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궁금한 게 뭔데?”
“용운 님은 객잔으로 번 돈을 왜 이런 곳에 쓰십니까? 아이들이 먹을 거, 입을 거 등등 이 많은 아이들을 전부 거둬서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이 적은 돈은 아니잖습니까? 이런 희생을 왜 하시는 겁니까?”
게사르의 궁금함이 일견 이해는 됐다. 아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개념조차 나오지 않은 세상이니 번 돈의 일부를 덜어내어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내가 다시 태어난 이후로 한동안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일월신교의 교주로 모든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하게 된 걸까?’라는 생각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일종의 거래가 있긴 했지만 중세시대에 마음 편하고 즐겁게만 살라는 거였다면 적당히 잘 사는 집에 태어나게 해줬을 거였다. 어차피 이 시대는 변화가 빠른 세상도 아니었으니 한 세대를 살아가는 동안 물려받은 걸 잘 지키고 물려주기만 하면 되는 시대였다. 그러니 굳이 현대인으로서의 자아를 가질 필요도 없어 딱히 내 기억을 유지시켜줄 이유가 없었다. 비아의 말에 따르면 저승사자든 신이든 누군가 환생을 시키는 과정에서 ‘망각’이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않은 것. 이는 법률 용어로 말하자면 의무를 회피한 것으로 ‘부작위(不作爲)’라고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로 내 삶의 기준은 공정한 거래가 되었다. 가족이 아닌 이들과의 관계에서 난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줬다. 호의를 받았다면 호의로, 월급을 받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성실한 노동으로.
그런 나였기에 산골짜기에 처박힌 망해버려 그 집단을 다시 일으켜야 할 책임을 가진 수장으로 다시 태어난 걸 처음엔 사기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머물게 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가 노력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거기엔 이전에는 잃어버렸던 혹은 포기했던 부(富)와 인간관계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얻은 행복한 기억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거래’를 통해 환생한 내가 현대인으로서의 기억과 함께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스마트폰이라는 비장의 아이템에서 비롯된 거였다.
‘아무리 내가 현대인이라고 해도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많은 부를 누릴 수도 없었겠지. 기껏해야 이 시대의 사람들이 모르는 얄팍한 지식으로 약간의 부는 누릴 수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내가 얻은 게 더 많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테니 거래의 균형추가 내쪽으로 심하게 기운 게 맞아.’
혹자는 이런 내 생각을 듣고 내 앞에서 의문스러움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는 게사르처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가치 기준이었던 ‘받은 만큼 돌려준다.’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게사르에게 그런 내 사고방식을 일일이 전달하여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난 지금 내 돈을 길바닥에 버리고 있는 게 아니야. 미래에 가치가 크게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투자 가치가 있는 대상에 소액의 투자를 하고 있는 거지. 상인이 언젠가 가치가 오를 것에 돈을 쓰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봐. 저 아이들에겐 이젠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어. 나는 저 아이들에게 얼마든지 돈으로 저들의 진짜 부모보다 더 좋은 부모가 되어줄 수 있어. 그리하면 내 입장에선 얼마 안되는 푼돈으로 저 아이들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거지. 이 얼마나 남는 장사야?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하는 말이라면 죽으라는 말이 아닌 이상 무한히 신뢰하고 따르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줄 ‘사람’이란 자산이 남아. 그것도 내가 지원한만큼 성장한 능력을 가진 훌륭한 인재가 되어 있는 자산이. 전부가 그렇게 되지 않아도 일부만 내가 생각하는 수준의 인재가 되어 있다면 이건 남는 장사야.”
“…….”
동아시아의 독재자들처럼 굳이 세뇌를 시킬 필요도 없었다. 한 10년 정도 투자해서 저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킨다면 나에겐 미래의 인적 자원이 확보가 된다. 설령 저 아이들이 모두 날 위해서 일하지 않아도 나에겐 우호적인 집단이 되어줄 터였다.
