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내 딴에는 도움을 주고 싶어 꺼낸 말이라도 듣는 당사자의 입장에선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기에 넌지시 에둘러 게사르에게 앞으로 선문객잔의 수익 일부로 곤륜파를 후원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꺼냈다. 그랬더니 게사르는 내가 걱정한 게 바보 같았을 정도로 허무하게 너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죠! 안 그래도 장문인께서 이번 겨울은 어찌 보내야 할지 엄청 걱정하셨는데 정말 잘 됐습니다.”
“있잖아. 다 좋은데 아직 이야기가 다 안 끝났으니까 끝까지 듣고 말해줘.”
까짓거 100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입고 먹을 정도의 돈이라면 충분히 객잔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지원하는 건 상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선 곤륜파는 과도한 부채감으로 인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날로 먹으면 고마운 줄 모른단 말이지. 호의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 권리인 줄 착각하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기도 하고, 갑자기 졸부가 되어버리면 순박한 곤륜파 사람들이 타락할 수도 있는 거고. 이런저런 걸 따져 생각해보면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건 하책이야.’
부모님께 물려받은 땅이 수용되면서 엄청난 보상금을 받게 되어 형제끼리 의가 상하고 법정다툼까지 하는 사례들의 경우를 떠올려 본다면 노력 없이 갑작스레 외부에서 나타난 부(富)가 사람 간의 관계를 망치는 화근(禍根)이 되는 경우는 허다했다.
“…그래서 곤륜파의 일부 인원을 데바 선문객잔에 파견하는 조건으로 곤륜파와 데바 선문객잔이 일종의 협약을 맺자는 거지. 곤륜파는 객잔에 사람을 보내서 고정적으로 설과를 만들 노동력을 제공하고 우리 객잔은 곤륜파가 제공하는 노동력의 대가에 좀 더 후의(厚意)를 얹어 보답하는 방식으로.”
“가, 감사합니다! 용운 님. 스승님께서 용운 님을 만나러 가라고 한 건 역시 곤륜파의 복이 맞았습니다.”
“좋게 생각해주면 내가 더 고맙고.”
“아니지요. 이건 곤륜파가 더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당장 가서 장문인께 운을 띄워 보겠습니다. 분명 용운 님의 제안을 장문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게사르는 자신이 스승과 지내던 거처에 다진이와 나를 남겨두고 말릴 새도 없이 서둘러 뛰어갔다.
“게사르가 엄청 좋아하네요. 그냥 돈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객잔에 사람을 보내서 그들이 일을 하면 그에 대해 후하게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일 뿐인데.”
“곤륜파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지. 설과를 만드는 요령을 배우면 게사르의 경우처럼 내공 수련에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곤륜파가 계속적으로 풍족하게 지낼 수 있는 수익원이 생기는 셈이니까.”
“원래 용운 님은 줄 때 확실히 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어요? 이건 줬다 뺏는 느낌? 그것도 아니면 주긴 주는데 확 주는 것 같지 않은 느낌? 뭐 그런 느낌인데.”
“네 말도 맞아. 근데 그렇게 맘껏 퍼주려고 해도 곤륜파와 우리는 그 경우에 맞지 않아. 우리와 곤륜파는 아직 서로 관계에 대한 정립이 다 끝나지 않았어. 기껏해야 게사르가 우리의 신뢰관계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상황이고 뜬금없이 나타난 우리가 ‘앞으로 곤륜파가 먹고 사는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돈을 꾸준히 주겠다. 그러니 행복하게 잘 써라.’ 하면 곤륜파 입장에선 엄청 이상하지 않겠어?”
“아! 이들 입장에선 사기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뭐 이런 거죠?”
