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다진의 육감(?)을 바탕으로 한 만류에 며칠간 길게 고민을 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바둑에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이 있다. 혼자 고민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단 호법 할아버지 만나고 노선을 정하자. 그게 맞아.”
“...해서 인체는 결국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정보의 한계로 인해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경락체계는 입체보단 평면에 가까운 형태이죠. 경락과 경락간의 연결을 대맥과 세맥이라는 분류로 나눠서 어찌어찌 연결해보려고 했지만 실제론 대맥에 집중하고 세맥엔 소흘해지면서 기의 연결이 유기적이라고 보기도 애매합니다. 기의 순환 측면에서도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결국은 방향이 일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기가 돌아다니는 선이 하나라는 것도 비효율적입니다. 선이 하나밖에 없으니 선을 틀어막아 기의 흐름을 막는 점혈 수법같은 것들이 가능한 거죠. 그러나 제가 구상한 방법대로 하면 점혈같은 걸론 막을 수 없어요. 경락의 선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하면서 늘어난다면 고작 몇군데 점으로 기를 불어넣어 틀어막는다고 기의 흐름이 막히겠습니까?”
용운이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그려온 그림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천마심공에 대한 해석을 들은 수천수는 너무 놀라서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본 용운은 자신이 구상한 방법이 너무 말도 안될 정도로 충격적인가 싶어서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순전히 용운의 오해였다.
실상 수천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허허허허허, 교주님께서 진정 신의 무공을 만들어 오셨구나. 감히 세상에 퍼뜨려선 안될 정도로 어마무시한 비전이 분명하다. 신교의 홍복(洪福)이로다.’
평생 무공을 익혀온 자신은 인체라는 틀에 갇혀 경락에 대해 교주처럼 생각의 방향을 전환해볼 시도따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곱씹으면서 혹시 잘못된 부분이 없나 되짚어보던 중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쳤다.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고 입으로만 떠들면서 정작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진실로 인체를 소우주로 대해본 적이 없었구나! 틀에 박혀 있던 건 나였어!’
자신의 구상을 듣고 낯빛이 바뀔 정도로 놀라는가 싶었던 수천수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부공매(浮空三昧)에 이르자 용운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뭐야, 이 할아버지 왜 갑자기 가부좌 틀고 빛내면서 공중에 떠오르는 건데...’
무공밥을 먹어온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 용운도 이 할아버지가 뭔가 깨달음을 얻었구나 싶어 주변에서 괜히 소란을 피우거나 방해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방 밖으로 나와 문 앞에서 호법을 섰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연신 나오는 걸 겨우 참을 때쯤 기의 수습이 끝났는지 안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호법님, 들어가도 될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허허허. 이거 참...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좀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뭔가 아까보다 기운차졌네?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고 해야 되나.’
초절정고수의 경지에 있는 노인인만큼 70대같지 않게 정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주 젊게 쳐줘봐야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던 수천수 호법의 목소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같지 않게 활기찬 기운이 느껴졌다.
‘호오, 뭔가 경지의 상승이 있긴 했나보다. 근데 초절정이 저 정도로 뭔가 크게 깨달으면...혹시?’
안에서 뭔가 부산한 듯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 호법이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교주님.”
“예.”
방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피자 호법은 어디로 갔는지 안보이고 한쪽에는 거무튀튀한 뭔가가 잔뜩 묻은 옷가지가 놓여져 있었고 날도 추운데 문이 활딱활딱 열려 있었다.
‘아니, 이 할아버지가 너무 기운이 넘치시나...오늘은 날도 평소보다 추운데 노인네가 문을 이렇게 열어놨어.’
“크흠. 교주님.”
“네? 누구세요?”
주변을 살피다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노인은 더 이상 그 곳에 없었다.
“그러니까 제 말을 듣고 실행에 옮겼더니 경지가 오르셨다? 경지가 올랐더니 몸도 자연스럽게 탈태환골이 되었고?”