“적은 돈을 투입해서 큰 수익을 얻는 건데 이걸 왜 안해? 난 막상 일을 벌이려고 해도 사람이 없어서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 그렇다고 아무나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아. 믿을 수 있고 믿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으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낭비가 아니라 투자야. 황금을 잔뜩 사서 10년 묵힌다고 한들 저 아이들에게 투자한 것에 비해 가치가 더 크게 오를 것 같지는 않은데? 돈은 모아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 모셔두는 게 아니라 능력이 된다는 전제 하에 최대한 많이 ‘순환’을 시켜야 해. 그럼 눈덩이가 굴러서 커지는 것처럼 더 많이 늘어나게 되거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내가 직접 일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지는 날이 올 거야. 내가 키운 아이들이 그 체계를 운용하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날이 오겠지. 그때가 오면 난 영원히 일하지 않고 편하게 놀면서 즐기면서 살 수 있어.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들과 후손들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거고. 난 그 날이 최대한 빨리 오길 기대하며 투자한 것뿐이야. 이제 이해가 돼? 상인으로서 내가 확실히 돈이 되는 장사를 했다는 거.”
게사르는 돈에 미친 수전노(守錢奴)처럼 엄청나게 차갑게 말하고 있는 용운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장사꾼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시는 것치곤 아이들하고 있을 때 너무나도 행복해하시는 거 아닙니까? 백아라는 아이가 끌어안을 땐 좋아 죽던데요…당신은 정말 솔직하지 못한 사람, 아니 용이시군요.’
용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있던 중 게사르의 마음 속을 스치듯 와닿는 개념들이 몇가지 있었다. 이를 정리하자 하나의 문구가 되었다.
‘체계를 만들어 순환시키면 결국 자연히 그렇게 되리라…그야말로 노자께서 말씀하신 무위자연이 아닌가? 아! 끊임없는 순환!’
그리고 그 문구는 게사르에게 깊이 다가와 깨달음이 되었다.
“아니…얘는 또 왜…기껏 예쁘게 설명해줬더니 경지가 오르는 건데! 에휴, 나도 좀 쉬려고 했더니만. 피곤하게 만드네. 내 팔자야.”
부공삼매의 상태에 빠진 게사르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혹여 누군가 와서 건드리거나 큰소리를 내면 깨달음의 순간이 깨져버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주변에 있는 은월의 대원들에겐 전음으로 게사르가 깨달음의 순간에 빠졌음을 알리고 혹시 아이들이 깨더라도 이 주변으로 오지 않도록 안내할 것을 지시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내뱉은 용운의 나지막하고 조용한 불평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동안 게사르의 입가엔 부처의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닮은 미소가 남았다.
“이게 다 용운님 덕분입니다.”
“어, 그래.”
경지를 드높일 깨달음을 줬음에도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퉁명스럽게 구는 용운을 바라보고 게사르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게 읍했다.
“내가 뭐 했다고 그래. 니가 알아서 경지가 오른 건데.”
“용운님이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절정고수의 벽에 다다를 정도로 내공을 채우지도 못했을 것이고, 용운님의 깊은 깨달음을 듣지 못했다면 초절정고수라는 경지에 이렇게 쉽게 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산에서만 지냈다면 아니, 용운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최소 20년을 수련은 했어야 가능할까요? 그러니 현재의 제 경지는 용운 님 덕분이지요.”
“에헤이, 너 일하기 싫어서 지금 아부하는 거지?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설과 만드는 일에서 안 빼준다.”
“얼마든지 만들어드리지요. 제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용운님, 그리도 쑥스러우십니까? 하하하하.”
“뭐래, 누가 바로 일하래? 경지가 올랐다고 끝나는 거 아니니까 깨달음 잘 정리하고 바뀐 경지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 난 바빠서 이만!”
