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 *
숙성시킨 포도주들을 사기로 된 병으로 옮겨 넣는 작업을 지켜보던 나는 몇 달 전 포도 농장과 계약을 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교주님, 교주님이 말씀하신 방법이 정말 가능한 겁니까?”
“크흠.”
포도 농장 구매는 워낙 반대가 거세서 포도 농장들과 포도의 품질 유지를 조건으로 영구 납품 계약을 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지만, 이미 선문 상단에서 농장을 팔라고 다녔다는 소문이 농장 주인들 사이에서 퍼진 바람에 선문 상단 직원의 복장을 하고 가면 농장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우리들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들어 보지도 않고 보자마자 작대기를 들고 나오거나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기 바빴다.
‘하아……. 이번엔 되어야 할 텐데…….’
삼대주에게 호언장담을 하고서 자신만 믿으라고 했건만 말을 꺼내지도 못하니 영업을 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할 방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피라미를 낚으려고 해도 떡밥을 풀고 낚싯대를 드리워야 뭘 낚지. 애초에 낚시질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인걸.’
삼대주에게 그동안 쌓아 올린 신뢰의 무게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 같아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이곳의 농장 주인이 있다는 장소로 가자 꽤나 고집스러운 인상의 중년인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처음 우리들이 갔을 때만 해도 얼굴이 시뻘게져서 다른 농장 주인들처럼 몽둥이를 들고 나올 것만 같았던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람과 함께 다시 나왔다. 농장 주인은 우리들에게 갓 수확한 포도와 차를 대접하기까지 했다.
‘이번엔 뭔가 느낌이 다른데?’
[자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단 말 들어 본 적 있나?]
‘시끄럿! 괜히 시작도 하기 전부터 초 치지 말라고.’
[크흠, 행운을 빌겠네.]
나는 비아헤로스의 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설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예, 그러니까 저희들은 이 농장을 팔아 달라고 이야기를 드리려고 찾아온 게 아니고 앞으로 세브기 농장에서 나오는 포도를 전량 저희들이 수확기에 매입하는 계약을 맺었으면 해서 찾아온 겁니다.”
“쓰읍. 거, 내가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랑은 다른데…….”
“아, 그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상단의 중간 간부가 독단적으로 이렇게 일을 진행했다는 걸 상단주께서 뒤늦게 아시고 땅의 주인들과 그 조상들을 존중하지 않는 그딴 계획을 누가 세웠냐면서 크게 노하셨죠.”
[자네는 사기를 쳐도 크게 대성을 했을 것 같아. 있지도 않은 중간 간부를 팔아먹고 실은 본인이 상단주면서 자신을 띄우기까지 하다니.]
‘없는 데선 나라님도 욕한다는 데 까짓것, 내 얼굴에 침 뱉는 게 뭐가 대수야. 이렇게라도 해서 계약을 성사시켜 봐야지.’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근데 지금까지 말한 게 진짜요? 선금으로 1년치 식량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잔금으로는 은으로도 지불하겠다고?”
“예, 상단주께서 저희 선문 상단과 계약을 해 주시는 농장주분들께 드리는 약소한 사과의 표현이자 조그마한 성의라고 하셨습니다.”
“커흠, 그렇다면야…….”
세브기 농장의 주인 세브기라는 남자는 끝까지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주었다. 세일즈적 관점으로 충분히 승산이 있는 이야기인 데다 감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계약을 맺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꽤나 유리하다는 걸 어필했다.
농장 주인은 처음엔 불만이 가득해서 등을 한껏 뒤로 하고 의자에 억지로 앉아 있는 듯하다 이야기를 계속 들으며 어느새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고 집중하더니 자신의 어머니란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자리를 비웠다.
“교주님, 근데 말씀하신 대로 진짜 되네요? 전 교주님도 실패하는 때가 있구나 했는데…….”
“대단하십니다. 처음에 말씀하실 때만 해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제가 교… 아니라 사장님을 감히 의심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된다니까. 나 못 믿어? 내가 말했잖아. 된다고.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했을 뿐이야. 그리고 밖에선 교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듣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쉿!”
“우리들만 있는데 뭐 어때요.”
“한두 번까지는 실수지만?”
“세 번부턴 습관이다. 눼눼. 조심하겠습니다~”
[본인도 자신을 못 믿어 놓곤 다진 양과 부하에겐 뻔뻔하게 잘도 말하는구만.]
‘리더가 중심을 잡고 자신감을 보여야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다는 소리, 어디서 못 들어 봤어?’
[이상허다~ 분명 농장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걱정이 산더미 같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쓰읍, 거기까지. 그리고 아직 다 끝난 거 아니야.”