“거참....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어쩌다 애 가져서 속도위반 결혼하는 친구나 할 소리는 하지 마시라구요.’
아무리 많이 쳐줘야 40대 초반도 안되는 얼굴이 되어 자기 아들하고 동년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젊어진 청년 수천수는 어울리지 않게(?) 방금 전까지 쓰던 노인의 어투로 말하며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저번에 본인이 직접 마공은 조심해야 되니까 무공에 대한 성급하고 과한 욕심은 나쁘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누군 고민고민하다 찾아왔는데...”
“하하하하, 제가 그랬나요?”
‘그랬잖아! 나는 그래서 혹시라도 잘못될까봐 겁도 나고 무서워서 고민하느라고 감히 시도 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손녀도 날 막고 못하게 하더만. 이 사람들 호법 집안 맞아?’
다진에게 괜히 불똥이 튈 것 같은 손녀의 위기를 감지했는지 청년(?) 수천수는 노인의 화법으로 진지해진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굳은 경락을 풀어서 무위로 돌리는 과정부터 말씀드리자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했다면 정말 위험했을 겁니다. 기존의 무공을 익힌 사람이 새롭게 교주님께서 만드신 신공(神功)을 받아들여 경락을 전환하는 것은 경지가 높을수록 위험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고비를 어렵사리 넘어섰더니 이렇게 경지가 오르게 되는군요. 허허.”
‘어린 얼굴로 그렇게 할아버지 말투 쓰지 마시라고요...그리고 말로만 위험하다고 하지 표정은 환해가지고 웃으면서 이야기해봐야 설득력 없어요.’
그나마 탈태환골이 적당히(?)되어 손주뻘이 되지 않고 아들뻘에서 반로환동이 그친 걸 당연하다고 해야할지 의문스러운 수천수는 주의가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결론은 하나였다.
‘초절정고수의 벽을 간단하게 깨고 화경으로 만들어 주는 방법을 내가 만들어놓고 안할 수는 없지.’
마을에선 시간이 지나자 수 호법의 회춘(回春)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버렸다.
“세상에! 마상에! 수가네 할아버지 소식 들었어? 완전 늙은이였는데 청년이 되어버렸다네!”
“내가 듣기론 이제 아들하고 형님 동생하게 생겼다던데?”
“수가네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그렇게 잘생겼다더만.”
“그 집 아들인 수호진 씨마냥?”
“아들내미는 오히려 젊었을 적아버지보다 인물이 못한 거라던데...?”
“그래? 그렇게 잘생겼었다고? 난 처음 알았네.”
“왜 관심있어?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어떻게 이씨네가 수가네 할아버지하고 잘 좀 해보게? 수가네 새어머니 생기는 거야? 한 여사한테 ‘자네’라고 부르고 싶어?”
“아이고! 이 사람들~ 남사스럽구로. 뭔 얘기를 하는 게야~”
“그러면서 얼굴은 왜 빨개지누? 무슨 상상했어, 이씨? 나한테만 말해봐. 어디 가서 이야기 안할게..”
“크크큭. 그만 놀려. 이씨네 얼굴 터지겠네.”
아줌마들 사이에선 젊어진 홀아비 수천수에 대해 별별 이야기를 다하는 것처럼 남자들 사이에서도 젊어진 수천수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오마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희수(喜壽 77세)가 내일 모레인 할배가 청년이 되고.”
“교주님의 은총을 받고선 젊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
“우리 어매도 모시고 교주님 좀 뵈러 가야할까? 엊그제 밤에 무릎이랑 허리가 쑤시다고 잠을 잘 못 주무시던데...”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수가네 할아버지는 호법인지 뭐신지 한다고 젊을 적부터 수가네 할머니 속 꽤나 썩여 가면서 툭하면 폐관이니 뭐니 하면서 일 안하고 수련인가 해싸서 그런 거래.”
