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가르침을 받고 한참을 더 대련을 한 우리는 대련을 마친 뒤 땀을 닦아내고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두팔 호법이 옆에 앉아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차를 술술 잘도 먹는데 그 모습이 신기하여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른들은 목구멍도 단련되는 걸까? 저 뜨거운 걸...’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교주님?”
“아니요. 딱히.”
“하하하, 전 이렇게 대련도 하고 느긋하게 차도 마시니 오늘은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렇게 좋아요?”
“아무렴요. 형제들은 발에 땀이 나도록 날아다니기 바쁜데 저는 이런 호사를 누리니 좋지요.”
두팔 호법의 말대로 나머지 세 호법은 지금 외부로 출타 중이었다. ‘구방(求方)’이란 이름으로 중원의 방방곡곡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임무를 부여받고서.
‘총알 배송이 아니라 드론 배송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처음엔 네명이 다 같이 다녔던 사호법은 허공섭물로 커다란 나무 상자를 띄우고 각기 검과 창에 올라타서 어검(창)비행술로 고립된 마을에서 벗어나 마을의 생산품들을 가져가 판 뒤 마을에 필요하거나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구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 해보더니 그렇게 짐이 많지 않을 땐 3명이서도 충분한데 굳이 매번 4명씩 다닐 필요가 있냐는 막내 자룡 호법의 건의로 한명은 비번을 부여받기로 했는데 그 첫 번째 수혜자가 바로 내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햇볕을 즐기고 있는 두팔 호법이었다.
“자룡이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쉬게 되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습니다.”
‘조삼모사 아닌가? 어차피 다음엔 가야 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일은 내일의 두팔에게 맡기겠다면서 오늘의 두팔 호법은 오늘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번을 매번 돌아가면서 할 거라는 용운의 예상과 다르게 네 명이 비번을 정하는 것은 순번식이 아니었다.
뱀, 개구리, 민달팽이를 상징하는 엄지, 검지, 손가락을 통해 겨루는 ‘충권’ 말고 교주가 애들에게 가르쳐 준 가위, 바위, 보라는 것으로 비번을 정하자는 막내의 수작을 간파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가위-바위-보라는 것에 대해 가위가 바위에게 지고 바위는 보에게 지고 보는 가위에게 지는 상승 구조를 지녀 약자와 강자의 구분 없이 남녀노소 함께 할 수 있는 매우 공정한 놀이라고 교주는 설명했다.
언뜻 들으면 각자 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3개로 확률은 매번 3분의 1이라고는 하여 매우 공정하면서도 전략적인 대결이 가능한 놀이 같았으나 가위바위보라는 놀이는 교주의 설명과 다르게 분명한 허점이 분명히 존재했다.
‘자룡 녀석, 은근히 심리전을 걸었지. 하지만 나한텐 안된다. 요놈!’
두팔과 자룡은 예전에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 중 어느 한 녀석이 크게 ‘보’를 크게 외치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맞춰 일제히 보를 내는 걸 보고선 자룡이랑 낄낄대던 것이 기억에 선명했다.
교주의 옆에 앉아 얼마 남지 않은 차 한 모금을 들이키던 두팔은 자룡이 가위바위보로 비번을 정하자는 때가 떠올랐다.
“형님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일전에 교주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 가위바위보라는 걸로 비번을 정하는 게 어떻겠소?”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가 아니라 매번 가위바위보를 하자?”
“서로 돌아가면서 쉬는 건 별로 재미가 없지 않수. 매번 가위바위보를 해서 1등만 빠지는 겁니다. 어때요?”
“흐음.”
두팔은 두 형님들이 고개를 살짝 갸웃할 때 자룡의 의도를 읽고 이거다 싶어 기세를 올렸다.
“대신 진 사람은 두말하지 않고 ‘승부’의 결과에 승복할 것으로 하지.”
“승부라...”
그러자 두팔과 합을 맞추며 자룡이 운을 띄웠다.
“장부일언허인(丈夫一言許人 사나이가 한번 약속을 하면)?”
그에 맞춰 두팔이 답을 한순간 나머지 둘도 분위기에 이끌려 참전을 수락했다.
