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용운은 타격대를 자신의 뒤로 불러 모으고 차렷 자세를 한 붉은 늑대들의 앞을 좌우로 서성이며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자신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마치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움찔움찔하는 붉은 늑대들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럭저럭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말하겠다. 우리 은월은 앞으로 우루무치 내에 모든 흑도를 뿌리뽑을 생각이다. 내 눈앞에 있는 니놈들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고혈을 빠는 거머리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열심히 땀을 흘려 스스로 돈을 벌어 사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러하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괴롭혀 그들에게서 돈을 갈취했다. 그동안은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해서 행복했을지 모르나 우리 은월은 그런 쓰레기같은 놈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가지 뿐이다. 순순히 내가 주는 마지막으로 기회를 받아 은월을 따라가 땀을 흘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사람의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워보던가. 아니면 필사의 자세로 마지막까지 저항을 하여 거머리답게 죽어버리던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니놈들의 선택을 존중해주겠다. 솔직히 말해서 난 너희들이 너희들이 입버릇처럼 떠드는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면서 달려들면 좋겠다. 사람이 아닌 놈들을 사람으로 만드는 건 우리도 수고로운 일이라서 귀찮기도 하고 말이지.”
용운이 말을 마치자 은월의 타격대는 육모방망이를 다시 뒤춤에 찔러놓고선 일제히 붉은 늑대들의 앞으로 움직여 한 손으론 포승줄을 내밀고 다른 한손은 옆구리에 찬 칼에 얹었다. 설령 붉은 늑대들이 못 배워먹은 인간들이라고 할지라도 은월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왈패들의 침 삼키는 목소리만이 정적을 가득 채웠다.
꿀꺽
***
은월이 붉은 늑대를 징치하겠다고 공표한 후 사람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붉은 늑대의 존폐 여부가 되었다. 호기심 때문에 갔다가 붉은 늑대의 왈패들에게 걸려 죽을 수도 있었지만 은월의 말이 실현이 되었는지 궁금한 우루무치의 사람들 중 일부는 조심스럽게 본거지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붉은 늑대가 있던 본거지에 다가가 본 것은 싹 다 타버리고 연기만 폴폴 나는 모습이었다.
“붉은 늑대가 멸망했다고?”
“그래, 사람들이 갔는데 아주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는구만! 숯덩이만 남았대.”
“은월이 나서니까 뭐가 되도 되는구만?”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나머지 흑도들은 자연히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4강으로 불리는 붉은 늑대가 단 하루만에 흔적도 남지 않고 쓸려 나갔다는 말에 각 패거리에서도 싸운 흔적을 살펴볼 겸 부하들을 일부 보냈다. 그들이 잔해에서 발견한 것은 그다지 큰 반항이 없었다는 정보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남은 흑도 무리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두목...오늘 수금일인데...수금하러 나갑니까?”
“흠흠...생각 좀 해보고.”
“니미럴거, 생각을 하긴 뭘 합니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거요? 원래 하던 대로 하고 까짓거 쳐 들어오면 싸워서 박살내면 될 일이지. 흑도의 남자가 뭘 질질 끕니까. 질질 끌긴.”
“이 미친놈아! 이러다 다 죽으면? 다 죽으면! 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던 붉은 늑대 놈들도 주제 넘게 지랄하다 하루 아침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도 모르게 되었고 주변에 누가 지나가기만 해도 칼 들고 설치던 그놈들 터전은 쑥대밭이 되었는데 뭐가 무서워서 뭐가 어째? 뒤질 거면 너 혼자 가서 뒤지든가. 니 뒤에 있는 애들 표정이나 보고 말해.”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부하들의 눈빛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왜! 왜 그렇게 쳐다 봐! 우리가 흑도인데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래!”
“형님, 저희가 칼밥 먹고 살아온만큼 언제 칼에 맞아 뒤질지 모른다는 것 정도는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개죽음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잖습니까? 이를테면 다른 패거리들하고 크게 붙어서 몇 놈 찍어내고 죽는다든가 하면 모를까.”
“하아...”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자신의 밑에서 그래도 몇 년은 같이 구른 놈이 쭈볏거리며 손을 들자 한번 떠들어보라고 기회를 줬다.
