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비아의 아바타는 겉보기론 금속이 팔뚝을 감싸고 있어 매우 불편할 것 같았지만 막상 팔뚝을 굽히고 펴고 아무리 움직여봐도 완갑이 없을 때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론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겐 평소처럼 똑같이 아무 것도 덮여 있지 않은 평소의 내 팔이 보일 뿐이라는 게 더욱 마음에 들었다.
“좋은데? 잘 부탁해, 친구.”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하지.〕
내가 그렇게 완갑을 쓸어내며 비아헤로스와 우정을 싹틔우던 중 다진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교주님, 뭐해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다진에게서 팔뚝을 감추자 다진이는 뭘 숨기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다 텅 빈 탁자를 보았다.
“어? 여기 놓았던 유성구 어디 갔지? 교주님, 여기 있던 거 못 봤어요?”
“글쎄다? 난 안 건드렸는데? 와. 전.혀 모.르.겠.는.데. 크흠. 큼. 나도 지금 니가 말해서 알았어. 혹시 어디 떨어진 거 아닐까? 잘 찾아봐.”
〔방금은 너무 어색한 거 아닌가?〕
의뭉을 떨며 옆으로 슬쩍 비켜서자 다진이는 나에게 다가오던 것은 까맣게 잊고 탁자 주변을 몇 번이나 뒤지더니 천막 밖으로 나가 다른 은월대원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이미 나에게 동화되어 비가시 기능이 활성화된 유성구를 다진이가 찾는 일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유성구에 발이 달렸나 어디로 가버린 거지?”
“다진아, 아무래도 유성구가 공기 중으로 기화해서 사라졌나보다.”
‘말도 안되는 변명인데...다진이가 바보도 아니고 이건 너무 한 거 아니냐. 이거에 속는다고?’
〔계속 하게. 얼굴표정에 주의하고.〕
“히잉, 금속인줄 알았는데요? 어떻게 그게 녹죠? 말도 안돼.”
‘아...그래, 이게 정상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되는 변명이었다니까.’
〔자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네. 누굴 속이려거든 본인부터 속일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게.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되겠군.〕
비아헤로스는 마치 배우에게 디렉팅을 하는 감독처럼 나의 행동과 대사를 코치하기 시작했다.
“나도 유성이 떨어진 걸 보는 건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네.”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이라 그런가? 유성이 떨어진 걸 보는 건 앞으로도 다시 없을 일이라고 생각해서 기념품으로 잘 보관해두려고 했는데. 히잉.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에 잘 밀봉해서 둘 걸 그랬어요!”
‘다진아...납득하는 거니? 이게 된다고?!’
“그러네. 나도 아쉽다.”
“히잉.”
다진은 유성구가 사라져서 이미 텅비어버린 곳을 한참이고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구나.’
〔거 보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된다니까? 내가 이걸로 말이야. 내 마누라도 속였어.〕
‘응?’
〔치직. 이게 왜 이러지. 접속 상태가 불량한가? 나는 접속장치에 이상이 있는지 좀 확인해 보도록 하겠네.〕
다진이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유성구가 맨들맨들하면서 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며 아쉽다고 했지만 이미 내게 동화되어 버린 비아헤로스의 아바타를 이제 와서 다진이 앞에 꺼내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말기의 기능 중 하나를 이용해 다진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는 있었다.
“이상하다. 오늘은 되게 시원하네요.”
“그래?”
‘단말기가 가진 신체보호 기능을 응용해서 에어컨처럼 주변의 기온을 인위적으로 낮췄으니까 어제보다 시원하겠지.’
“아닌가. 오히려 밖에서 부는 바람은 뜨뜨미지근한 느낌인데.”
“원래 밖에서 부는 바람은 뜨끈했던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어제만 해도 밖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안에 있으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거든요? 근데 오늘은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니까 시원하던 게 약간 더워진다고 해야 되나. 막 그런 느낌이에요.”
