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용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은 여자는 용으로부터 막대한 금전적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용의 지혜를 전수받았고 그로 인해 청해에 위치한 어느 조그마한 국수가게 주인이란 비루한 신분에서 벗어나 긴 시간동안 오래 그 이름을 간직하게 될 객잔의 주인으로서 크게 발돋움할 수 있었다…(후략)」
“뭘 그렇게 끄적거려?”
“네,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혼자서 맨날 쭈그리고 앉아 먹을 갈고 붓으로 종이에 뭘 쓰고 있는 게 짠해서 붓펜을 포인트로 구매해줬더니 게사르는 내가 음식들을 만들어 줬을 때만큼이나 놀라는 듯했다. 그날 크게 놀란 이후로 게사르는 자신에게 이런 큰 선물을 주신 분께 존대를 받을 수 없다면서 말을 편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오늘도 데바 선문객잔의 개업식을 맞이해 폭죽을 터뜨리는 등의 이벤트를 통해 홍보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뭔가를 적고 있어 물었더니 화들짝 쓰고 있던 종이뭉치를 뒤로 숨기며 슬금슬금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기라도 적고 있었나?’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현대인의 감성을 잃지 않은 나로선 저렇게까지 비밀스럽게 뭔가를 기록하는 게사르의 다이어리(?)를 들춰볼 생각은 없었다.
“뭐…하던 거 해.”
“예, 예.”
게사르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적은 내용이 혹여 번지지 않았나 싶어 용운이 떠난 뒤 종이뭉치를 뒤적거렸다. 다행히도 용이 건네준 신묘한 붓 덕분인지 번진 부분은 없었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스럽게 기록을 해야겠어. 혹시라도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걸 알면 나중에 책을 불태우거나 따라다니지 못하게 할 지도 모르잖아.”
동쪽으로 여정을 떠난다는 용운을 따라 일화를 기록하기로 마음 먹은 게사르는 기록을 시작한 순간 떠오른 이름이 있어 이미 책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그 이름은 바로 동유기(東遊記).
책의 내용은 목숨을 바쳐 천기를 살핀 끝에 알게된 하늘의 비밀을 바탕으로 스승이 내린 명을 따라 자신이 산에서 내려온 뒤 하늘에서 내려온 두 용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게사르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자신이 만난 두 용(龍)은 민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환상의 존재다웠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자연스럽게 인간의 육체로 활동하는 것과 다르게 인간의 법도라든가 문화에 매우 어색해할 때가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자주 말하는 것이 바로 저것이었다.
“선문객잔에서 가장 우선시 여겨야 하는 게 뭡니까, 여러분?”
“청결입니다!”
“맞아요, 청결입니다. 들어오신 손님들에게 항상 청결한 환경을 유지 및 제공함으로써 손님들께서 쾌적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히나 이곳 청해는 먼지가 많은 지역이라 특수하게 입구를 제작하긴 했지만 언제든 먼지가 드나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시로 닦아내야 합니다.”
청결, 용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 용은 항상 먼지가 자신의 몸에 쌓이면 죽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지 항시 깨끗함을 추구했는데 평소엔 온화한 심성의 소유자이지만 손을 씻지 않은 경우에는 어서 가서 손을 씻고 오라며 성화를 부렸다. 용이 전해준 기물 중 하나인 비누라는 것을 가지고 손과 몸을 닦으면 방울방울 거품이 생기는데 이를 물로 헹궈내고 나면 그 물은 별로 더러운 것 같지 않아도 자신에게서 꽤나 더러워 보이는 듯한 구정물이 되곤 했다.
용의 청결 강조는 특히나 요리를 할 때와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화장실을 갔다 왔을 때. 이 세가지 경우에 대해선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지라 이젠 객잔의 직원도 아닌 자신조차 이에 익숙해질 정도였다.
‘비누라는 걸 사용한 이후론 한동안 씻지 않으면 내게서 그렇게 고약한 악취가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뭐 덕분에 이젠 내 몸에서도 두 용에게서 나는 것처럼 향기가 나게 되었으니 된 건가?’
그러나 청결 이외의 경우에 대해선 용은 인간들에게 배움을 청하는데 스스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어 가진 지식이 세상에 있어 비전이라고 할 지라도 거침이 없이 시원하게 전했다.
용이 데바에게 말과 글을 가르치면서 사용한 동화책(童話)冊)이라는 것의 개념을 들었을 땐 퍽 놀라웠다. 게사르가 알기론 책이란 자고로 어른을 위한 것이고 동시에 제작 과정에 있어 지금 자신이 들이는 것만큼이나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적지 않은 값을 치러야 하는 부유층의 것이었다. 그런데 용은 오로지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풀어쓰고 거기에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그림을 담아 동화책이라는 것을 만든 것이었다.
용이 자신들의 문화라든가 관습을 모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과 데바 역시 용의 모든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용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으면 용은 때때로 미래를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 당장 당신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언젠가 당신들의 후손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거야.”
자신이 본 용은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제대로 못 먹어 몸이 상한 거지 아이들을 보거나 크게 다친 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상한 아이를 보면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특히나, 여자 용보다 사내 용이 더욱 그러했다.
“아이들은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미래야. 하나의 아이들이 가진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아무도 몰라. 저 아이들 중에서 세상을 호령할 강자가 나올 수도 있고, 커다란 돈을 많질 부호가 나올 수도 있지. 단순히 그런 가능성의 가치를 따지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는 그 자체로 사랑받고 귀히 여길 필요가 있어. 이 세상은 아직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해.”