“아! 아직 남은 게 있었다는 걸 속하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 마무리가 가장 중요한 거라고.”
우리는 다시 어머니와 함께 돌아온 농장 주인과 계약을 모두 마쳤다. 농장 주인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넌지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좋은 계약이라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너도나도 맺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주변에 퍼지기 전에 제가 아는 사람에게만 말해 줘도 되겠습니까?”
‘이게 된다고? 우리 교주님은 진정 신인가?’
삼대주는 눈앞에서 교주가 자신에게 설명해 줬던 그림이 현실로 옮겨지자 당장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었다. 자신의 교주님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그럴듯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아……. 그건 조금… 곤란하긴 한데…….”
“저랑 평생 죽마고우로 지낸 친구고 괴팍하긴 해도 제 친구 하사드가 만드는 포도는 이 주변에서 정말 맛있다고 소문난 포도이기도 합니다. 제 농장의 포도와 비슷한 포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그러니 제 친구의 농장과 계약하는 것이 선문 상단 쪽에서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
“으음…….”
[멀쩡한 사람 흑우 만드는 재주가 아주 탁월해!]
사람은 자고로 쉽게 얻은 물건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법이기에 일부러 뜸을 들였다. 세브기라는 남자가 나를 보고 조심스럽게 기대하는 걸 보고 나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하, 세브기 님의 친우를 생각하시는 마음을 높이 사서 제가 특별히 이 명함을 드리는 겁니다. 친구분께서 제가 드린 이 명함을 가지고 오신다면 계약을 맺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친구분과의 계약을 통해 선문 상단에서 얻게 될 이득의 일부도 세브기 님께 드리도록 하지요.”
“그렇게까지 해 주시면 저도 적극적으로 친구에게 알리겠습니다.”
「금도끼 은도끼」의 산신령처럼 너에게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겠다고 하자 자못 고집스러웠던 첫인상의 그는 어디로 가고 나와 삼대주를 향해 이마가 땅에 닿도록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아. 줄 땐 확실히 다 줘야 한다니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아마 세브기 님께서 먼저 나서서 좋은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하셔 봐야 친구분으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마도 선문 상단과의 계약이라는 이야기만 꺼내셔도 화를 내실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하! 맞습니다. 그 친구 성격상 제가 이 명함을 가져가서 선문 상단을 찾아가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할 것 같긴 합니다. 허어……. 이걸 어쩌면 좋을지……. 정말 좋은 계약인데… 말로 해서 쉽게 들어먹을 친구도 아니고.”
“한번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만 하면 친구분을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친구분에게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선문 상단의 영업부장님께 그런 고견(高見)이 있다면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세브기란 사람에게 알려 준 방도란 나에게는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은근슬쩍 선문 상단과의 계약으로 인해 자신이 크게 이득을 보았음을 슬쩍 흘리고 뜸을 들이고서, 그 뒤에 자신이 특별히 선문 상단과 이야기를 통해 친구를 위해 부탁을 해 놓았음을 꺼내면 친구는 몸이 달아올라 명함을 들고 자신의 발로 계약해 달라고 선문 상단을 찾아올 거라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대단하십니다. 분명히 이 방법이라면 될 것 같군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모두 이야기를 해 주시진 마시구요.”
“저도 할 소리, 안 할 소리는 구분합니다. 제 친구를 도와줄 방안을 이렇게 친절하게도 알려 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저희 상단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 갈 분인데 조금이라도 이익을 드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럼, 이만 슬슬 가 봐야겠습니다.”
“저기… 이렇게 좋은 계약도 해 주시고 친구를 도울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염치 불고하고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부탁을 말씀하시는지?”
“다름이 아니라 혹여 제 친구와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농장 주인들이 선문 상단과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해도 괘씸히 여겨 거부하시지 마시고 잘 좀 계약을 진행해 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흐음, 만약 오시는 분들이 세브기 님의 이름을 말하며 부탁을 해 온다면 제가 상단주께 말씀드려서 그렇게 찾아오시는 분들과의 계약의 이익의 일부를 세브기 님께 더 드릴 수 있도록 진행시켜 보겠습니다.”
“아니… 꼭 그러실 필요까지는……. 혹시라도 화운 님께 누가 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브기 님께서 계약을 터 주셔서 계약을 원만하게 할 수 있다면 저희에게도 이익입니다. 그러니 그 정도의 보답은 제 선에서 재량껏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하하.”
[아주 입만 벌리면 구라가 슬슬 나오는구만.]
