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사람들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 서로가 모여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정의되는 문화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고 문화가 발전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먹고 살 만해져서 여유가 생겨야 한다는 것.
스키를 타기 어려운 어린 아이들을 위해 썰매를 만들어 주고 그보다 큰 10대의 아이들을 위해 스노우 보드를 만들어주자 각기 취향에 맞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겨울 스포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모직물을 팔아 번 식량 덕분에 먹을 것이 풍족해지자 가능해진 일이었다. 먹고 살기 바쁜 집단에게 문화생활을 즐기라는 것만큼 허황된 말도 없었다. 당장 내일 굶어 죽게 생겼는데 누가 문화생활을 하겠는가.
‘영화관에 가는 게 사치스럽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지...월세랑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생활비는 빠뜻했으니까.’
1달에 몇 번 되지 않는 영화관람과 어쩌다 한번 즐기는 치맥은 취준생인 내가 겨우 즐길 수 있는 최대의 사치였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난한 취준생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남들이 해외여행을 가서 5성 호텔에 묵는 것과 같은 큰 마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노우 보드를 타면서 바람을 가르고 내려가는 도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지내는 게 오히려 현대에 있을 때보다 여러 가지로 훨씬 풍족한 것 같단 말이지. 집세 걱정도 없고 먹을 걱정도 없고 이렇게 보드도 마음껏 매일같이 타고.’
라운지에 아이들이 몰려올 때면 무척 시끄러워질 때가 있었다. 라운지에선 아이들이 먹는 것 말고 딱히 할 만한 게 없었는데다 어른들은 눈에 하도 굴러 아이들 옷이 젖으면 난로에 걸쳐둔 겉옷이 다 마를 때까지 못 올라가게 했기 때문에 할 것 없는 아이들이 라운지 내를 오가면서 시끄럽게 구는 것이었다.
‘좀 시끄럽긴 해. 뭘 해야 조용히 시킬 수 있으려나...흐음. 게임?’
나는 아이들이 집중해서 조용해질 것 같은 놀이를 만들어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누가 더 먼저 높은 관직을 올라 퇴관하는지를 겨루던 ‘승경도놀이’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내가 어릴 적에는 자본주의적인 관점으로 해석된 재테크 놀이인 ‘부루마블’이 있었던 것처럼.
이를 적당히 섞어 ‘중원제패(中原制霸)’라는 이름의 실로 마교스러운 놀이를 만들어냈다. 무림고수가 되어 신교가 중원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내용을 담은 게임이었다.
나무로 만든 판과 나무로 된 말. 나무 주사위와 함께 얇은 나무 조각에 황금열쇠 조각을 전면에 새겨놓고 후면에는 벌칙이라든가 행운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불확실성을 주어 단순히 전략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확률이 개입할 여지가 있도록 게임규칙을 만들어 주자 아이들은 탁자 몇 개를 잡고서 게임에 푹 빠져 들어버렸다.
‘이제 좀 조용하네. 슬슬 그걸 가져와볼까?’
“교주님, 들고 계신 나무 통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 낯설면서도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태걸욱과 수호진은 분명 라거 특성상 에일에 비하면 보리와 홉의 향만 살짝 나서 특별히 강한 향같은 것이 날리도 없건만 내가 가져온 나무통이 술통인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 같았다.
‘이 아저씨들, 아주 개코구만.’
따뜻한 온도에서 ‘상면 발효’시키던 맥주는 저온에서 하는 ‘하면 발효’를 하게 되면서 변혁을 맞이했다. 저온숙성이 되어 라거링(lagering)이 끝난 맥주는 탄산가스가 생성이 되고 맥주의 신선함을 높이며 찌꺼기라든가 불필요한 잡맛이 나는 것들이 가라앉게 된다. 하면 발효로 만들어진 라거가 에일에 비해 강한 강점은 가벼움이다.
“캬아!~”
라거를 마셨을 때 저절로 나오는 이 탄성은 시원하고 깔끔하며 탄산이 주는 강한 청량감은 겨울이라서 차게 식혀져 있어서 그런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교...교주님? 그건...”
시음하기 위해 살짝 따라내서 혼자 마셨더니 두 사람의 눈은 맥주에 대한 갈증을 갈구하며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무서워.’
“태걸욱 아저씨, 준비해왔어요?”
“여기 있습니다.”
내가 태걸욱 아저씨에게 특별히 부탁했던 그것은 유럽 사람들이 맥주를 마실 때 사용했던 주석잔이었다. 유리잔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상황에서 도기로 만든 잔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주석으로 만든 잔은 냉기를 오랫동안 유지 시켜주기에 시원한 맥주를 즐기는 데 있어 제격인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주석잔은 냉기를 유지하면서 먹기엔 좋은 잔이지만 단점도 있었는데 금속이라기엔 너무 물러서 바닥에 떨어뜨리거나 하면 찌그러진다는 것과 거칠거칠한 수세미같은 것으로 문질러 닦으면 표면이 마모되어 상한다는 것이었다.
‘상품으로 보면 오히려 좋은 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 너무 튼튼하면 사람들이 또 사겠어?’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신들이 판매한 상품의 성능을 떨어뜨리거나 고장이 나도록 만드는 이유는 그래야만 다시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이게 바로 상업적인 기술이었다. 쉽게 쓰레기가 되면 안되지만 일정기간 사용하면 고장이 나도록 하는 기술.
