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사천요리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음식이 무엇이겠는가. 누가 봐도 색은 빨개서 매운 느낌을 팍팍 주는 음식들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가 기대하는 사천의 음식은 그러했다.
나온 음식들의 면면에선 도저히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냄새에서도 전혀 매운 느낌을 느낄 수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 백짬뽕처럼 겉보기에만 하얗고 사실은 매운 음식들일까 해서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몇 개 집어 먹어봤지만 역시였다.
“뭐야…하나도 안 맵네.”
물론 생강, 산초 등의 향신료가 들어간 덕분에 내가 원하는 매콤한 식의 매운맛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얼얼한 매운맛이 나긴 했지만 그보단 꿀이라든가 곡물을 졸여서 만든 엿같은 걸 많이 사용했는지 도리어 단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음식들이 맛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사천요리하면 떠올리게 되는 매울 거란 기대와 크게 어긋나는 음식을 먹어서인지 도무지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게사르와 다진은 입에 맞는지 잘도 먹어댔다.
“맛있냐?”
“네. 용운 님도 어서 드세요. 이거 회과육(回鍋肉)이라고 했나요? 이거 몇점 먹고 백주 한잔 마시면 입안이 싸악 개운해지는 게 좋네요.”
“양고기로 만든 요리들만큼은 아니지만 어향육사(魚香肉絲)라는 이 새콤달콤한 돼지고기 요리도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요.”
“촌스럽긴.”
압은 막아놓질 않아서인지 옆에서 지방 방송이 잠시 들렸지만 반응하려는 게사르에겐 내가 눈치를 줬고 다진이는 먹느라 정신없어서 탁자에 앉은 이가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 많이들 먹어라. 맛있다니 다행이네.”
‘왜지? 왜 이러지? 이 가게에서 할 수 있는 고급요리는 다 해오라고 했는데…왜 매운 음식이 없는 거야?’
음식점을 잘못 찾아왔나 싶어 게사르와 다진이 먹고 있는 동안 다른 음식점을 찾아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그새를 못 참고 당문의 여식이 쏘아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도 촌에서 와서 그러나 우리 사천의 요리가 입에 안 맞나 봐요? 그렇게 젓가락질 몇 번 하고 말 정도로?”
“음식이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내 듣기로 사천요리의 매운(辣)맛이 꽤나 유명하다 하여 기대를 품었는데 여기 나온 요리들이 내 생각처럼 매운 것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훗! 꽤나 사천에 대해 잘 아는 듯 떠들더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떠드는군요. 우리 사천요리에 산초가 들어가서 어느 정도 매운(麻)맛이 있다곤 해도 당신이 말하는 그런 매운(辣)맛은 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왜 끌려와서 여기 앉아 있는지를 그새 망각한 것인지 사천요리가 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당문의 여자가 잘난 척 떠드는 소리는 아혈(啞穴)을 지풍으로 막아 음소거 처리해버렸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읍읍읍.”
‘이 여잔 잡혀 왔으면서 겁도 안나는 거야? 정신 사납게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비아,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요리들 중에 아무리 봐도 궁보계정(宮保雞丁)이라든가 마라롱샤(麻辣龍蝦)라든가 마파두부(麻婆豆腐)랑 비슷한 요리들은 안 보여. 딱 봐도 맵고 칼칼한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요리들 말이야.’
사람들 앞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순 없어 비아의 음성기능을 통해 검색한 정보를 전달받았는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미리 알아보지 않아서 생긴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자네가 있는 이 세상이 자네가 있던 세상의 과거와 역사적 진행이 일치하지 않기는 하지만 일단은 비슷하다는 가정으로 본다면 아직 이 시대에는 고추라는 작물은 사천지방까지 들어오질 못했네. 자네가 말한 마파두부라는 음식도 청나라 시대는 되어야 나오는 음식이고. 다른 음식들도 마찬가지야.]
‘한국인이 좋아할 법한 사천요리라는 게 아직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이야기?’
[자네가 생각하는 사천요리라는 것도 아마 사천요리를 한국인들의 입맛 취향에 맞게 로컬라이징하여 만든 게 아닐까 싶네만?]
전생에 중국에 직접 여행을 가서 사천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비아의 짐작이 맞을 것 같았다.
