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러니까 수천수 태상호법 입으로 저와 단둘이 어느 누구에도 말해선 안된다는 비밀을 듣고서 왔다 이거죠? 약속한 것도 있으니 본인 입으로 말하긴 뭐하니까 교주인 저에게 직접 들으라고?”
“크크흠, 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대승적인 관점에서 봐주십사 하는 게...”
“아아. 그러시구나. 둘 밖에 모르는데 저는 어디에도 이야기한 적이 없거든요. 비밀을 꼭 엄수해야 한다고 태상호법님이 직접 말하셨는데. 아주 입이 싼 분이셨구나. 우리 태상호법님이. 이거 앞으로 내가 태상호법님하고 대화하는 건 조심해야겠네. 비밀이고 뭐고 없는 분이라는 걸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혼잣말인척 넌지시 수천수 호법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핀잔을 줬다.
“교주님,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을 좀 들어ㅈ...”
“하아....”
주저리 주저리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풀어보려는 좌호법 유웅(劉雄)의 말을 한숨으로 가로막은 나는 세 사람을 쓰윽 훑어보았다. 일부러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으니 진득하니 폼을 잡고 있던 할아버지들이 움찔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니, 두팔 형님은 자기만 믿으라고 하더니 왜 교주님 앞에 와선 말 한마디 못 꺼내? 그리고 둘째 형님인 웅이 형님은 평소엔 책 많이 읽었다며 그렇게 똑똑한 척은 다하더니 교주님 하나 설득을 못하고. 우리가 지금 뭐 우리만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툭 까놓고 말하면 되잖아?’
평소엔 장비의 후예라면서 시원한 척은 다 하던 하얀 털복숭이 셋째 형님과 유현덕의 후손이라면서 긴 수염만 매만지는 민머리 둘째 형님도 교주님 앞에서 쩔쩔 매고 있으니 원로원의 막내 호법인 관자룡(關子龍)은 갑갑할 지경이었다.
‘안되겠다. 이렇게 있다간 죽도 밥도 안되겠다. 형님들만 믿고 기다릴 수 없구나. 내가 나서야겠어. 이 관자룡이 아니면 안되는 게야.’
“교주님, 감히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붉은 기가 감도는 홍안의 막내가 잠자코 있다가 나서자 두 사람은 막내가 또 사고를 치려고 하나 싶어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네, 관호법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짐작 가는데 한번 말씀해보시지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사호법이 어디 남입니까? 신교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저희가 강해지면 신교가 강해지는 것이고 신교가 강해지면 신교가 안전해지는 거잖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는...크큼, 아무튼 저희가 형님 호법처럼 건강하고 강해지면 신교를 보살피는데 더욱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테니 이는 신교에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혓바닥이 긴 관호법의 수작을 듣고선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빙빙 말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솔직하게. ”
“도와주십시오. 저희도 더 늙기 전에 반로환동하고 싶습니다.”
관자룡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나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안 선생님처럼 후덕하게 생긴 양반이 고개까지 숙이면서 말하니까 조금 그러네...’
내 앞에 있는 세 사람은 평생을 신교에 매여 신교의 사람들만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었다. 초절정고수가 된 세 사람은 천산을 나가 적당한 세가에 장로 자리 하나는 받아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교에 오래 충성한 사람들에게 보답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좋습니다. ㄱ”
“우어어어어!”
“형님들! 됐습니다! 됐어요!”
방금 전까지 다 죽어가는 자세로 불쌍한 듯이 있던 할아버지들은 나의 답을 전부 듣지도 않고 마치 월드컵 4강 신화를 목도한 한국인들처럼 두 팔을 치켜세우며 열광했다.
“아아, 아니, 이 교주가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벌써부터 이래서야...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그러나 이내 이어지는 나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두 팔을 들고 있던 상태로 굳어버렸다.
“우선, 제가 알려드린 걸 따른다고 해서 세 분이 모두 탈태환골을 하여 반로환동하고 화경에 오를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혹시라도 이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원망을 받을 수도 있기에 성형외과 수술을 할 때 동의서를 받는 것처럼 부작용이 있거나 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변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렴요. 깨달음이라는 건 불도(佛道)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것이기에 전하는 이의 깨달음을 듣는다고 꼭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장부일언 중천금(丈夫一言 重千金)! 어차피 다 늙어서 죽을 날만 받아놓은 사람들인데 더 늙기 전에 도전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저희 원로들이 그렇게 한 입으로 두말하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각자 다른 스타일이 엿보이는 세 사람의 확답을 들은 나는 추가적인 조건을 꺼냈다.
‘수 호법처럼 젊어지면 일 좀 시켜먹어야겠어. 뛰어난 고수가 있으면 뭐할거야. 써먹질 못하면 무소용인데. 황희 정승을 부려먹으시던 세종대왕님처럼은 아니더라도 90살까지만 나랑 같이 일합시다. 여러분.’
세 사람은 교주의 눈빛에 이상하게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뭐지?’
“여러분들이 이렇게 확고하게 의지를 보이시니 알겠습니다. 신교를 위해 평생 고생해온 세 분에게 감히 제가 시정잡배(市井雜輩)처럼 야박하게 굴 수는 없는 법이지요. 다만, 이걸로 건강해지신다면 여러분들이 젊었을 적처럼 앞으로 신교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그저 지나가는 부탁으로 들었는지 세 사람은 건성 듣고선 굳어있던 자세를 풀고 내 손을 한번씩 부여잡고 흔들었다.
“하하하, 저희만 믿으십시오. 젊어질 수만 있다면 튼튼해진 몸으로 신교를 더욱 융성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될 수 있어! 아자!”
