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전 행복합니다.
- 아아,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연달아 먹어보긴 또 처음이에요.
“아까 살짝 화낸 거 취소요. 와함……….”
‘역시 아까 화낸 거 맞구만. 아닌 척 하더니.’
연육기 혹은 연육 망치라고 하는 못이 잔뜩 박힌 스타일의 망치를 가지고 양의 등심과 안심을 두들겨 육질을 연하게 한 뒤 거기에 빵가루를 입혀 튀긴 양가스에 바비큐를 만들 때 사용했던 재료들을 가지고 응용해서 만든 소스에 찍어먹은 세 사람의 입가엔 기름기가 잔뜩 묻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 아까까지만 해도 더는 못 먹겠지 싶었거든요? 근데 또 들어가네요.
- 하아… 원시천존이시여. 노자께서도 오늘 제가 본 음식들의 맛을 봤다면 도덕경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같은 것에 대해선 결코 말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요리라는 건 정성이 담긴 인위(人爲)가 개입될수록 맛있는 거군요. 원시천존~
‘방금 건 곤륜파 문도가 할 소린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좀 불경스러운 발언 아니었나?’
[원래 영양분이 과다공급되면 생명체들은 간혹 헛소리를 하거나 이상행동을 하곤 하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 것 같군.]
‘그, 그런가?’
“겉은 바삭한데 속은 부드럽고 아까 양념 양갈비 구이에 바른 양념과도 다른 것 같은데 살짝 비슷한 느낌도 나는 이 양념을 찍어먹으니까 또 이렇게 자극적일 수 있나 싶어요.”
‘얘는 현대에 태어났으면 먹방 BJ를 해도 크게 했을 인재가 아닐까? 아니면 맛칼럼니스트같은 걸 해도 잘했겠어.’
- 산에서 도를 닦으면서 살 땐 속세의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는데 다 나름의 도가 있는 거군요.
‘저거 저거…사도(邪道)로 살짝 들어간 것 같은데.’
- 그, 그만~ 거기까지. 다들 맛있게 먹은 것 같은데 데바는 어때요?
- 용운 님, 선문객잔에 제 인생을 바칠게요.
- 선문객잔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건 좋지만…그 정도까지는 아닌ㄷ…
- 아니요, 설령 용운 님이 절 버리신다고 해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어요.
-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쪽은 좀… 곤륜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나두요.”
“넌 뭔지 알고 그러냐.”
“에이~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딱 보면 알죠. 딱. 다음 요리도 맛볼거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배부르다며……….’
“그 소리가 아니었는데?”
용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진의 말에 동의하지 않자 비아가 크게 보면 그 소리가 그 소리라고 했다.
‘아닌데?’
[저들도 자네를 따라 평생 오늘처럼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거고 다진 양도 자네가 해주는 음식을 계속 먹고 싶다는 거니 의미적으론 크게 차이가 없는 게 아닌가?]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먹을 거 가지고 약올려서 다진 양 눈 돌아가면 그 피해는 내가 보지 않네. 알아서 잘 처신하게.]
세 사람의 열망이 가득한 눈빛을 보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혼자 조용히 중원에 유람이나 가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첫 수업 때 게사르와 다진이를 들인 게 잘못인 건가?’
말은 더 먹을 수 있다고들 했지만 사람의 위장이라는 게 계속 늘어날 수 없는 한계치가 있는 장기라 더 이상은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 그날의 수업은 데바의 연습까지 가지 않고 마쳤다.
다진은 20대 중반의 국수가게 주인인 데바라는 여자에게 요리 수업을 해주겠다는 용운의 말에 혹시나 싶어 견제를 위해 수업에 참관했다가 좋은 언니를 알게 되었다.
“그 언니 먹을 줄 아네. 음식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나쁜 사람이 없지.”