“넌 또 뭐라고 할 건데?”
“전 붉은 늑대 놈들이 수금하러 나갔다가 은월한테 붙잡혀서 크게 당하는 날 시중에서 봤습니다. 자기가 은월이라고 말한 남자가 무슨 천신님이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목소리가 들리게 하고 열몇명은 되는 붉은 늑대 것들이 지푸라기마냥 공중에 팔랑팔랑 들어올려졌다 바닥에 패대기 쳐지는 걸 보는 순간 좀...무서웠습니다. 그나마 그때는 은월의 그 고수가 손속에 인정을 두어 절룩이면서 붉은 늑대 놈들이 기어갔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은월의 고수가 조금만 손속이 잔혹했다면 그 자리에서 붉은 늑대 놈들 중 어느 누구도 살아서 그 거리를 빠져나갈 수 없었겠다는 것 정도는...”
허벅지에 칼이 찔려도 술 마시면 낫는다고 하면서 웃어넘기던 부하의 얼굴에 가득한 공포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형제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니...은월의 고수가 못해도 초절정 고수라고 했지...”
흑도가 무림강호(武林江湖)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가장 먼저 무림인들을 조심해야 했다. 흑도끼리 암만 서로 누가 더 세니 떠들어봐야 그건 도토리 키재기같은 것이었으니까. 무림인이란 종자들은 평화로운 강에 나타난 흑례(黑鱧, 가물치)와 같은 포식자같은 것들이었다. 순간 눈이 뒤집혔던 자신은 그걸 잊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뭘로 벌어먹고 사냐?”
“...그건 저도 모르죠...”
흑도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은 이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대안을 생각해내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수금하러 나가는 것이 중지되었고 우루무치의 시내에는 왈패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부지, 흑곰파 놈들, 수금하러 오는 날도 벌써 한참 지난 거 아니에요?”
“그러게 말이다. 저번에 은월이 공표한 것 때문인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구나.”
“만약 수금하러 계속 안 오면 그 돈으로 저한테 용돈이나 좀 더 주시면 안됩니까?”
“이놈이! 나중에라도 갑자기 와서 원래 걷어가기로 했던 돈 모두 내놓으라고 하면 어쩔거냐! 안돼! 우루무치에서 흑곰 놈들이 저 붉은 늑대 놈들처럼 확실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이 돈은 무조건 모아놓을 거다.”
건과일을 주로 파는 상인 키미므쉬로서는 상납을 해야 할 돈을 감히 용돈이나 쓰게 달라고 조르는 철없는 아들놈에게 호통을 쳐야만 했다.
처음엔 언제 흑도의 무리들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고 걱정하던 상인들도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도 왈패 놈들이 눈에 안 띄는 것을 보고선 마음 한구석에서 흑도 놈들이 개과천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이 자식들, 왜 수금을 안하지? 이 자식들이 수금을 해야 우리가 딱하고 나타나서 잡아갈 명분이 생기잖아.”
“교주님, 저희가 붉은 늑대를 싹 밀어버렸는데 어떤 미친 왈패 놈이 쓱삭 당하려고 돈을 걷으러 다니겠습니까? 저 같아도 숨어서 눈치만 보겠습니다.”
‘나때문이라고?’
“아니~ 무슨 건달패 새끼들이 자존심도 없나. 반항을 안해? 질서에 대한 반항이 정체성인 놈들이. 그리고 내가 뭐 반항한다고 다 죽였냐? 안 죽였잖아.”
“쟤들은 우리가 붉은 늑대 싹 데려다가 그 교.육이란 걸 시키고서 광산에 옮겨서 일 시키는지 모르잖습니까. 그러니 은월이 모두 다 목을 쳐서 없애버린줄 아는 걸테지요. 하물며 시중에 은월에 초절정고수가 있다고 소문이 싹 났는데 무림인만 봐도 경기 일으키고 쥐새끼마냥 사방으로 흩어지는 흑도 놈들이 퍽이나 돌아다니겠습니다.”
“하아...이럼 나가린데...”
“뭔가리요?”