용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걸 퍽이나 좋아했다. 때때로 자신이 가르친 데바가 연습 삼아 만든 음식을 시식회(施食會)라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배불리 먹이곤 자신이 쓴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게사르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탐욕스럽기 그지없다는 용도 있다는데 자신이 본 용은 자신의 주머니를 풀어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였을 뿐만 아니라 배우기 싫다는 애들을 붙잡고 글만큼은 알아둬야 한다면서 어디선가 사람들을 구해와 아이들에게 무료로 글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열었다.
“돈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정파인 우리 곤륜파에서도 쉽사리 못하는 일을 하는 걸 보면 용은 용이구나 싶기도 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길바닥에 땅을 뿌리는 듯한 용의 행위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용의 술법이었다. 용은 때때로 먼 곳에 따로 떨어진 다른 용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손바닥만한 보패를 보며 이야기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만든 요리를 다른 이들에게 맛보게 해주겠다면서 요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어느 성을 가도 자신의 나이 대에선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무위를 갖췄음에도 용을 도와 대량의 음식을 만들고 나면 진이 빠져 한동안은 움직이기 싫을 정도의 대량의 요리였다.
“신기한 건 만드는 족족 그릇에 담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이지.”
자신이 다진이라는 용과 함께 셋이서 만든 요리들의 수들을 헤아려 보자면 양념 양갈비 구이, 양고기 튀김, 양고기 강정 등이 있었다. 만드는 과정 자체는 힘들긴 해도 온 힘을 다해 대량의 요리를 만들고 회복할 때쯤이면 신기하게도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벽을 만나 정체된 듯한 자신의 무공 수준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이 들면서 그리 오래지 않아 자신이 벽을 넘게 되는 순간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왔다.
용은 때때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다른 용들이 술법으로 선물을 주는 것인지 자신이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다양한 기물들을 어디선가 꺼내서 사용하곤 했다. 용은 자신에게 몇가지 기물을 선물해줬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이렇게 동유기 집필에 편하게 쓰고 있는 휴대용 붓이라는 물건이었다.
용의 말에 따르면 이미 휴대용 붓에는 오랫동안 써도 부족함이 없는 먹이 담겨 있기에 따로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먹을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도 용의 설명처럼 자신은 그저 이 휴대용 붓을 덮고 있는 붓두껍을 열고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휴대용 붓의 뒤꽁무니에 씌워놓고선 편하게 쓰면 되었다.
용이 준 휴대용 붓은 분명 나무도, 쇳덩어리도 아니고 자기도 아닌 특이한 재질로 된 물건이었지만 매우 딱딱한 재질이어서 쉽게 부서질 것 같지 않은 매우 귀중한 선물이었다.
“매번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게 연적(硯滴)과 먹과 벼루를 들고 다니는 게 번거로웠는데 용이 선물해준 기물 하나로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었지.”
물론 이 휴대용 붓은 자신에게만 준 것은 아니었고 이번에 데바 선문객잔(善們客棧)이라는 멋들어진 편액이 걸리게 된 저 객잔의 사장님이라는 게 된 데바에게도 주어졌다.
자신처럼 후줄근해보였던 작은 국수가게의 사장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선 꽤나 고아한 아름다움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바빠 죽겠는데 빨리 와서 도와줘요.”
“크흠, 나 말이오?”
“여기 게사르 말고 내가 도와달라고 할 만한 다른 사람이 있어요?”
데바가 주변을 두리번거려 자신도 고개를 두리번거려봤지만 몰려드는 손님들과 별개로 도울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곤 딱히 없었다.
“어,없는 것 같소.”
“그쵸? 스승님께서 오늘 제가 사장으로서 제대로 일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안에서 요리재료 다듬는 잡일 해달라곤 안할테니 적당히 문제될 것 같은 손님만 입구에서 걸러줘요. 스승님이 데려온 사람들은 내가 막 부리기가 좀 그래서 그래요.”
“아무래도 좀 그렇긴 하지.”
용이 데려온 사람들은 외형은 제각기 달랐으나 하나같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용이 따로 일일이 가르친 적이 없음에도 용의 사람들은 행동 하나 하나에 자신과 데바가 배웠던 용의 가르침이 녹아있었다. 행동에선 격식이 느껴졌고 용이 강조한 청결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직원으로서 돌아다니는 그들은 언젠가 스승님과 함께 갔던 객잔의 점소이들과는 판이하게 달라보였다.
‘무공도 익히고 있었지.’
걸음걸이만으로도 꽤나 수준이 높은 보법을 익히고 있고 일반인에 비해 강한 근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건 주문을 받은 직원들이 일반 점소이들이라면 무거워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쟁반에 음식들을 가득 담아 손님들이 있는 탁자로 음식을 나르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뛰어난 기(技)를 익히고 있는 재주꾼들처럼 용케도 탁자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는 직원들을 볼 때면 손님들은 그 모습에 놀라 박수를 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데바로서는 사장의 직함을 달고 있고 스승으로부터 저 직원들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받긴 했지만 마음 편히 그들을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일 게 뻔했다.
“부탁 좀 할게요. 내가 스승님이랑 사모님말고는 어디 부탁할 사람이 있어요?”
자신의 팔을 붙잡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데바의 도움요청을 공명정대한 정파 중 하나인 곤륜파의 가르침을 받은 자신이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걱정마시오, 소저는 나만 믿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