‘그래도 뉴욕에서 먹었던 쿵파오 치킨은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아! 생각해보니 이것도 궁보계정을 서양식으로 바꾼 거니 내가 직접 만들거나 포인트로 사먹지 않는 이상 먹을 수가 없겠구나. 칠리새우는 기대도 하면 안되겠네. 이런 내륙지역에 신선한 새우를 배송할 방법은 있을 리도 없고.’
뭐에 하나 꽂혀서 시야가 좁혀지면 안된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게 된 계기였다고나 할까. 굳이 사천으로 오는 것에 기대를 품을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았다.
‘기대했는데 굉장히 실망스럽네.’
물론 탁자를 가득 채운 요리들도 못 먹을 만한 음식들은 아닌지라 쉬지 않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긴 했지만 기대한 매운맛과는 다른 맛들이라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립다. 그리워.’
[그렇게 아쉬우면 오늘은 양념치킨 먹는 각인가? 치콜 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4만 포인트가 뉘집 애 이름이냐. 4만 포인트가 10번이면 40만이고 100번이면 400만이야.’
[쳇. 그깟 4만 포인트 천번을 아껴도 고작 4천만 포인트네. 그거 아낀다고 자네가 당장 원래 있던 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
‘이거 왜 이래? 티끌 모아 태산인거 몰라? 그래도 그동안 아껴쓰고 의약품도 만들고 한 게 몇 번 대박 터져서 지금은 4억 포인트나 넘게 모았다고.’
[그거 아껴서 퍽이나 부자 되겠네. 정말.]
‘지금은 일단 이 요리들이나 먹으면서 대리만족하자고. 내가 원하는 매운맛은 아니지만 얼얼한(麻) 맛도 어찌 됐건 매운맛은 매운맛이니까.’
옆에서 읍읍거리는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길래 젓가락으로 심심한 음식들을 먹으며 젓가락으로 내공을 날려 아혈만 풀어줬다.
“그쪽은 그렇게 사천요리가 별론가요?”
“좋아요. 좋은데, 그래도 그 중에는 이 백주가 가장 좋군요. 향기롭고 독한 게. 난동을 피우지 않고 가만히 있는 조건으로 당신을 풀어줄테니 우리의 식사시간을 망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리죠.”
귀주(贵州)의 모태주(茅台酒)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천을 대표하는 술에는 오량액(五粮液)이라든가 수정방(水井坊)같은 유명한 이름의 술들이 있긴 했지만 사실 이 술들은 오랜 세월동안 같은 이름으로 전통을 지닌 채로 내려져 온 게 아니라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술이었다.
애초에 명나라 때는 오량액이니 수정방이니 하는 이름을 가진 술들은 없었다. 문화대혁명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고 부숴버린 중국에서 다시금 현대에 이런 술들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나마 남아있는 과거의 유산을 찾아내 먼지를 쓸어내고 다시금 복원을 한 덕분이었으니 이 시대의 백주가 현대의 중국인들이 마시는 술보다 맛이 없을 수는 없었다.
‘마오타이(모태주)는 된장 같은 냄새나서 내 입맛에는 별로였어. 술에서 된장 냄새라니… 으… 다행히 지금 마시는 이 술은 농향형인 것 같네. 청나라 시대에나 나오는 이과두주 같은 청향형 백주야 아직 탄생했을 리가 없고.’
원나라의 증류기술 도입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시대에 크게 발전한 백주는 현대에 와선 그 향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분류했다. 이 세가지란 장향(酱香)형, 농향(浓香)형, 청향(清香)형을 말하는데 장향형 백주란 장(酱)이라는 한자의 의미 그대로 된장이나 간장같은 장의 향기가 나는 백주를 말했다. 장향형 백주에선 마오타이주가 가장 유명했다.
농향형은 화려하고 복잡한 과일 향 내지는 꽃향기가 나는 게 특징으로 오량액이나 수정방같은 술이 바로 농향형 백주다. 마지막으로 청향형은 깔끔한 맛과 함께 싼 값이 특징인데 중국집에서 파는 속칭 ‘빼갈’이라고 부르는 술이 바로 이 청향형 백주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었다.
‘빼갈하니까 옛날 생각나네.’
