로 속마음이 비어져 나왔었던 것 같다.
다진은 아까부터 여승들을 보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홀깃홀깃 훔쳐보는 용운의 꼬라지에 살짝 짜증이 나고 있었다. 차를 입으로 마시는 건지, 코로 마시는 건지 영 정신을 못차리는 것도 그렇고 뭔 상상을 하는지 헤죽헤죽 웃기까지 하는 걸 쳐다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뭐하는 거냐고. 화용운! 아, 짜증나.’
그런 가운데 여승들이 일어나자 용운은 여승들의 뒤꽁무니를 당장이라도 쫓아나갈 것처럼 자리에서 들썩들썩거렸다.
‘진짜…도저히 못 봐주겠네.’
“용운님, 저희 오늘 일정은 더 이상 없는 거죠? 이만 숙소에 가서 쉴래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신 차리고 자신을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용운은 도리어 화색을 표하며 좋아하더니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닌가.
“어어, 그치? 그게 좋겠다. 아! 아니다, 게사르? 게사르가 다진이랑 같이 숙소에 가서 쉬고 있어. 가는 길에 위험할 수 있으니까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다진이에게 무슨 일이 없도록 잘 지키고. 나는 잠깐 할 일이 생겨서 어디를 들렀다 와야 할 것 같아.”
“예? 그게 무슨? 용운 님은 사천이 초행길이라고 하셨지 않습… 가버리셨네?”
용운이 기다렸다는 듯이 찻값을 지불하라고 그 와중에 은자를 탁자 위에 놓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다진은 기가 찼다.
“하?! 뭐야? 지금 나를 버려두고 여승들 따라서 가버린 거야?”
* * *
안 그래도 여승들의 뒤를 쫓아볼까 하던 차에 때마침 다진이 숙소로 가고 싶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용운은 부리나케 다점에서 빠져나와 기감으로 아미파의 승려들을 찾았다.
“다행히 금방 따라 나와서 멀리는 안 갔구나. 다행이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시내에서 멀어졌고 자칫 자신이 뒤를 밟는다는 것을 들킬까 싶어 기감으로 그녀들의 위치를 파악하며 멀찍이서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초상비(草上飛)를 발휘하여 따라갔다.
[자네, 지금 여승들 뒤를 몰래 따라가는 모습이 엄~청 변태같다는 거 알고 있나?]
‘그, 그런가? 근데 나는 그저 선의(善意)로 저들을 도울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 거지. 전혀 나쁜 뜻은 없거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도 있지.]
‘야! 그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저들을 어떻게 해꼬지하려는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먹을 게 부족하면 먹을 걸 지원할까 싶어 그 정확한 사정을 알아 보기 위함인데?’
[그으래? 그렇다면 거기에 어떠한 사심(私心) 한 조각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나?]
‘사람이 말이야. 물론 내가 자원 봉사 활동하러 다니는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완전히~ 사심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 맞지 맞는데. 절대 니가 말하는 그런 사심은 없다고.’
비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미파 경내(境內)에 도착해버렸다. 적당히 커다란 건물이 보이길래 서둘러 그 건물 위로 그림자도 보이지 않도록 날아가 바로 엎드렸다.
[근데 왜 그렇게 양상군자(梁上君子)처럼 기와에 바짝 붙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숨어있는 건가? 꼭 도둑질이라도 할 것처럼 말이야.]
‘그거야 사람들이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내가 여기 공식적으로 내 신분을 밝히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몰래 따라온 건데.’
[정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미파에서 자네의 진짜 신분을 밝히면 더 문제될 것 같은데. 아닌가?]
‘그것도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내가 천마인데.’
만약 경찰이 있어 지금 날 보고 현행범으로 체포했다면 법정에서 서술될 객관적인 사실관계란 아마도 ‘정파의 원수이자 대적(大敵)인 천마신교의 수뇌 천마는 우연히 한 음식점에서 아미파의 여승들을 만났고 뒤를 몰래 밟아 마침내 그녀들 말고도 다른 여승들이 잔뜩 있는 절에 잠입하였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현대인의 감성으로 서술해보니 이거 완전 범죄자네. 남북관계라는 상황으로 치환해보면 국방위원장 김정X이 길거리에서 만난 수녀들의 뒤를 쫓아서 수녀원으로 몰래 들어온 건가? 큭.’