“헤엥, 좋다가 말았네. 나도 어떻게 회춘 좀 해볼까 싶었는데”
“아무리 교주님의 은총을 받을라고 해도 적당히 어느 정도는 무공이 받쳐줘야 된다는구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더라고.”
무공고수 근처도 못 가본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이럴 정도이니 동네에서보다 양로원이나 다름없는 원로원에선 더 성화인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형님! 이런 경사가! 신교에 다시 없을 축복이 내려왔군요. 진심으로 형님의 반로환동을 감축드리옵니다!”
“하하하, 뭐 이런 걸 가지고...”
“이런거? 천수 형님! 다른 것도 아니고 반로환동 아니요! 반!로!환!동! 얼굴 팽팽해진 것 좀 봐!”
“셋째야, 니 나이가 있지. 이게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이냐.”
“둘째 형님! 이게 어찌 호들갑 떨 일 아니오? 세상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시오. 다 늙어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 번듯한 청년이 되어 왔는데 이게 놀랍지 않느냐고! 넷째야, 내 말이 틀렸느냐?”
“셋째 형님 말이 맞소, 같은 초절정끼리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이요. 낼모레 관짝에 들어갈 우리 나이에 반로환동이라니! 난 다른 것보다 우리같은 노인네의 몸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년은 더 정정하게 살 태상 형님이 너무 부럽소. 요즘은 소화도 잘 안되는 나이라서 예전처럼 아무거나 막 먹을 수가 있어야지. 거 피자인지 뭔지 교주님이 이것 저것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게 해주시는데.”
“그건...그렇지.”
서로 의형제를 맺고 오랫동안 함께해온 늙은 동생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수천수는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괜히 내가 먼저 그런 약속을 해가지고...’
그런 수천수의 속도 모르고 셋째인 장두팔(張頭八)은 엊그제까지만해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들어하더니 부러워 죽겠다며 젊었을 때나 하던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발광을 칠 기세였다.
“아니, 우리가 한날 한시에 죽지는 못해도 그 옛날 내 조상님이신 만인지적(萬人之敵) 장환후(張桓侯) 님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본받아 우리도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자고 하지 않았소? 우리가 나눈 그 결의는 그저 말뿐이었던 게요? 내가 좀스럽게 콩 한쪽을 나눠 먹자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화경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연유에 대해 조금만 듣자는 건데! 우리 사이에 내가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오, 형님?”
“셋째야!”
“둘째 형님은 반!로!환!동!해서 저렇게 청년으로 젊어지고 싶지 않은 거요? 둘째 형님이나 나나 동생이나 첫째 형님하고 무슨 경지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우리끼리 수준 차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반끗 차이도 안 나지 않았소! 그날 그날 몸 상태에 따라 누가 우위를 점하는지 정도의 차이일뿐인데. 난 솔직히 첫째 형님이 너무 부럽소. 우리가 지금까지 무공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뭐요. 죽기 직전에라도 화경 끄트머리라도 한번 밟아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 이러는 거 아니오!”
수천수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 알려준 것을 어디 함부로 퍼뜨려선 안될 귀한 비전(祕傳)이라면서 교주에게 이를 둘만의 비밀로 아서 숨겨야 한다고 굳게 약조를 했건만 오늘 내일하는 동생들을 보고 있자니 입을 닫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저기 그게 말이다.”
“이제 알려주는 게요? ”
수천수가 어떻게 해서 화경에 올랐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려줄 것 같자 방금 전까지 드러누울 기세였던 두팔이 황급히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잘 들리지 않는 귀를 기울였다. 나머지 두 사람도 관심이 없는 척하던 표정으로 슬금슬금 수천수의 옆에 와 자리를 잡았다.
“하아...흐음...어디 가서 말하면 안되는 건데...”
“거 우리가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오? 우리만 믿으시오.”
“비밀은 꼭 지키겠습니다.”
젊었을 적 결의를 맺을 때처럼 비장한 표정을 한 세 사람을 둘러본 수천수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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