“어제 다진이가 잘 잤나보네.”
〔거, 아무렇게나 좀 떠들지 말게. 이럴 때 괜히 주절거리면 의심만 산다고.〕
“네?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혹시 유성구때문인가? 유성구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전해준 기연?”
〔이런! 거 보게. 그대의 연인이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군.〕
‘다진이를 생각해서 온도를 조절했던 건데...괜히 했나본데...’
〔그게 문제는 아닌 것 같네만?〕
다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순간 언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아헤로스와 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 다진이가 손바닥을 마주 치며 내뱉은 말에 바로 안도할 수 있었다.
“맞아! 유성구가 증발하면서 우리 몸에 흡수가 된 걸지도 몰라요! 이게 한서불침(寒暑不侵)?!”
“그건 좀...어렵지 않을까? 넌 무공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게 아니잖아. 한서불침이 그런 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다진이가 하는 말이 너무 터무니가 없어 제동을 걸자 다진이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자네...왜 거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본인이 알아서 납득을 하고 있는데! 혹시 꺼진 불에 산소를 불어넣어 불씨를 키우는 타입인가?〕
비아헤로스가 나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나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아는데...얘가 너무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거지.’
〔끄응. 주변에서 그대에게 굳이 안해도 될 소릴 한다고 뭐라고 한 적 없나?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조금 그런 편이지...그냥 허투루 넘기지를 못하는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있다고나 할까?.’
〔그건 완벽주의자 성향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네.〕
너무나 칼같이 자르는 비아헤로스의 반응에 난 머쓱해졌다.
“교주님. 교주님은 어쩌다 가끔씩 꼭 그러시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느낌적으로 무슨 말인지 몰라요?”
“아하! 알지. 알지...”
〔자네는 나중에 내가 미래를 위해 연인을 대하는데 있어 해도 괜찮은 언행과 하면 안되는 언행을 구분하는 법에 대해 어느 정도 조언을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군.〕
‘꼭 연애 경험 많은 유부남처럼 이야기하네.’
〔껄껄껄. 후우...자네는 하지 말게.〕
“응?”
깊은 탄식과 후회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비아헤로스의 목소리에 나는 입 밖으로 반응을 내뱉고 말았다.
“교주님, 교주님이 아직 이해 못한 것 같은데요.”
“아니야. 이해했어. 이해했는데...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끄응.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동시에 두 사람을 상대하느라 복잡해져 나도 모르게 다진이의 물음에 대답을 했는데 비아헤로스가 머리를 부여잡는 것처럼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지금 나랑 이야기하는데 다른 생각을 했다구요? 무슨 생각? 다른 여자 생각이요?”
“아니. 내가 무슨 다른 여자 생각을 해. 그거 말고 생각할 게 얼마나 많은데. 다진아, 나 교주야. 교주. 우리 일월신교와 교인들의 미래만 생각해도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거 보게! 자네는 아직 이성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아! 좀! 조용히 좀 있어 봐. 한번에 양쪽에서 말을 거니까 머리가 혼란하다고. 일단 얘부터 좀 진정시키고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
〔알겠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나 하지. 그녀는 오늘 일을 잊지 않을걸세.〕
비아헤로스의 말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려왔지만 계속되는 다진이와의 대화에 비아헤로스의 말은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었다. 최대한 성실한 자세로 영혼을 실어 다진이와의 대화에 임하기 위해서.
우루무치에서 투루판까지 장장 240km에 달하는 거리를 우리는 총 10일이란 시간을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드럽게 오래 걸렸네. 차만 있었으면 몇시간이면 올 거리를. 아니, 하다 못해 기차라도 있으면 하루도 안 걸릴 거리를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아, 문명의 이기여!’
“와! 여기가 투루판이구나!”
“어딘가에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네.”
“보물? 맞아요, 교주님 말대로 여기 어딘가에 보물이 있을지도 몰라요. 비단길이었으니까.”