상상에 상상을 더할수록 내 스스로가 파렴치한이 되는 것 같아 괜히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려고 하는 순간 내가 몸을 숨긴 건물 안에서 아까 시주를 나갔던 소용선자라는 여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오늘은 일이 잘못되어 생각보다 시주를 많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응? 여기가 대충 건물이 커서 몸을 숨기기 좋겠다 싶어서 온 건데 여기가 장문인의 거처였어? 엑.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한 문파의 장문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못해도 초절정의 경지일게 뻔한데 이 위에 오래 있다간 상황이 난처해지겠다고 싶어 다른 건물로 옮기려고 했는데 들려온 아미파의 장문인의 말에 살짝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니다. 내가 몸이 불편하여 예전처럼 직접 움직일 수 없어 너희들을 돕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게냐. 우리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인줄 다 아는데. 그리고 미영이와 애경이가 먼저 와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갔단다. 니가 잘못한 일은 없었으니 자책할 거 없다.”
“사형(師兄)들이 먼저 왔었군요…그래도 걱정이에요. 이대로 가다간 올겨울에는 먹을 게 부족해서 거둬들인 아이들이 많이 굶을지도 몰라요. 작년엔 흉년이라 먹을 게 부족해서 아이들이 많이 버려졌는데…….”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세음보살께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는데 무얼 걱정하느냐?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풀릴 거란다. 다 잘 될 거야.”
‘관세음보살님이 많이 바쁘신 것 같네. 아니, 관세음보살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한 단체의 수장이라기엔 너무나 순진한 종교적 발언에 난 반감이 일었다. 세상에 진정 신이 있어 인간을 불쌍히 여겼다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어린 아이들을 비롯해서 연약한 병자와 약자들을 돕고 불행한 사고를 겪어 생명을 위협받는 이들을 도왔겠지만 그런 기적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역사와 내가 경험한 인생에선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되었다. 어서 가서 쉬거라. 오늘 하루 종일 고단했을 텐데 내일도 다시 내려가려면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지 않느냐.”
“예. 스승님.”
안에서 인사를 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용선자가 거처 밖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와서 대충 돌아가는 상황도 알았겠다 소용선자의 발소리에 존재감을 지워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데 귓가로 전음이 날아왔다.
- 멀리서 오신 분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는지?
‘헉? 뭐야, 나 여기 있는 거 들킨 거야?’
[이거 흥미진진하구만.]
비아는 무슨 팝콘이라도 먹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신이 난 목소리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얼음땡 놀이를 할 때 술래에 잡히기 전 얼음을 외치는 것처럼 하려던 행동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 밤이라 따로 차려드릴 건 없고 내려와서 차나 한잔 하고 가시지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지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미 걸린 판에 뭐 어쩌겠나 싶어 스스륵 지붕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경우가 아닌 건 알지만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모든 게 부처님의 뜻이고 사람 마음 먹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아미파를 찾아준 분을 제가 손님으로 대하면 손님이 될 것이고, 못된 마음을 먹은 악적으로 여긴다면 악적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소협.”
내 귀엔 저 노승의 말이 “니가 손님답게 행동하면 나도 손님으로 대할 거고 난장 피우려고 온 거면 그에 걸맞게 도둑 내지는 마두로 취급할테니 알아서 신사답게 행동해~ 젊은이.”로 들렸다.
“하하,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남의 집에 찾아오면서 경황이 없어 선물도 ‘못’ 챙겨왔군요. 그나저나 매실차 향기가 정말 좋습니다.”
“작년에 담근 매실청이 정말 잘 영글었습니다. 올해 매실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노승은 부디 손님으로 대해달란 내 너스레에 장단 맞추며 가사(袈裟)가 걸쳐지지 않은 다른 쪽 팔만 꺼내서 찻잔을 준비하고 한 손으로 차를 따라주었다.
‘응? 차를 주긴 줄 건데 제대로 예의차려 주고싶지는 않다는 건가? 두 손이 아니라 한 손?’
차를 한 모금 머금자 매실향이 코를 스치는 가운데 찬찬히 노승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승은 목소리를 들어봐도 그렇고 하얗게 센 머리를 보면 꽤 나이가 든 것 같은데 피부는 그와 달리 팽팽했다.
‘신기하네. 무슨 스킨케어 제품을 사용하는 것도 아닐텐데…혹시 아미파 무공에 피부미용 기능이 같은 게 있는 건가. 주안술 같은?’
되도 않는 생각을 떠올리며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반대편에 앉은 노승이 입을 열었다.
“그래, 소협께선 아녀자들밖에 없는 이 절간에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아…그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당신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이렇게.]
‘그렇게 말한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주겠어?’
[까짓거 밑져야 본전이잖아?]
에라 모르겠다 싶어 비아의 조언 아닌 조언을 따라 솔직하게 말했다.
“…해서 어찌된 연유인지 알고 해결책을 드리고 아미파를 돕고 싶어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까?”
노승은 한 눈은 감고 한 눈은 뜬 채 나를 지켜보며 차를 후후 불어 마시곤 잠시 생각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