구매자들에겐 사용 기간동안 만족감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걸 떠올리면 주석잔은 우리가 만들어 팔았을 때 꽤 오랫동안 수익을 보며 팔 수 있는 캐시 카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만들었지만 참 멋있는 잔입니다.”
“그러네요. 자, 한잔 드시죠. 두분 다.”
주석잔에 따른 맥주의 거품이 아주 아름답게 담기는 걸 본 두 사람은 술에 거품이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술에 거품이...?’
태걸욱은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목구멍에서 톡톡 터지는 탄산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술을 삼키자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이 술이 주는 시원한 느낌은 이전에 마셔본 술들과는 전혀 다른 쾌감을 전해주었다.
“교주님, 이 술은 뭐라고 부르는 술입니까?”
“맥주(麥酒)라고 합니다.”
“보리로 만든 건가요? 기이합니다. 시원하면서도 목넘김이 여간 개운한 게 아니군요. 생전 먹어본 적 없는 술입니다.”
“톡톡 튀는 탄산이 나름 색다르죠?”
“다만 독한 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려. 그러니까 좀 더...이거 가지곤 취할 것 같지가 않군요.”
한잔을 다시 따를 때쯤 다진이 화덕에서 갓 구운 피자 세판을 들고 왔다.
“자, 여기 피자 있습니다.”
“고마워. 다진아. 너도 한번 마셔볼래?”
“저도요?”
다진은 야크젖이라든가 양젖으로 만든 술과 다르게 상큼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맥주의 맛에 단번에 반해버렸다.
“와와, 이거 뭐야? 술 같은데 상쾌해요.”
“그래? 맥주라고 하는 술이야.”
‘그러고 보면 현대 법으로는 다진이는 미성년자인데 마시게 내버려둬도 되나? 여기에선 다진이 나이 정도면 뭐 냅둬도 되겠지.’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이제 고2 정도의 나이인 둘은 술을 못 마시는 나이였지만 이곳에선 이미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동년배들도 있는 걸 생각해보면 술도 못 마실 정도로 어린 나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얘도 그러고 보면 여기에선 적은 나이는 아니구나.’
잠깐 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다진은 입가심으로 건네준 피자를 먹더니 그 둘의 조화에 즐거워했다.
“피자랑 맥주랑 함께 먹으니까 끝도 없이 들어갈 것 같아요. 피자로 기름져진 입 안을 맥주가 싹 걷어내니. 이것은 완벽한 조화?”
“그러냐?”
수호진은 자신의 딸이 술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피자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아빠도 빨리 드세요.”
“그...그래.”
‘우리 딸 정말 잘 먹는구나.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신경했나보다. 열심히 일해야겠어...’
수호진이 눈을 돌려 탁자를 보자 다진이 3판이나 가져왔음에도 피자는 누가 먹은 건지 벌써 1판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세 남자는 위기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대로 있다간 다진이 입에 다 들어가겠구나.’
그때부터 네 명이서 경쟁적으로 피자와 맥주를 먹어치운 덕분에 나무통에 가득 들어있던 맥주는 동이 나버리고 추가로 가져온 피자 3판은 게눈 감추듯 사라져버렸다.
“후아...정말 정신 없이 먹은 것 같습니다.”
“피자와 맥주가 어울려서 그야말로 제 입 안에서 한바탕 신나는 축제가 벌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피맥이 두분 입맛에 괜찮았나 봐요.”
치맥(치킨+맥주)도 유명하지만 피맥(피자+맥주)도 꽤나 먹을만한 조합이다. 다진의 말대로 자칫 피자만 먹다보면 기름지고 느끼해져 물릴 수 있을 때 맛을 개운하게 씻어 없애주는 맥주 한 모금은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한없이 먹게 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론 피맥보다 치킨에 맥주를 먹고 싶긴 한데...아직 옥수수로 기름을 짤 정도는 아니니까.’
스마트폰으로 버튼만 누르면 배달이 되는 치킨은 현대에서 3만원에 가까워져 더 이상 저렴한 서민들의 음식이라고 하기는 뭐하게 비싼 음식이 되어 버렸지만 이곳에선 그조차도 비싸다고 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풍에 걸리는 한이 있었어도 더 먹었지. 여기서 치킨을 만들어 먹으려면 3만원 이상의 노력과 비용이 필요할 거야. 아니 돈이 있다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지.’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달궈진 기름 속에 들어가 튀겨지는 닭이 주는 향기가 그리웠다. 그러나 튀김은 이 세상에서 아직 황제도 먹었을 리가 없을 정도로 매우 호화로운 음식이었다. 당장 튀길 기름을 구하려면 구할 순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먹을 양은 되지 않았다.
본인들은 모르는 상황에서 치맥을 대신할 상품을 품평한 셋의 행복하고 포만감이 느껴지는 표정만으로 중원에서 피맥이 잘 먹힐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창고에서 익어가는 첫 번째 맥주들이 중원의 시장에 피자와 함께 풀릴 날이 기대가 되었다.
‘기다려라, 중원 놈들.’
그 이후로 수장군과 태걸욱이 가끔씩 나를 찾아와 피맥 한번 어떠냐고 운을 띄우곤 했지만 팔 맥주도 부족한 마당에 모두 먹어치울 순 없었다. 물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인 모짜렐라 치즈도 마을 사람들이 먹을 양을 겨우겨우 감당할 수 있었지만 중원에 팔기 위해선 더 많은 물소를 데려오거나 키우는 물소의 숫자를 늘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맥주를 팔아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물소를 사서 늘려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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