들어갈 때만 해도 욕을 퍼부을 것 같았던 남자에게서 계약을 따냈을 뿐만 아니라 나올 때가 되었을 땐 일가족이 모두 나와 자신과 교주를 향해 깊게 읍하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배웅을 받게 되자 삼대주는 속으로 다시금 교주님의 심모원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님, 속하 솔직히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사실 교주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배불난(排不難)’이라는 계획이 실패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얻은 것은 배척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크흠.”
[자네 말이 맞아, 삼대주! 이 사람의 말은 믿지 말게! 본인도 사실 실패할 줄 알았다고~! 읍읍.]
‘어허, 부하가 상사에게 진심으로 감명받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의 말을 하는 데 어딜 감히! 에잇! 그리고 베블런효과라는 건 진짜 있는 거라고.’
비아헤로스가 일전에 가르쳐 준 MUTE 기능을 활성화하겠다고 떠올리자 더 이상 그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용해졌군.’
“그런데 교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군요. 심지어 불한당이니, 사기꾼이니 하는 소리만 듣고 쫓겨나다가 계약을 맺으면서 감사하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실제로 계약 조건이 좋았으니 가능했던 게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길가에 보석이 떨어져 있어도 범부(凡夫)는 알아보지 못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한데 교주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굳이 세브기란 남자에게 저희가 그 남자를 통해 맺게 될 계약들에서 얻을 이익의 일부를 나눠 주겠다고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속하의 짧은 생각으론 그냥 처음 계약을 맺은 대로 끝맺었어도 충분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있지. 충분한 이유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토록 많은 대학생들을 구렁텅이로 끌고 간 것 중 하나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네트워크 마케팅. 통칭 다단계가 아니겠는가.
다단계에 속한 회원이 소비자에게 사업 기회를 소개해 자신의 하부 판매원으로 등록시키고, 그 판매원이 자신의 밑에 또 다른 소비자를 판매원으로 만들어 등록시켜 조직을 확장시켜 가는 것이 바로 다단계였다.
나 역시 과거에 다단계에 빠진 대학 동기 때문에 졸지에 좋은 알바 자리가 있다고 간 곳이 피라미드였던 적이 있기에 이 다단계가 가지는 폐해를 용인할 생각 따윈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계약자 스스로 선문 상단의 영업 사원처럼 행동해 주길 바라는 거지. 적은 인원으로 쉽게 이곳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투르판에서 마당발로 소문난 세브기 같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이익을 더 얹어 주더라도 좋은 인맥을 형성해 놓는 게 좋고. 세브기에게 이익을 좀 더 챙겨 준 건 사실… 삼대주 앞에서 교주로서 면을 세워 준 것에 대한 내 나름의 감사이기도 하고 말이지.’
뒷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고 앞 이야기만 적당히 추려 삼대주에게 말하자 삼대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연 그러하다고 납득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 뒤부터 몰려드는 농장주 중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포도주를 만들기에 적합한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 농장들을 편하게 골라내서 포도 납품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세브기 계약 때만 생각하면 정말…….”
난 나도 모르게 순간 그때 삼대주 앞에서 계약을 맺지 못하고 쫓겨나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떠올리며 입 밖에 내뱉고 말았고, 옆에서 병입 과정을 함께 참관하던 삼대주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세브기 농장 계약 말입니까? 캬아, 속하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이지 짜릿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그랬구만, 자네? 나한테는 그냥 평범한 일이라서 말이지.”
[평범해서 자신감 있게 떠든 계획이 실패하여 삼대주와 다진 양 앞에서 망신을 당할까 봐 그렇게도 걱정했더랬지.]
“교주님이 말씀하신 영업의 묘미라는 게 무엇인지 그때 느낀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읽어 내서 자신이 원했던 대로 계약을 따내는 영업의 짜릿함 말입니다. 마치 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그런 걸까요? 은월의 첩보활동에 있어서도 앞으로 영업의 그 심리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받아들이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약간의 운이 따라 줬던 세브기 농장 계약 건을 삼대주가 너무 치켜세워 주는 것 같았지만 부하 앞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포기하고 있다가 막판에 얻어걸린 걸 이 친구가 너무 과대 해석을 하는 거였구만. 쯧.]
계약의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비아헤로스는 혀를 차며 부하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고 중얼거렸지만 나 이외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진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이 그런 거지. 흐흐. 나비의 날갯짓이 어디선가 태풍이 된다는 것처럼.’
[자네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나비효과가 가지는 의미는 아주 작은 변수가 엄청나게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 아닐세. 그저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지.]
그때의 나는 나비효과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비아헤로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지만, 어쩌면 그의 말을 좀 더 유심히 듣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겠다는 것을 먼 훗날 시간이 흐르고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