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이게 화경의 시야인가?”
흔히들 화경을 하늘과 땅의 기운이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는 천지교통의 경지라고 표현하는데 실로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기운을 빨아들이고 펌프질하여 순환시키는 가칭 V12 단전을 통해 외부의 기운이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들어오고 단전으로 빨려들어온 기분이 순환을 마치고 일부가 빠져나가는 통에 천지사방에 돌아다니는 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경지가 올라 각성 상태에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정 범위 내에 길을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의 기감이 꼭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몸 상태를 점검하고자 수련장에 도착하여 기운을 힘줘서 밀어 넣자 검에서 검강이 대나무가 자라듯 곧게 일어섰다.
“드디어 검강을 만들 수 있다!”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이 마치 스펙트럼처럼 뒤섞이면서 검강이 자아내는 빛의 색들은 눈 앞에 있음에도 그래픽처럼 생동감 있으면서 인세에 존재해선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검을 감싸고 있는 강한 기운의 집합체인 검강으로부터 어떤 것으로도 파괴시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강건함이 느껴지고 이는 자신감을 부여했다. 검강을 세우고 대대로 신교에 내려져 오는 천마검법을 시전했다.
천천히 빠뜨리지 않고 1식부터 12식까지 이루어진 천마검법을 모두 시현하고 나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마의 검법은 일월신교의 교리에 맞춰 태양과 달의 흐름과 그 심상을 본 따 만들어진 검법이지만 기존에 천마검법을 만든 이의 깨달음이 그리 깊지 않아 화경의 경지에 오른 지금의 자신이 사용하기엔 다소 많이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개량이 좀 필요하겠는데...이대론 안되겠다.”
삼류 검법부터 일류 검법까지 올라갈수록 여러 가지에서 차이는 존재했다. 오랜 시간을 거쳐 개량된 명문 정파의 것일수록 초식을 통해 허와 실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승의 검법은 검법을 수련하여 극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어 초절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검을 익히면서 검술에 포함된 기의 흐름을 익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천마검법은 가진 바 힘이 넘치는데 그 기운을 밖으로 전부 활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강대한 내공이 있다고 한들 검술이 가진 출력 자체가 낮아 한계가 극명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호법 할아버지들하고 연구 좀 해봐야겠다.”
점심에 다진과 함께먹기 위해 준비한 오늘의 음식은 바로 짜장면이었다.
“흐음...다진이가 좋아하려나?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먹는 짜장면은 좀 달게 느껴진다고 하던데.”
한국에서는 중화요리로 분류되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중국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었다.
밀가루를 확보한 이후에 미리 담가놓았던 덕분에 이제는 먹기에 충분히 익은 첨면장(甜面酱)을 보니 드디어 꿈에서도 나오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것은 나였다.
메주를 베이스로 만드는 한국의 된장과 다르게 단맛이 나는 중국 된장인 첨면장은 만드는 방법도 달랐다. 곰팡이 핀 마른 빵을 면과로 감싸서 수숫잎으로 묶은 다음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걸어 말리면 발효제가 되는데 이것을 갈아 밀 95%, 콩 5% 정도의 비율로 섞어서 간 다음, 섞어 초록색 곰팡이가 필 때까지 한번 더 발효시킨다. 그렇게 발효가 된 덩어리를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1~2cm 정도 되는 작은 조각으로 부스러트린 뒤, 지름 45cm, 깊이 20cm 정도 되는 항아리에 담고 물, 소금 등을 넣어 발효하고 숙성시켜 해와 이슬을 그대로 받게 두며 비가 올 때만 실내에 들여놓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밀의 녹말이 당화되면서 단맛이 생기면 첨면장이 비로소 완성된다.