“““천금불이(千金不易 천금을 주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모두가 화경에 오를만큼 70이 넘은 나이에도 사호법 모두 사내로서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겨룸의 대상이 평생을 함께 해온 의형제들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아무리 사이가 좋은 의형제라며 가깝다고 한들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승부를 거는 상대의 앞에서 선뜻 ‘나는 싫다.’며 빠질 남자는 어디에도 없는 법이었다.
다들 동심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요즘. 모두가 자룡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각자 자신이 이겨서 빠질 것을 기대하고.
네명이 모여 다 함께 가위바위보를 외칠 때 두팔이 예상했던 대로 마지막에 자룡이 보를 크게 외쳤고 자신을 제외한 두 형님들은 그 목소리에 휘둘려 자룡의 수에 가볍게 넘어가 보를 내밀고 말았다.
“자룡과 두팔이가 이겼구나.,,크흠”
“아니...왜 보를 냈지? 이걸 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흠흠. 형님들~ 두말하기 없기입니다.”
“안다. 내 어찌 한 입으로 두말하겠느냐.”
“그래, 이제 그럼 둘이 1등을 정해 보거라.”
속으론 자신이 낸 보자기를 한번 보고 자룡과 두팔이 낸 가위를 번갈아보던 유웅과 수천수 두 사람은 괜히 승부에 응했나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이미 뱉은 말이 있는데 이제 와선 다음에 할 때 자룡의 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일대일의 대결이 된 상황에서 자신이 무얼 내면 이길지 곰곰이 고민하는 자룡과 다르게 두팔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저 자룡이 무슨 수를 내든 상관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필승전략을 하나 세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두팔의 전략이 무엇인지 자룡은 파악하지 못했다.
“가위~ 바위~ 보!”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자룡이 보라는 외침을 크게 외쳤다. 자룡은 두팔이 가위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두팔의 수를 한발 앞서 계산하여 묵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두팔은 오로지 자룡의 등 뒤에서 빠져나오는 오직 자룡의 손에만 집중하였다.
순식간에 등 뒤에서 빠져나오는 자룡의 손이 굳게 주먹의 형상을 하고 쥐어졌다고 한 걸 짐승에 가까운 판단력으로 빠르게 판단한 두팔은 마치 계란을 쥔 주먹처럼 어정쩡한 상태에서 순식간에 보자기로 바꾸며 손을 펼쳐냈다.
“보자기야?”
“보자기네?”
네 사람의 눈이 보고 있는 곳에선 두팔의 손이 활짝 펴져 있어 누가 봐도 두팔이 자룡에게 이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어떻게? 이럴 리가 없는데...”
자룡은 자신이 이길 거라고 자신만만해하며 주먹을 냈는데 두팔이 예상에 없던 보자기를 꺼내자 혼란에 빠져버렸다.
‘뭐지? 형님이 아까 가위를 낸 것은 그저 우연이었나?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버린 자룡의 머리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졌다. 두팔이 일전에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보며 나눴던 자신과의 대화를 기억한 것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아무 생각 없이 두팔이 보자기를 내민 것인지 그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팔의 표정을 보고선 자룡은 두팔이 어떤 이유로 보자기를 낸 것인지에 대해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다.
반면에 유웅과 천수는 두 사람의 대결에 집중해 있었기에 두팔이 어떻게 자룡을 이겼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둘은 전음으로 두 동생들이 자신들을 물먹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형님, 방금 보셨소?)”
“(허허허, 아우들이 꽤나 깜찍한 수를 썼구나.)”
“(난 가위바위보가 애들 놀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려.)”
“(소리를 질러 부동심을 깨고 보자기를 내게 만들지를 않나. 마지막까지 상대방이 내는 수를 지켜보다가 손동작을 바꾸질 않나. 이거 애들 놀이라고 우리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다음엔 이렇게 쉽게 지진 않을 것이외다.)”
“(아무렴. 이렇게 개차반으로 져놓고 다음에도 또 이런 식으로 당할 순 없는 노릇이지. 허허허.)”
둘은 비번을 빼앗겼다는 것보다 두 아우들에게 가볍게 져버렸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형의 풍모를 지키기 위해 감쪽같이 속내를 숨기고 두팔에게 축하를 전했다.
“이번엔 두팔이가 이겼구나.”