용돈이 풍족하지 않았던 대학생 때 대학 선배를 통해 알게 된 대학교 앞 중국집에서 파는 싸고 양 많은 탕수육과 거기에 곁들이는 이과두주의 조합은 술맛이 뭔지 알게 해주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대학교 앞 음식점들이 그렇듯 다른 지역의 음식점들에 비해 값은 싼데 착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양의 탕수육을 주는 가게 아저씨의 인심 덕분에 이과두주를 몇 병시켜서 마시면 기름진 탕수육과 어울리는 술을 마시면서 굶주린 배도 채우고 쉽게 취할 수도 있었다.
1병에 125ml 밖에 안되는 분량이라 360ml인 용량을 가진 소주랑 비교하면 3분의 1 정도로 양이 적긴 했지만 이과두주는 그래도 값은 소주랑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었고 도수가 55도 정도로 높아 조금만 마셔도 소주를 마시는 것에 비해 쉽고 빠르게 취할 수 있는 고마운 술이었다. 그런데다 많이 마셔도 다음날 숙취가 별로 없으니 내가 생각하기엔 가난한 대학생을 위한 술은 맥주도, 막걸리도, 소주도 아닌 이과두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같이 마시던 놈 하나가 취해선 어떻게 술이 이렇게 쌀 수가 있냐면서 이거 짝퉁 아니냐고 했다가 중국집 주방장 아저씨가 듣고서 잘 알지도 못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이과두주에 대해 일장연설을 토했지.’
주방장이자 주인인 아저씨의 일장연설 덕분에 이과두주가 워낙에 싼 값에 만들어지는 술이라 굳이 짝퉁을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익도 나지 않는 술이라 이과두주는 짝퉁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무튼 이과두주와 똑같지는 않지만 백주에서 나는 향기에 나도 모르게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한때를 되짚고 있는데 다시금 잡음이 들려왔다.
“이, 이런 잡곡주 따위가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고 지금의 나로선 붙잡고 연연해할 기억이 아니라 잊어야할 기억들인지라 툭 털어버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미래에 오량액이 그 이름을 갖게 된 썰을 대충 인용해서 그 잡음에 답했다.
“농민들이 땀 흘려 키운 옥수수, 수수, 쌀, 찹쌀, 밀의 진액을 이렇게 느낄 수 있는데 소저의 말대로 그저 잡곡주 따위라고 저평가하기에는 오곡을 키워낸 농민들의 노고와 이런 명주를 빚어내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을 양조가들에게 너무 안타깝고 미안하군요. 오곡…그래, 오곡의 진액을 모아 만든 술이라는 의미로 오량액(五粮液)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데. 소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량액이라… 좋네가 아니라 뭐,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체. 쳇.”
술맛이 어떻냐는 자신의 평범한 질문에 어울리지 않게 퍽이나 학자적 감성이 묻어 나오는 대답을 듣게 되자 당추향은 현재 반(半)납치(?) 상황인 것도 옆에 앉아 술을 한 모금 삼키는 남자에게 살짝 넘어갈 뻔했다.
‘뭐야…이 남자.’
고개를 돌려 이제야 제대로 보니 남자의 외모는 여태껏 무림인들에게선 보지 못했던 전혀 무인답지 않은 부드러운 분위기의 외모인데다 햇볕을 쬔 적이 없는 것 같은 하얗고 탄력이 느껴지는 듯한 투명한 피부 때문에 무공과는 거리가 먼 백면서생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외모와 반대로 이 남자가 가진 무력만 보면 당문의 직계인 자신조차 자주 경험해본 적 없는 드문 강자인 게 분명했다. 그것도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잘났다고 떠들던 남자들을 비롯해 객잔 내부의 손님들이 눈치를 보며 침도 함부로 못 삼키게 할만큼의 강자.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분명 무림인이란 놈들은 고수일수록 먹물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이 오직 무공수련만 해대는 잔인한 말종들이라 돼지나 소를 칼로 토막내서 해체하는 도축업자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 도축업자 놈들 천지라고 했건만 이 남자에게선 그런 천박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둥그런 탁자 건너편에서 무미건조했던 추향의 눈빛이 촉촉하게 변화하고 입술에 침을 바르는 꼴을 보고 다진은 용운의 설명을 듣고 음미하고 있던 술잔을 내려놨다.
탁.
‘저거 눈빛이 마음에 안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