“그렇지.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는 호의로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건데 상대방이 호의보단 부담을 먼저 느낀다면 그건 선물이 아니게 되기도 하고.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고마워야 선물이지 받는 사람이 솔직히 받기 싫은데 억지로 강제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
곤륜파와 내가 오랫동안 신뢰관계도 쌓지 못한 상태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내는 일방적인 기부는 전통을 가진 단체인 곤륜파의 입장에선 모욕감을 느껴 반감을 살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러니 너무 일방적인 수혜를 제공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장문인이 사람 좋아보여서 그렇게 오해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랑 집단과 집단의 관계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어. 장문인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지도자잖아. 아무래도 집단을 이끄는 수장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
“그렇군요. 개인으로서 감정적으로 하는 판단과 집단의 수장으로서의 이성적 판단은 다를 수 있다는 걸 간과했어요.”
다진이는 내가 그밖에도 몇가지를 짚어주자 좋은 게 좋은 것일 수만은 없는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아, 머리 복잡해. 우리 그러지 말고 게사르 올 때까지 찍어놓은 영상이나 볼까요?”
“무슨 영상?”
“아까 족구하는 법 시연하고 나서 곤륜파 사람들 족구하는 장면이랑 용운 님이 배구장 만들고 혼자서 배구하는 법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들 찍어놨거든요.”
“그걸 찍어놨어? 어디 한번 보자.”
영상들을 모두 훑어본 나는 너튜브 조회수로 포인트를 벌 생각에 환장한 사람으로서 이 영상들을 그냥 추억으로만 남기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진아, 잘했다. 진짜 잘했다.”
“제가 잘한 거예요? 용운 님이 이런 거 촬영하는 걸 좋아하니까 혹시나 싶어서 사람들 모르게 조심히 찍어 봤는데.”
“아냐, 그래서 더 좋아.”
“헤헷. 더 쓰다듬어 줘요.”
“얼마든지. 아이구 우리 다진이가 아주 이쁜 짓을 했어. 우구우구.”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열심히 영상을 찍어둔 다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자 다진이가 무척이나 좋아하길래 둘이서 그렇게 서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게사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쳇, 뭐 이렇게 빨리 왔어. 좀 천천히 오지.’
“용운 님~ 우리 우리 용운 님~”
“이상하게 얄밉네요. 한 대 꿀밤 세게 때려주고 싶을만큼.”
“동감이야.”
게사르의 말을 들었는지 함께 온 장문인의 낯빛은 화색이 만연해서 아까 족구를 하면서 갖은 아부를 들을 때보다 더 밝아 보였다.
‘이 사람, 이렇게 밝은 사람이었나?’
“용운 님께서 게사르를 통해 주신 제안을 들었습니다. 이게 사실인지요?”
“예. 혹시라도 장문인과 곤륜파에 폐가 되었다면 죄송…….”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저 식충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가 제겐 항상 고민이었는데 용운 님의 제안을 들으니 어두운 폭풍 속에 한줄기 빛이 내린 느낌입니다.”
다행히도 장문인은 일개 객잔과의 협약임에도 혹여 내가 말을 바꿀까 싶어 어서 계약을 맺고 싶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장사꾼은 못될 사람이네.’
문도들을 걱정하는 장문인은 내가 만약 진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교의 교주나 세상을 뒤흔들 흑막이었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계약하죠.”
은월이 있어 그다지 중요하진 않았으나 장문인의 요청에 의해 계약에는 곤륜파가 객잔을 지켜줄 보호 인력을 제공할 의무와 책임을 지는 사항이 추가되었고, 이를 위해 곤륜파에서 정기적으로 1,2대 제자들을 객잔으로 보내 교대로 파견하는 것으로 계약이 마무리되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장문인.”
“허허, 니 말을 듣고 계약에 인장까지 찍고 나니 마음의 한 짐을 던 느낌이구나.”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천관자 사형께서 우화등선하기 전에 정말 곤륜파를 위해 큰일을 해주었어.”
“크읍. 흑.”
북받쳐하는 감정에 눈물을 보인 게사르의 어깨를 두드리며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게사르야. 앞으로도 사형이 남긴 유명(遺命)을 잘 지키거라. 용운 님이 타락하거나 사람에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잘 도와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용운 님을 따를 것입니다. 분명 스승님께서 그리하면 세상의 도(道)를 지켜 곤륜 역시 세상의 풍파에서 안전해진다고 하셨으니까요.”