다진이가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투루판은 유럽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들인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그리고 서역남로 중 천산남로를 지나가는 와중에 존재하는 오아시스같은 곳으로 둔황과 함께 실크로드의 길목에서 영화(榮華)를 누렸다. 다만 투루판은 분지 지형으로 위구르의 땅에서 가장 무더운 곳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그런 투루판에 들어선 우리를 맞이한 풍경은 다름 아닌 사암으로 되어 있는 붉은 화염산이었다. 지열이 무려 80도에 이르는지라 붉은 색으로 된 산은 마치 불타는 게 아닌가 싶게 보였다.
‘저 화염산이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서역으로 갈 때 나왔던 로케이션이구만.’
드래곤X에서는 라면냄비 받침으로 쓰다 오염되서 버려진 그 파초선으로 불을 껐던 화염산의 모델이기도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엄한 느낌을 풍기는 화염산을 거쳐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투루판의 중심지에는 이슬람 양식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장이 존재했다. 그곳에는 꽤나 다양하게 건포도를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다 건포도만 파는 것 같네...상품의 다양성따윈 개나 준 건가? 아니, 포도가 다양하니 다양성을 갖춘 건가? 어떻게 봐야하나...혼란하네.’
시장에 가득있는 건포도의 품종은 대략 기원전과 기원후 그 쯤 사이에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현재 여기서 판매되는 포도의 품종만 무려 100여종에 달한다고 하니 이 중에 포도주를 만들기 좋은 품종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일이었다.
투르판 시내를 걷고 있자니 보이는 건물들은 죄다 흙으로 된 건물들이었는데 유난히 이상한 양식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저 구멍이 송송난 건물은 뭐지? 꼭 폐가같이 생긴 게 여기저기 많네.”
내 질문에 미리 파견을 나온 은월 삼대주가 설명을 해주었다.
“포도 건조장입니다. 여름이 뜨겁고 겨울이 추운 이 투르판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포도를 장기간 먹기 좋게 건포도를 만드는 곳이지요. 이곳 투르판에서 생산되는 건포도는 위구르에서 판매될 뿐만 아니라 중원 전체에 퍼져 나가 판매됩니다. 그러니 건포도는 이곳 투르판 사람들에게 있어 주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입원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특산물이죠. 그래서 여기저기 저런 양식의 건물이 많습니다.”
삼대주의 말을 들으니 포도농장 구매가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흐음. 나가리 되면 안되는데.’
“그럼, 포도농장 구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그게...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선 조상 대대로 내려져 온 터전의 땅이기도 하고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줘야 할 소중한 땅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웃돈을 얹어준다고 해도 쉽사리 팔려고 하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고 앞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땅을 외부에서 온 이들에게 쉽사리 팔려고 하진 않을 거야.”
현대에서 땅을 사고 파는 것을 생각하고 내린 지시였는데 내가 이곳의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었다.
“잘 모르는 내가 내린 지시 때문에 그대들이 많이 힘들었겠군.”
“교주님께서 내리신 명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우리들입니다.”
“아니, 난 그대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대들에게 그런 무의미한 희생을 바라지도 않아.”
‘뭣보다 사람을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그런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짓은 하고 싶지도 않고.’
“예. 교주님은 그런 분이시긴 하죠.”
〔이 남자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고 싶군.〕
‘어허, 세상엔 몰라서 좋은 일도 있는 법이라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하는 삼대주의 눈에선 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하지만 신뢰는 신뢰고 일은 일이었다.
〔노동법이 없는 세상이니 악덕업주라고 비난할 수조차 없구만.〕
‘무슨 소리야? 나처럼 선량하게 사업하는 사람이 지금 이시대에 또 어디 있다고?’
“원래 계획대로면 진작에 농장들을 사들여놓고 우리가 원하는 품종의 포도를 찾아내서 포도주를 만들려고 했는데...이렇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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