“쪼옵. 이게 첨면장 고유의 맛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상한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아무튼 이렇게 만든 첨면장을 가지고 카라멜이나 조미료를 섞어 나름의 공정을 통해 까맣게 표현하면 대한민국의 중국집들 중 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라이언표 춘장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선 그 라이언표 춘장을 쉽게 구할 수 없으니 귀찮지만 이렇게 만들어야만 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얼추 비슷한 맛은 나겠지.”
기대를 품고 첨면장에 이것 저것 의약당 당주로부터 받아온 약재들을 조미료 삼아 섞어서 콩을 짜서 만들어낸 콩기름을 가지고 볶으니 냄새부터 시작해서 어딘가 춘장 비스무리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한다.
“돼지 기름인 라드로 볶으면 더 맛있겠지만 춘장은 대충 이걸로 됐다고 치고...이제 수타를 칠 차례인가?”
현대에서야 수타면을 만들어 내는 면장을 고용하는 것보다 전선만 연결해서 미리 준비해둔 반죽을 기계로 뽑는 면이 더 비용 측면에서 저렴하기도 해서 기계로 면을 만드는 게 스탠다드가 되어버렸지만 이곳에선 수타면보다 간편하게 면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짜장면은 왠지 수타면이 진짜같은 느낌이 있지.’
춘장을 볶기 전에 숙성시킬 수 있게 해둔 반죽을 툭툭 문질러 나무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 위에 내려치기 전에 약속한 시간보다 살짝 이르게 다진이가 인사를 하며 나타났다. 입모양으로 왔냐면서 눈으로 인사를 한 나는 다시 수타에 집중하여 밀가루를 반죽 위에 뿌리고 반죽을 테이블 위로 몇 번 쾅쾅 내리쳤다.
다진은 용운이 뭘 만들어 준다길래 왔더니 내심 예쁘게 꾸미고 왔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색함이 묻어나오는 인사를 해버렸다. 그런 자신에게 용운은 슬쩍 눈인사를 하고선 밀가루 덩어리를 가지고 넓은 나무 탁자 위에 몇 번 내리쳤다.
팟-퉁퉁-콱
용운이 내리친 탁자에서 피어오른 밀가루가 환하게 비치는 태양 빛과 어울려 그 모습이 다진에겐 퍽이나 몽환적으론 느껴졌다.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용운의 팔근육은 이상하게도 눈에 들어왔고 오늘따라 용운의 근육이 유난히도 우람하면서도 매끈해보였다.
용운이 밀가루 덩어리를 양 옆으로 당기며 위 아래로 슬쩍 슬쩍 흔들자 밀가루 덩어리가 길게 늘어났다. 용운이 반죽을 반으로 접어 베베 꼬아 주고 다시 늘리며 이를 반복하자 밀가루 덩어리는 용운의 손에서 반죽은 어느새 가래떡처럼 길게 여러 겹의 선으로 변해 있었다.
“어? 와...”
촬영할 땐 되도록 조용히 하라는 것도 잊고 용운의 힘이 느껴질 것만 같은 박력 있는 면을 만드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반죽을 몇 번 그렇게 반으로 접었다 늘이면서 가늘게 변한 면을 만들어낸 용운은 양 끝의 반죽 덩어리를 떼어내더니 팔팔 끓는 물에 가늘어진 면을 뭉치지 않게 흩어 넣고는 휘휘 저었다. 그 뒤 둥글게 생겨 가운데가 오목한 확(鑊)[웍]에 살짝 검은 빛과 함께 광택이 감도는 무언가를 한 덩어리 넣더니 거기에 파를 듬성 듬성 잘라 넣고 볶기 시작했다.
‘양파가 있었으면 좋았는데 말이지. 어쩔 수 없지. 없는 건 없는 거니까. 양파 이전에는 파를 넣었다고 한 기록도 있었고. 내가 나중에 꼭 구하고 만다.’
볶으면 단 맛이 나고 익으면 말랑말랑해지는 양파는 한국식 중화요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였지만 아직 중원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 아니었다. 이를 구하려면 서아시아로부터 교역을 통해 구해와야 했다.