용운이 또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자 경수는 뭐라고 했냐고 되물었지만 별거 아니라고 한 용운은 그럼 어떻게 해야겠냐고 경수에게 의견을 구했다.
“냅두십쇼.”
“냅두라고?”
경수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용운은 재차 물어야만 했다.
“가마~~~~안히 두면 각자 뭔가를 할 겁니다.”
“왜?”
경수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용운을 쳐다봤지만 얼굴에 철판을 깐 용운은 빨리 설명하라며 경수를 닦달했다.
“교주님께선 건달패들이 열심히 돈 모아서 사는 종자들같습니까?”
“아니지.”
경수의 말이 맞았다. 조용조용 입을 다물고 평화롭게 살려고 해도 흑도의 건달패들이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처럼 돈을 모아두거나 할 리도 없고 유흥비로 다 탕진해왔을 터이니 어떻게든 돈을 구하기 위해 우루무치에서 뭔가를 저질러도 저지를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똥개가 똥을 끊겠습니까? 문제 일으키는 놈들은 다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을테니까.”
“맞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어째서인지 이것들이 경수의 말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용운은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다~ 분명 일을 저질러도 벌써 몇 번은 저질렀어야 하는데. 왜 안 저지르지?”
“그러게요...도박장에는 건달패들이 슬슬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것들 어디서 돈을 구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현대의 범죄조직들처럼 보이스피싱같은 사기를 칠 리도 없고 그렇다고 마약을 만들어 팔 리도 없는 놈들이 어디서인지 용케 돈을 구해와선 객잔에 나타나 술을 마신다거나 도박장에 나타나서 도박을 한다는 사실이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것들 진짜 돈을 어디서 구하는 거지?”
용운은 자신이 궁금해하던 흑도 무리의 돈의 출처에 대한 정답을 얼마 뒤에 카라호자 기루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왔다는 백운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건달패들 중에 기둥서방인 놈들이 꽤 있는데 기둥서방인 놈들이 기녀들의 돈을 갈취해간다고?”
“예, 예전엔 간간히 술값이나 얻어가는 정도였는데 요근래 들어 패악질이 심해졌다고 해요.”
“요것들이 어디서 돈을 구해서 도박질을 하나 했더니만...”
흑도의 건달패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이놈들도 살아가려면 어디선가 돈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삶같은 건 살아본 적 없는 놈들이 갑자기 어디 상가의 점원이라든가 객잔의 점소이로 취직할 리가 없었다. 자연히 가까운 곳에서 돈을 갈취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게 자신들이 기둥서방으로 있는 기녀들의 주머니였던 것이었다.
“근데 왜 내가 이걸 몰랐지? 기녀들은 이따금씩 하오문에 와서 자기가 구한 정보를 팔잖아.”
“기둥서방이긴 해도 자신의 정인(情人)이라고 생각하는 이를 파는 여자는 없으니까요.”
기둥서방도 애인이라고 기녀들은 자신과 사귀는 건달패들을 감히 팔아넘기지 않았기에 하오문에서 제대로 진상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지 애인 등을 처먹고 사는 놈들의 이야기에 살짝 열이 받아 말이 없던 것을 백운은 다르게 생각했는지 나에게 조심스레 부탁해왔다.
“용운님...부디 기녀들을 구해주실 수 없을까요? 비록 천녀(賤女)들이 몸을 팔고 웃음을 팔아 돈을 벌기에 용운님께서 보시기에 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기녀들은 자신의 가족과 동생들을 위해 번 돈을 아껴서 집에 부치는 불쌍한 애들이거든요. 돈 때문에 팔려온 이들이니 부디 이들을 가엾게 여겨주세요.”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이들에게 공감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엎드린 채로 부탁하는 백운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유흥비가 아니라 인신매매로 팔려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구제하려고 마음먹은 나는 백운을 일으켜 세우며 약속했다.
“백운, 은월을 믿어. 우루무치에 억울하게 혹은 강압에 의해 기녀가 되어 스스로 기녀로 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있다면 은월이 다른 삶을 살도록 도와줄 것이고. 남의 등에 침을 박고 피를 빨아먹는 식으로 사는 것들이 있다면 모두 가차없이 치워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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