그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써주는 말을 하고선 내빼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용운의 뒷모습이 게사르의 눈에 오늘따라 크게 들어왔다. 게사르는 용운이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슬슬 사천으로 가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느라 인수인계를 하다보니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씨…내가 사천에 가서 또 일을 벌이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사천에 가면 삼대주 불러다가 지시만 내리고 뒤에서 감독만 할거야. 진짜.”
“네네, 용운님이 퍽이나 그러시겠네요.”
“다진아, 진짜거든? 나도 일하기 싫어. 아주 지겨워.”
“알았다니까요.”
“어허, 안 믿네? 그나저나 청해 떠나기 전에 애들 얼굴 보러 몇 번 더 가고 싶은데 바빠서 시간이 안 나네. 마음 편히 차 마실 시간도 없어. 벌써 보육원 다녀온 지 10일이나 지났네.”
“그러게요.”
보육원을 떠나올 때 이전과 다르게 다음엔 못 볼 것처럼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백아의 모습이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우리 백아 보러 한번 가야 되는데. 일이 안 끝나네.”
“나중에 일 다 마치고 마음 편하게 보러 가죠. 애들하고 놀아주면서 괜히 어중간하게 남은 일때문에 찜찜해하지 말고.”
“그래, 역시 그게 좋겠지? 아예 더 열심히 일해서 일 다 마무리하고 마음 편히 보러 가야겠어. 흐음… 한 3일 정도 빡세게 하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주변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방해하지 말라고 해줘.”
“알겠어요.”
앞으로 진행할 청해에서의 향후 사업계획들을 손보고 사천점에서 선문객잔을 열면서 새롭게 시작할 신사업을 구상하느라 철야까지 해야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예쩡했던 대로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빨고 싶다. 이렇게 피곤할 땐 시~원~한 카페인이 몸으로 들어오면 딱 좋은데. 아무튼 내일은 세 사람이랑 같이 아이스크림이랑 케이크 만들어서 애들 좀 보러갈 수 있겠네. 아함…오늘은 이만 자자. 비글처럼 에너지 넘치는 애들 보러 가려면 잠 좀 자고 체력 좀 비축해 둬야지.”
푹 잔 덕분일까. 이른 아침부터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침상에 누워 있는데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느껴졌다.
“아침부터 비가 오네?”
ASMR처럼 빗소릴 들으며 간만에 평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슬슬 일어나셔야 되는데요? 일어나셨나요?”
“어, 일어났어! 다진아.”
“빨리 나와서 씻어요. 오늘 백아 보러 간다고 했잖아요. 보육원 가기 전에 설과도 만들고 개이구도 만들고 하려면 바빠요.”
“그치 그치. 바쁘지. 후후후.”
“비가 와서 조금 걱정이네요. 길이 질퍽해서 물건 싣고 마차로 갈 수 있으려나?”
“초절정고수가 둘이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정 안되면 허공섭물로 들어서 나르면 돼.”
“아! 맞다. 게사르 님도 초절정고수가 되었지.”
“다들 아침들 빨리 챙겨먹고 오라 그래. 빨리 준비해서 애들 얼굴 보러 가자.”
“그렇게 애들 보러 가는 게 신나요?”
“내가? 난 그냥 내가 들인 애들이 잘 지내나 얼굴이나 볼까 해서 그런 거지, 뭐. 시끄럽고 찡얼대는 어린 애들이랑 복닥거리는 게 뭐가 좋다고.”
“좀 더 본인에게 솔직해지는 거 어때요?”
“무, 무슨. 난 애들 별로 안 좋아해. 시끄럽고, 잘 울고. 떼쓰고. 백아만 좀 예외적인 거야.”
“그렇다고 치죠.”
샐쭉한 표정을 지은 다진은 식당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먹고 일할 준비나 하라고 한 뒤 자리를 떠났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늘 만든 케이크가 제대로 되었나 싶어 맛이나 볼 겸 차를 마시면서 잠깐 여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은월의 대원 하나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용운님. 지금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