게사르는 처음 산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속세의 땅이 마귀같은 유혹이 판을 치고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어 도(道)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말을 믿었건만 형님 도사들이나 1대 제자님들의 말이 모두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역시 이 제자를 위해주고 아껴주시는 분은 스승님밖에 없다. 두 용을 따르면 도(道)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쩝. 아까 용운 용께서 해주신 요리들에 저번에 먹었던 귀한 노란 술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지 싶었는데…아직은 친분이 옅어 감히 술까지는 부탁드리지 못한 게 아쉽군.
데바는 요리스승인 용운의 말에 따라 오늘 배운 내용을 반복하여 공부하면서 우물보다 좁고 도랑보다 얕았던 자신의 요리세계가 크게 확대하는 경험을 한 신기한 하루를 곱씹었다.
- 처음에만 해도 말끔하게 생긴 사기꾼인가 싶었는데… 아니었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언젠가 내가 귀인(貴人)을 만나 이 청해에서 벗어나 황궁의 어선방에 있다는 숙수들보다 뛰어난 숙수가 될 거라고 하실 때만 해도 믿질 않았는데…….
“가만…저번에 영상 찍고 뭘 찍을까 했는데 이 세 사람 데리고 요리교실이나 찍어야겠다.”
[이거 살짝 귀찮아지겠군.]
“뭐가?”
[저번에 김PD라는 사람이 내가 해준 통역 서비스를 보고선 앞으로 스크립트를 따서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나? 한어(漢語)에 티벳어에 한국어까지 해달라는 소리가 아닌가? 큼큼, 따로 받는 수고비도 없는데 앞으로 또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까지 통역을 해서 자막을 따달라는 소리인데 내가 어찌 귀찮지 않겠는가?]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무, 무슨? 내가 뭘 원한다고 말했나?]
“에이, 왜 그래. 선수끼리. 착하면 척이지.”
[내가 꼭 뭘 원한다는 건 아닌데…솔직하게 말하지. 나도 앞으로 요리교실 영상들을 찍는 동안 다른 세 사람이 먹는 것만큼의 분량을 맛보고 싶네. 자네가 먹다가 말아서 그걸 지켜보고 있으니 난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게 불만이셨구만? 근데 세 사람은 처음 먹는 음식인데 무슨 맛인지 알고 있는 내가 세 사람하고 똑같이 아귀다툼을 하면서 세 사람의 행복을 뺏을 수가 있어야지. 뭐. 무슨 말인지 알았어. 앞으로 데바의 연습을 도우면서 얼마든지 먹을 기회는 많으니까 원하는 대로 해줄게. 대신 자막 서비스 좀 부탁해도 되겠지?”
[우리 사이에 무슨 부탁인가…내 그 정도 도움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 허허.]
‘연습하면서 먹는 걸로 비아가 자막 스크립트까지 만들어주면 나야 돈 굳어서 좋지…….’
다섯의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삼몽(同床五夢)의 밤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용운만큼은 기억해야 했다. 자신이 한동안 찍을 요리교실 영상 시리즈가 불러올 악몽이 어떤 것일지 라이브 스트리밍 도네이션을 통해 미리 경험했다는 것을.
네 사람과 한 존재가 만드는 ‘청해인을 위한 요리교실’이라는 명칭을 두고 앞으로 ‘환상의 중세먹방쇼’라고 더 유명해질 영상 시리즈가 매주 올라오면서 커뮤니티와 영상의 댓글창도 슬슬 달아오르고 있었다.
- 아~ 드럽게 치사하네. 또 자기들만 먹어.
- 진짜 감질난다 감질나. 분명 영상에서 먹는 음식들이 뭔지도 알고 먹어본 적도 있어서 무슨 맛인지 알 것 같거든? 근데 영상을 보고 있으면 먹고 싶어서 침이 줄줄 나와.
- 도네창은 왜 꼭꼭 닫아놓은 거야. 후원 해준다니까? 어서 열라고!
- 그거…도네해주면 음식 만들어서 보내야 하니까 그런 걸 수도?
- 일,일 리가 있어! 우리 교주가 또 양심이 너무 강해서 도네를 받으면 보답하려고 한단 말이지.
- 편집자 양반, 편집자 양반은 교주님이 보내준 영상 속의 음식들 따로 먹어보심? 솔직하게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답해주면 내가 어디 가서 말 안할게요.
