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헉헉헉”
“이제 따라오는 놈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저런 괴물들이 우루무치 근처에 있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
허겁지겁 도망치는 와중에 점혈을 한 덕분에 더 이상 실혈(失血)은 없었지만 그래도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둘의 체력은 바닥을 쳤다.
노수호의 많은 인원들 중에 달랑 둘만 남아 정신없이 도망쳐 거지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량함만이 느껴졌다.
자신들이 도망쳐 온 곳을 뒤돌아 보며 인기척같은 것이 없다는 걸 인지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비난을 하며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정치질을 시작했다.
“이게 다 너희들이 이번에 저런 놈들이 오는지 똑바로 조사를 하지 않은 탓이다.”
“뭐요? 저런 놈들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리고 대장이야말로 어떻게 부하들을 내버리고 가장 먼저 튈 수가 있는 거요! 부하들은 저승길로 보내놓고 자신만 살려고 하다니.”
“킬킬킬, 지금 내 옆에 있는 넌? 너라고 나랑 뭐 다른 놈인줄 아느냐?”
자조의 목소리와 함께 어차피 같은 처지에 자신을 비난해봐야 누워서 침뱉기임을 팽가독이 언급하자 치가우는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불거리던 치가우가 입을 다물자 조용해진 가운데 팽가독은 우루무치에서 유유자적 즐겁게 지내던 시간은 끝이 났다는 걸 느꼈다. 노수호의 악명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있던 시간이 벌써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짓밟힌 악명에 다시 겁먹을 이들은 없다는 걸 팽가독은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세월은 다 갔구나. 제기랄...어쩌다 내가 이렇게...”
둘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때 용운과 백운은 하늘에 떠 있는 양탄자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초에 백운은 우루무치를 주름잡던 노수호가 감히 발악할 생각조차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당한 뒤 패주(敗走)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은월이 자신에게 보여준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겨우 두 사람에게 창대로 개처럼 두들겨 맞는 악마같은 놈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친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놈들이 거지꼴이 되어 있는 모습에 허망함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저들도 결국 강자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기 바쁘군요. 그리고 고작 그것밖에 안되는 인간들에게 내 친구들이 그렇게 죽어야만 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무상(無常)하기도 하네요.”
백운의 말에 용운은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그녀가 느낄 비애(悲哀)가 어떤 것일지 용운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선뜻 위로할 수 없었다.
자신도 현대에 있을 적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비스직을 할 때에 지금의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백화점에서 VIP들을 대상으로 발렛파킹을 할 때 누군가는 적당히 친절했고, 누군가는 마치 로봇을 대하듯 무감정하게 대했고, 아주 재수없게 일부는 인격적인 모욕을 주기도 했다.
자신에게 막대하는 이들에게 일개 알바생에 불과한 용운은 그 어떤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겨우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막 대하는 인간들을 보며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때 자신도 누군가 약자인 자신을 위해 옆에서 소리쳐줄 이가 있었다면 싶었던 때가 있었다.
현실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가혹했다. 자신이 부당하게 당할 땐 오지도 않던 상사는 책임자 나오라고 외치며 외부에 이를 알리고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악성고객의 말에 부리나케 나타났다. 그 손님을 겨우 처리하여 돌려보낸 뒤 정작 정직원에게 들어야 했던 것은 고생했다는 위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알바생 자신을 향한 비난이었다.
“하, 일 좀 똑바로 해, 인마! 니가 제대로 일을 못하니까 나까지 불려나와서 욕을 먹어야 하잖아. 또 이따위로 하면 위에다 일 거지같이 한다고 이야기할거야. 알아?”
“죄..죄송합니다.”
“씨발, 기분 더럽네. 똑바로 해라. 똑바로.”
그때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어린 정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을 길 가에 개미처럼 대하던 악성고객들조차도 그보다 더 큰 부자와 우연히 마주쳤을 땐 여긴 무슨 일로 오셨냐면서 굽신거리기 바빴다.
순간 그 모습을 보며 일시적으로 통쾌함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서 남는 것은 겨우 저런 인간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조(自嘲)와 사회의 밑바닥에 있던 자신의 위치가 주는 처절한 비애(悲哀)뿐이었다.
용운이 자신을 보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진 것을 모르는 백운은 어느새 감정을 추스르고 용운에게 절을 했다.
“제게...이러시지 않아도...”
“아니요. 제 친우들을 위해 나서줄 분들은 오직 은월뿐이었을 겁니다. 일개 기녀들의 죽음에는 누구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요. 그건 제가 가장 잘 알죠...”
“하지만 저희들은 의뢰금을 받았기 때문에 움직인겁니다.”
용운이 과한 감사라며 사양하려고 하자 백운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제가 드린 돈이 저들을 물리치기 위해 고수들을 투입하는 것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라다는 건 돈을 드린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아...그게...”
‘안 그래도 노수호를 없애려고 하긴 했지만...’
용운은 뭐라고 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백운의 표정에 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예가 아님을 알았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했다.