당장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은 머리 한편으로 밀어 넣고 웍에 재료들을 넣고 춘장과 함께 다시 한번 볶아내기 시작했다.
용운이 둥글 넓적한 확을 가지고 재료를 강한 불로 볶아내는 그 장면이 다진에겐 멋있게 느껴졌다. 용운이 확을 들고 내릴 때마다 거대한 용운의 팔근육이 더욱 불뚝해지면서 선명해 보였다. 웍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불길이 조명처럼 용운을 비췄다.
‘불을 다루는 남자는 정말 멋있는 거구나...흐으응.’
안타깝게도 용운의 굵은 팔근육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끓는 물에서 익혀낸 면을 꺼내 체에 밭쳐 물기를 탁탁 털어내곤 도기로 된 그릇에 모양 좋게 담아놓더니 확으로 불을 가지고 볶아낸 무언가는 따로 그릇에 담아선 가지고 나왔다.
“휴, 다 됐다. 다진아. 기다렸지?”
“으,응? 아니에요. 기다리긴요.”
괜히 용운의 팔근육을 의식해서인일까 아니면 저번에 보았던 용운의 아름다운 육체가 떠올라서일까 다진은 용운을 편하게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앞치마를 풀어낸 용운은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더니 자신이 만든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설명해주었다.
“자, 여기 면 위에 이 검은 빛이 감도는 양념을 얹어서 슥슥 비벼주면 돼. 양념은 다진이가 원하는 만큼 국자로 덜어 넣으면 되는데 일단은 내가 비벼줄테니까 한번 맛 보고 싱거우면 좀 더 넣어서 간을 맞추는 게 좋을 거야.”
“응.”
용운이 비벼준 그릇 안에는 윤기가 감도는 짙은 고동색의 양념에 비벼진 면이 고소한 향기를 풍기면서 김이 폴폴 피어오르고 있었다.
“와아...맛있겠다.”
자신도 모르게 젓가락을 들어 한입 밀어넣자 복합적인 맛이 기름과 함께 어우러져 이전에 먹어본 적 없는 맛과 여러 가지 향을 선사했다.
‘피자나 찜닭이랑은 또 다른 맛이야.’
순식간에 그릇을 비울 정도로 몰입해서 먹고 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보자 자신이 먹고 있는 걸 용운이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돼지같이 처먹었어...미쳤나봐~ 아무리 음식이 맛있었도 그렇지!’
용운과 눈이 마주치자 용운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이내 용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소리가 들리자 다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진짜 맛있었나 보다. 다진아.”
“어? 네.”
“여기 입 주변에 잔뜩 묻었네. 그렇게 맛있었어?”
‘어떡해!~~~~ 수다진. 바보처럼 입 주변에 묻히고 먹은 거야? 멍청이같으니라고.’
자책을 하고 있는 다진과 다르게 용운은 어릴 적 사진 속에서 짜장면을 먹은 자신이 입 주변에 잔뜩 짜장 소스를 묻히고 있던 것처럼 다진이 그렇게 짜장 소스를 입 주변에 묻히고 있으니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땅히 다진의 입을 닦아줄 티슈같은 것이 없어 엄지와 검지 손가락 끝으로 다진의 입에 묻은 소스를 슥슥 닦아 주었다.
“쪼옵.”
얼굴이 빨갛게 변한 다진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멍하니 쳐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다진의 입을 닦고 나온 소스를 빨아먹자 다진은 묘하게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억.’
용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진에게 조금 더 줄까하고 물었다.
“어? 어...많이 먹은 것 같은데요...”
“그래? 다른 사람들한테 줘야 하나? 아직 좀 남았는데.”
당황한 다진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제대로 인지를 못하면서도 용운이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 먹고 싶기도 해서 그냥 더 달라고 했다.
“그럼 더 줘요. 더 먹을 수 있어요!”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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