- (편집자) 저도 매번 영상 편집할 때 도저히 못 참고 야밤에 배달앱 켜고 시켜 먹어요. 편집하면서 살 찌는 것도 산업재해로 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부끄)(허탈)(방전)
- 맞네. 우리야 영상 볼 때 뿐이지만 편집자는 편집하느라 열 몇시간동안 계속 반복해서 볼텐데… 난 또 편집자는 우리 빼놓고 매번 교주님이 해주는 음식 먹고 있는 줄 알았지. 교주님, 이렇게 나오면 우리 섭섭해요. 편집자 복지도 챙겨주고 구독자 복지도 챙겨줘라!
- 구독자 복지를 챙기는 게 맞, 맞아?
- 우리에게도 도네를 쏘고 음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도네창을 열어달라! 열어달라!
- 세상에 보답하기 싫어서 도네 창을 닫아놓은 너튜버가 있다? 뿌슝빠슝!
하루가 다르게 폭증하고 있는 구독자들이 보내는 이 같은 뜨거운 반응에 김PD도 수차례 채널 주인장인 용운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아…사장님 말씀대로 거짓말하길 잘했네…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했으면 분명히 협박DM 날아왔다. 커업.”
안 그래도 네티즌 수사대가 자신의 공적 SNS를 찾아내 수시로 DM을 보내고 있었다. 도네 쏠테니 어서 도네창을 열어달라는 DM들부터 시작해서 자기들끼리만 맛있는 거 먹고 아니냐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킹리적 갓심의 소유자들이 보낸 DM까지 다양했다.
“양고기로 만든 요리가 그렇게 다양할 줄 내가 알았나…터키가 아니라 이젠 튀르키예지. 튀르키예는 가야 먹을 수 있다는 카이막을 꿀이랑 같이 보내주셨을 때랑 평생 먹어본 적 없는 진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땐 정말 행복했지. 커업.”
그때 마트에서 파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 가득 담아서 보내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지금도 냉동실에서 가끔씩 꺼내먹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예전엔 방송국 편집실에서 그렇게 일했나 몰라? 이런 천국이 있는데……….”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향긋한 바닐라 향이 묻어나오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으니 김은혜 PD는 구독하고 있는 채널 중 하나인 참튜브의 구독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드립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은혜롭다~ 이 모든 것이 오히려 방송국에 나와서 일어난 일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노비를 해도 대감마님 댁 노비를 하라더니 방송국의 외거노비보다 교주님 외거노비가 더 좋구나.”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구독자들의 원성 아닌 원성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슬슬 사장님이 뭔가를 하셔야 할 건데……….”
“이야…댓글창 보니 구독자들 민심 폭발하게 생겼네……….”
[그러지 말고 한번 라이브 스트리밍을 또 하는 게 어떤가? 괜히 이러다 역풍 불어서 구독자 수 깎이면 포인트 수급하는데 앞으로 지장이 있을 수도 있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도 있는데 어지간하면 슬슬 노를 젓지? 포인트를 열심히 벌어야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때가 빨리 오지.]
“거 말이 좀 그렇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저 세상이라고 하니까…꼭 후딱 죽으라고 하는 것 같잖아. 그리고 나도 무슨 말인지 아는데…저번에 1210명한테 음식 보낼 때 힘들어서 한동안 내가 음식 만들기 싫어졌던 거 잊었어? 두 사람이 도와줘서 그 정도였지 엄청 힘들었다고. 도네 보내준 거 고맙다고 음식으로 보답했는데 어설프게 맛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보내면 오히려 후기에 초심 잃었네 어쩌네 하면서 욕 먹는다고. 더구나 저번에 못 먹은 사람들도 달려들거 아니야…나도 안다고…라이브 스트리밍해서 도네 받으면 좋은 거 누가 모르나?”
내 솔직한 심정을 들은 비아도 공감이 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비아는 나보다 긴 세월을 살아온 노인답게 그 지혜가 어딜 가지는 않는지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될 방도를 알려줬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