“진심으로 소녀들을 위해 나서주신 은월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절을 하는 백운에게 용운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마주 향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용운을 향해 깊게 절을 하고 일어난 백운의 눈은 젖어 있었다.
용운은 백운을 쳐다보며 당신의 의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의 의뢰는 노수호의 전멸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팽가독을 직접 죽이고 싶다고 하셨죠. 그 마음 아직도 그대로입니까?”
용운의 말을 듣자 자신이 한 의뢰가 떠오른 백운은 눈가를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변하지 않았어요.”
“그럼 이제 그대의 마지막 조건을 이행하도록 하죠.”
용운은 백운과 함께 내려가기에 앞서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날려보냈다. 지친 몸을 먼지 속에서 추스르고 있던 팽가독과 치가우에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에 맺힌 강기는 미쳐 대응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의 사지 근맥을 바람처럼 잘라 버렸다.
“뭐, 뭣!”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과 다리를 끙끙거리며 버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의 눈에 그제서야 하늘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직사각형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대들이 살면서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시간이다.”
이윽고 땅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고 직사각형의 천 위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팽가독과 치가우는 자신들을 향해 어검술로 검을 날려보낸 극강의 고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임을 직감했다.
“당신은 누구지? 우리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군단 말이냐!”
“흥! 노수호를 이끄는 악적 팽가독의 입에서 억하심정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더러운 놈아!”
팽가독의 말에 남자 옆에서 차가운 눈빛을 내뿜으며 입을 연 여자는 분명 카라호자의 기녀였다.
“너, 넌?”
“카라호자의 정빙화가 어째서?”
두 사람의 어이없는 표정을 쳐다보며 용운은 두 사람을 향해 그들이 저질러온 악행에 대해 줄줄이 읊었다.
“...해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니놈들은 여지껏 살아오며 살인, 강도, 강간, 방화, 폭행 등을 셀 수도 없이 저질러 왔더군. 이만하면 오늘 너희들의 목숨을 취하는데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데?”
용운의 목소리에서 두 쓰레기는 어쩌면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사, 사, 살려주십시오.”
“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선처를!”
“이대로 산 속 깊숙한 곳에 들어가 다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살다 죽겠습니다. 제발.”
무릎 꿇고 손으로 빌고 싶어도 사지 근맥이 잘린 탓에 둘은 바닥을 벌레처럼 기며 꿈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사과의 방향이 틀렸구나.”
용운은 두사람에게서 살짝 비켜서며 백운을 쳐다보았다. 팽가독과 치가우는 입으로 사죄의 말을 연신 내뱉었다.
“정빙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너의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거야.”
“부탁하마. 살려다오. 살려다오. 제발! 나에겐 모셔야할 늙은 어머니가 있어. 부탁한다.”
용운은 마지막까지 그녀가 직접 이들의 목숨을 취하게 하는 것이 과연 좋을지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소녀가 아니라 단단하게 마음을 굳힌 한 사람의 각오만이 느껴졌다.
팽가독과 치가우는 자신들을 향한 칼자루를 용운이 아니라 정빙화가 쥐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눈물을 흘리며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꿈틀거려도 백운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백운은 어느새 풀어져 팽가독처럼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팽가독의 성명무기인 독혈겸을 집어 들고 낫을 가두고 있던 가죽을 끌렀다.
“그대의 무기인 이 낫에는 베인 사람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독이 발라져 있다지?”
백운은 술자리에서 자랑하듯 팽가독이 내뱉은 말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제발...제발!”
“그것만은!”
팽가독과 치가우는 팽가독의 독혈겸에 발려있는 마전자(馬錢子)가 어떤 식으로 사람에게 작용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전자로부터 추출하고 그 독성을 농축한 탓에 독에 중독이 되고 10분에서 20분이 지나면 머리와 목부터 시작해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면서 경련이 지속되다 결국 경련으로 인한 질식 또는 탈진 때문에 마침내 사망하게 되는 지독하디 지독한 독이었다.
둘은 이 독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살려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면서 중독된 이들이 자신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게 만들고 죽은 이들을 비웃으며 낄낄거리곤 했었다.
“먼저 저승에 간 내 친구들과 당신들로 인해 죽어간 모든 이들에게 죽어서 사죄해.”
백운은 비통함이 처절히 느껴지는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 뱉듯 두 사람을 향해 말하곤 일부러 심장이나 목이 아니라 복부를 낫으로 깊지도 얕지도 않게 베어버렸다.
“나는 당신들이 최대한 오래오래 고통받았으면 좋겠어. 그대들이 죽으면 그대들의 시체는 들짐승들이 뜯어 먹게 할 거야.”
백운이 복부를 베어버리자 둘의 복부에선 출혈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의 복부에서 피가 흐르는 감각과 함께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둘은 비명을 질러댔다.
“제발! 그냥 죽여라! 이 년!”
“부탁이다, 정빙화! 끄아악”
“니놈들은 누군가 절박하게 부탁을 했을 때 들어준 적이 있었나?”
백운의 질문에 팽가독과 치가우는 비명을 지르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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