“이거 이거 다시 젊어지면 왕년의 잘생긴 날 보고 지나가는 과부들이 가만두려나? 크크큭”
마지막에 묘한 욕망이 담긴 두팔 할아버지의 말을 듣더니 두 분이 피식 웃길래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들었다 놨다 하는 밀당은 그만두고 세 분에게 똑같이 천수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던 해설서(?)를 꺼내 보이며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달해드렸다.
“허허, 이런 것을!”
“그동안 내가 헛살았구려.”
“그렇지. 소우주라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내 인체를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처럼 대했구나.”
“오오오. 참으로 신비하도다. 대단하십니다. 교주님, 어찌 이런 발상을!”
초절정고수가 될 정도라면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세 사람은 금방 수 호법처럼 깨달음을 얻고 부공매에 접어들었다.
‘세 분 모두 건강해지셔서 앞으로 오랫동안 저 좀 많이 도와주세요.’
세 사람의 부공삼매를 좀 지켜보던 나는 밖에 나와 저번처럼 경계를 서면서 누군가 방해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지켰다.
분명 저번의 탈태환골처럼 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세 사람은 태상호법 할아버지보다 걸리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수 할아버지 때보단 기네.’
기다리고 있는 중에 수천수 할아버지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는지 원로원 건물로 찾아오셨다.
“오호라, 교주와 태상호법이 나눈 신교의 천금같은 기밀을 고작 하루만에 털어놓으신 분이 몸소 행차하셨군요. 이토록 입이 가벼우신 분이라는 걸 제가 몰랐습니다.”
“교주님, 제 말을 들어보시면...그게 아니라는...”
“앞으론 할아버지랑 무슨 약속을 한다든가 비밀 이야기를 할 때 주의를 좀 해야겠어요.”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설명을 드리자면.”
“보통 약속 깨는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던데...흐음.”
용운이 장난스레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수천수는 당황해서 일이 어찌되서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해명을 하려고 했다.
“농담입니다. 이야기는 세분한테 잘 들었어요. 그래도 다음부턴 주의해주세요. 이번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교주와 호법간의 기강을 살짝 잡은 나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보단 오래 걸리네요.”
“뭐, 깨달음이라는 게 제각기 다른 법이니까요. 똑같은 풀을 보고도 감상은 다른 법이지 않겠습니까?”
“흐음.”
용운은 혹시라도 세 사람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탈태환골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염려가 되었다. 수천수는 자신의 말을 듣고 용운이 걱정하는 바를 이해했는지 너무 심려치 않아도 된다고 다독였다.
“사람들이 왜 신공절학을 얻으려 하겠습니까? 다 그만한 깊이가 있으니 그를 익힌 이들은 절학을 만든 종사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면 대부분 고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구상한 신공에 대해 믿음을 가지세요.”
“그래요?”
우리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내 내부에서 기운이 수습되기 시작하고 세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이고, 냄새야. 형님 저리로 가시오! 코가 썩을 것 같소!”
“너는 냄새가 안 나는 줄 아느냐? 허허, 백로 노는 곳에 온 까마귀같구나. 새까매져 가지곤.”
“밖에서 교주님 기다리고 있는데 잡소리들일랑 적당히 하시고 빨리 닦고 치웁시다. 드럽기는 매한가지인데 뭘. 이래서 교주님이 수건을 갖다 놓으셨구만.”
세 사람의 말을 들은 용운이 자기도 모르게 수천수를 쳐다보자 수천수는 헛기침을 하게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그게 탈태환골을 하면 말이죠. 쌓여 있는 노폐물이 녹아서 나오는ㄷ...”
한참을 지그시 쳐다보는 용운에게 수천수는 자기도 모르게 변명하듯 연유를 설명하려고 했으나 용운이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손절했다.
“괜찮아요. 제가 치우는 것도 아닌데. 냄새가 좀 새어 나와서 살짝 거슬리긴 하지만. 다 끝났나봐요. 여러분들, 괜찮죠?”
안에 들어가도 괜찮겠냐고 물은 뒤 상관없다는 답을 듣고서 방문을 열자 수천수 할아버지 때처럼 40대의 아저씨들 세분이 똑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서 계셨다. 할아버지일 적이야 키가 비슷비슷해서 젊어진 지금도 키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갑자기 확 젊어지니까 정확히 누가 누군지 헷갈리네.’
세 사람 모두 이전에 비해 수염도 없어지고 머리도 풍성해진 덕분에 누가 둘째고 누가 셋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홍안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분이 막내 호법이시고. 아! 왼쪽에 서 계신 잘 생긴 분이 셋째 호법이신가? 오른쪽에 있는 분은 잘생겼다기보단 듬직한 쪽이니까.’
지나가듯이 무시하고 넘어갔긴 했지만 분명 자기 입으로 젊어지면 잘생겨져서 과부들이 따르면 어떻게 하나 싶어졌다고 했던 걸 기억한 나는 왼쪽에 서 있는 미남부터 확인차 축하를 전했다.
“신교의 축복입니다. 4명이 모두 반로환동을 하시다니! 그나저나 이거 이거 너무 젊어지셔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제가 보기에도 좋아보입니다. 교주님.”
“한번 제가 누가 누군지 맞춰볼까요? 두 분은 얼추 짐작이 가요. 맨 오른쪽에 서 계신 분이 붉은 기가 감도는 얼굴로 보아 막내 호법님이시고. 맨 왼쪽이 셋째 호법님 맞죠? 아까 잘생기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남은 것은 유 호법님뿐이니 가운데에 계신 덩치 좋은 분이 유 호법이시겠네요.”
누가 누군지 알겠다면서 세 사람을 구분하며 점찍듯이 가리키는 용운의 말이 끝나자 네 명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