“이거...내가 먼저 쉬게 되어서 미안하구려.”
‘덩치는 곰 같은 녀석이 하는 짓은 항상 여우란 말이지.’
천수는 수십년간 봐왔던 두팔의 전매특허 전략인 뒷통수를 긁적이며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이겨버렸어요~’를 연기하는 꼴을 보니 괜히 배알이 더 뒤틀려서 다음에 어떻게 골탕을 먹이면 좋을지를 조용히 둘째와 따로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님이 이겼구려...”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자룡은 두팔이 보자기를 왜 낸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네명이서 골패로 포(飽)를 하며 놀 때에도 두팔에겐 유독 운에서 밀리는 편인 것을 떠올리며 두 형님처럼 축하인사를 전했다.
“흐흐, 다음에도 이렇게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주님.”
“네?”
용운은 네명이서 있었던 내기의 전말을 모르는 터라 두팔의 말이 영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밖에서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벌써 형님들이 오실 때가 되었나봅니다.”
“그러게요. 애들이 시끄럽네요.”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4명의 신선으로 소문나버린 사호법 중에서 세명이 거대한 나무 상자를 띄운 채로 공중에서 검과 창을 밟고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 보이자 아이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와, 구방기사(求方技師)님들이다!”
“난 커서 반드시 구방기사가 되고 말거야!”
“나도 나도!”
“구방기사 최고!”
사람들은 사호법에게 사신선이라든가 청안노사(靑顔老師)같은 별칭 등 여러 가지를 붙여주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아이들은 방방곡곡을 다니며 마을에 필요한 물건을 무엇이든 구해다 주는 기예가 뛰어난 스승들이라는 의미의 구방기사라는 단어가 퍽 멋있게 들렸는지 사호법을 구방기사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어릴 땐 슈퍼맨 참 좋아했는데 아이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런 거에 동경하는 건가?’
“진짜 멋있다.”
“구방기사님이 저번에 구해다주신 당과 진짜 맛있었는데. 또 사오셨을까?”
할아버지들은 밀이라든가 쌀 혹은 설탕부터 시작해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구해다주며 자신들을 보러 나온 아이들에게 간혹 당과같은 간식거리를 사다 주곤 했다. 아무래도 과자같은 것이 딱히 없는 이곳에선 호법들이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챙겨주는 간식에 대한 아이들의 열망은 산골 깊숙한 군부대에 찾아오는 황금마차처럼 보였을 것 같기도 했다.
‘흐음.’
호법들이 구해온 물건을 내리기 좋게 따로 만들어놓은 착륙장에 물건을 내려놓고 호법들이 각자의 무기를 챙기자 아이들은 장 보고 온 엄마의 바구니를 쳐다보듯 궁금해했다.
“구방기사 할아버지, 이번엔 뭐 사왔어요?”
“요녀석들, 교주님 계시니까 이따 이야기하자꾸나.”
“아!...죄송해요.”
“죄송하긴. 조금만 기다리려무나.”
“별 일 없으셨죠?”
“하하, 이번에 저희들을 위해 교주님께서 만들어주신 무수탕(懋秀宕) 덕분에 아주 따뜻하게 다녀왔습니다.”
“그쪽 상인들이 어찌나 탐을 내는지.”
“그래요?”
추운 겨울에 노인들을 부려먹는 것 같아 미안해서 옛날 전투기 조종사들이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입었던 무스탕을 양가죽에 백여우 털을 붙여 만들어줬는데 그 모습이 퍽이나 멋있어 보이긴 했다.
“다음엔 무수탕도 좀 가져와서 팔았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모직물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흐음, 무수탕까지 만들어서 팔려면 양을 더욱 늘려서 키워야 가능한 거라 당장은 어렵고 올 가을 말에나 가능하겠네요. 이제 봄인데 이왕이면 추워지기 전쯤 해서 가져가면 따뜻할 때쯤 가는 것보단 비싼 값 받고 팔 수 있을테니 그게 더 이득일 것 같고.”
“그것도 그렇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전부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워낙 올망졸망 보인 아이들의 눈망울에 담긴 기대감을 외면할 수 있어 나는 정확한 건 나중에 따로 보고를 받기로 하고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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