이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곤륜파의 장문인이 이 같은 계약을 서둘러 맺은 것은 용운의 생각처럼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게사르가 장문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경지를 제대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어떻게 영약을 섭취하지도 않고 절정고수를 뛰어넘어 초절정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게사르가 설과라는 것을 만들면서 용운으로부터 배웠다는 비의(秘意)를 곤륜의 제자들이 배운다면 씨가 말라 구경조차 어려운 영약이 없이도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배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약간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남자고 여자고 구분할 것 없이 곤륜파의 제자들은 공과 네트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족구와 배구에 푹 빠져들었다. 곤륜파의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무공을 수련하면서 쌓은 심화(心火)가 알게 모르게 쌓이는 기분이었는데 공을 세게 후려칠 때마다 그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나 뭐라나.
게사르가 제대로 비행을 할 수 있는 요령을 익히는 동안 계약서를 객잔에 전했고 데바 역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용운이 거둔 수익에서 비용을 처리하여 명문정파에서 객잔을 지켜줄 것이라고 하니 무척이나 든든해하며 좋아했다.
“이제 진짜 가보자.”
“옙.”
“원래 가려고 했던 때에서 2주가 더 걸렸네요.”
‘사천의 매운 음식이 먹기가 이렇게 어렵나 싶다.’
마라의 얼얼매콤한 맛이 나는 사천 음식이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자고로 여행에서 식도락(食道樂)은 여행이 객(客)에게 주는 가장 큰 기쁨이 아니겠는가.
여신봉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출발을 하자 봉우리 아래로 우리를 본 곤륜파의 문도들이 두 손을 번쩍 들고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곤륜에서 보낸 시간은 재밌었어요.”
“나도.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같이 공을 차고 때리고 노는 게 이토록 즐거웠다는 걸 잊고 있었어.”
그런 두 사람의 오붓한 비행을 뒤에서 따라가며 계속 봐야 하는 게사르는 자신도 모르게 푸념이 터져 나왔다.
“아주 깨가 쏟아지네. 쏟아져. 누구는 옆구리가 시린데…아직 겨울도 아닌데 세상이 춥구나.”
용운의 도움으로 따뜻하게 옷을 입은데다 초절정고수의 무위가 있어 육체적으로 추위를 느낄 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추웠다.
세 명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사천으로 이동하는 동안 김PD는 용운이 업로드한 영상 소스들을 부지런히 가공해서 채널에 업로드를 했다.
“슈퍼 히어로가 하는 공놀이 영상이라니…이건 좀 귀하네. 이건 2편으로 나눠서 올려야겠다. 1편은 족구편. 2편은 배구편.”
구독자들은 곤륜파의 제자들을 만나 족구를 가르치고 곤륜파의 제자들이 족구를 하는 영상을 보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 족가고학! 미치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도 부대에서 대대장이 족구할 때 다른 장교들이 아부하면서 저렇게 말하는 거 들은 것 같은데 그때 생각나네.
- 군인들 짬족구 무시 못하지. 특히나 간부들은 오랫동안 족구해서 어린 병사들보다 잘하는 중년 아재들 많잖아. 배 잔뜩 나온 우리 급양관은 평소엔 행군도 힘들어하면서 족구할 땐 날라다녔음.
- 아재들, 군대 이야기 이제 그만~!
- 섭섭하네. 남자들 3대 술자리 소재인데.
- 됐고, 마교 교주가 우리 정파들을 고작 족구로 꼬시냐고. 정파놈들 정신 차려!
- 천마들 맨날 쌈박질하고 다니는데 뭐하러 그러냐고. 고개를 들어 천마TV를 봐라 이게 앞으로 천마들이 중원을 지배하는 법이니까.
- 앞으론 이게 M.C.U(Murim cinematic universe)다.
- 맞네. MCU. ㅇㅈㅇㅈ
- 그나저나 다음에 올라온다는 2편은 진짜 재밌을 거란 편집자 댓글 보고 나만 기대돼?
- ㄴㄴ. 집자 자막 센스 보면 나도 기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