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천마TV라는 채널은 나 홀로 무언가를 만드는 컨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모아 구독자수가 순식간에 30만을 넘어섰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 짧게 등장한 이후로 구독자들 사이에선 여성의 정체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나왔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하나였다.
-우리 천사님은 언제 또 나오실 예정?
-안돼! 돌아가! 아직 너희들의 정성이 부족하다!
-교주님! 교주님! 영상에 출연 중이신 신녀님이란 분을 뵙고 싶습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꼭 좀 이메일로 연락바랍니다. [email protected]
-채널장님, 한번밖에 안 나온 그 분의 영상만으론 저희들의 갈증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부디 불쌍한 구독자들을 배려하여 또 한번 그 분을 영접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그러던 중 채널의 주인이 사람들의 댓글을 보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영상을 올려놓았다.
-와, 천사가 아니라 여고수 컨셉인가?
-고글이 없는데 왜 저분의 얼굴은 찌푸려지질 않죠? 난 스키탈 때 고글 안 끼면 바람에 눌리고 바람 때문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지는데.
-CG니까요.
-진짜 영화다 영화. 신인인가? 처음 보는 마스크인데 청량감이 장난 아니네
-저런 얼굴이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과즙상인가 하는 그거냐?
-상쾌하고 유쾌한 골짜기 인정합니다.
-윗분들. 배경은 몰라도 사람은 CG가 아닌 것 같은데...
-CG고 아니고가 뭐 중요하냐. 그저 작품인 것을. 이너 피스~
-무례한 언사는 알아서 필터링합시다. 교주님께서 신도들을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푸셨는데 거위의 배를 가르진 말아야죠. 교주님, 많은 건 바라지 않을테니 그저 이렇게 소나기처럼이라도 생각나실 때 우리 천사님 영상 자주 올려주세요.
-스키 강사 20년차입니다. 기술이 너무 깔끔하네요.
-인정합니다. 장난 아니네요. 수준급의 스키 실력인 것 같음.
-님들 영상미가 진짜인거 나만 느낌?
-저도 동의해요! 영상미가 너무 아름다워요. 여자분 스키타는 씬을 중간에 컷 없이 논스톱으로 찍은 것 같은데...교주님이 직접 찍은 걸까요?
-그보다 배경이 어디일까요? 저런 곳이 있다면 한번 가보고 싶어요.
영상 속에선 다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키에 적합하게 내가 만들어준 복장을 착용하고 나무로 된 스키와 폴을 가지고 스키 기술인 플루크 파렌부터 시작해서 플루크 보겐, 패러렐 턴(평행회전)과 숏턴, 슈템 턴 등등 각종 스키 기술을 현란하게 아름답게 구사하고 있었다.
“고글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서...못 만들어줬는데 오히려 그게 더 잘 어울리네.”
긴머리의 소녀가 머리를 질끈 묶고 하얀 설경 위를 가파르게 활강하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인 모습이긴 했다.
“처음엔 익숙하질 않아서 엄청 넘어지더니 무공수련을 해와서 그런가 하체가 발달해서 그런가 금방 잘타게 되었지.”
자신이 찍어준다고 하자 유난히 예쁜 척을 하면서 몇 번이고 재확인을 한 끝에 컨펌을 받은 영상이었다. 그 때문에 다진이 혹시 너튜브가 뭐하는 건지 알고 있어서 그러는 건가 싶어 살짝 긴장했었다.
“다진이 덕분에 이젠 마을 사람들도 스키를 타게 되었으니 일종의 나비효과일까?”
매일같이 다진을 데리고 스키를 가르쳐주러 다녔더니 어쩌다 한번씩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다. 일일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스키를 하나하나 만들어줄 엄두가 나지 않아 어떻게 생긴 장비가 필요한지만 알려주고 장비가 준비된 사람에 한해 스키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제일 먼저 자신의 가족들과 내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의외로 다진이네 부모님이 아니었다.
“하하하, 교주님. 이런 재밌는 게 있으면 저희들에게도 알려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태걸욱 아저씨....?”
‘이 아저씨는 현대에 태어났으면 얼리어답터였을거야.’
“마누라가 예전같았으면 바느질 하느라 바빠서 제가 쉬어도 뭐라고 안했는데...요즘은 할 일이 없어져서 그런지 제가 집에 있으니 툭하면 뭐라고 하더군요.”
‘아...여기도 아버지들 대접은 다 똑같구만.’
태걸욱은 아내의 성화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진의 스키장비를 빌려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확인을 하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만들어 줘야만 했다.
‘그래도 장인 솜씨가 어디 가는 건 아닌가. 내가 만든 것보다 나은데?’
간단한 기초를 반복적으로 알려주자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금방 배워선 초급자 코스 정도의 높이라고 알려준 곳에 올라가 며칠 정도 오르락 내리락하더니 겁도 안나는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확실히 애들이 익히는 속도가 빨라.’
태걸욱 부부도 이내 아이들을 따라 중급자 코스로 알려준 높이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차차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마을의 뒤편에 있는 경사진 산비탈은 마을 사람들의 슬로프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좋은 점이 있었는데 그건 장비와 사람을 위로 끌어 올려주는 장치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스키장을 즐기기 위한 필수 시설은 다름 아닌 ‘리프트’였는데 우리 세상에서도 리프트의 탄생이후에 비로소 스키가 대중의 스포츠가 되었던 것처럼 리프트가 없을 땐 몇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 보면 금방 지쳐서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도 노동이 되어 질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신교의 장인들은 내가 만들어준 자동 베틀에서 착안을 했는지 한쪽에 무게추가 오가는 원형의 길다란 통을 짜놓고 거기로 무게추가 내려가면 반대편의 사람들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내리면 무게추가 올라가는 원시적인 리프트를 만들어냈다.
‘이 사람들 노는데 한 맺힌 것처럼 진심이네.’
덕분에 뒷산이 엄청 시끄러워졌지만 사람들은 식사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 밥을 먹고 다시 나와 한겨울의 스포츠인 스키를 즐기게 되었다.
“히잉, 더 타고 싶은데.”
“다진아! 밥은 먹고 놀아야지.”
“조금만 더 타고 가면 안돼, 엄마? 흐름 끊어지면 맛이 안나.”
“얼굴은 추워가지고 시뻘개져가지곤. 안돼! 그러다 동상 걸리면 어떻게 할 거야!”
여느 놀이공원의 부모와 아이처럼 떼쓰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확실히 놀다가 중간에 집에 갔다 오면 맥이 풀리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히 다진네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있는 집에선 식사시간만 되면 밥 먹으러 가자는 부모와 조금만 더 놀다 가자는 아이들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풍경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진아, 그냥 비탈 아래쪽에 다 같이 밥 해먹을 수 있는 휴게시설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네?”
“난방시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간단하게 면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으면 굳이 집에 오갈 필요가 없잖아.”
“진짜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 거기서 피자도 만들어 먹고 그러면 진짜 좋겠다! 그쵸?”
“피자도...?”
‘그냥 밥이나 간단하게 먹자는 거였는데 피자는 왜?’
화덕이 없다는 핑계로 내려온 이후로 피자 만들어 주는 걸 나중에 나중에 하며 미뤄두기만 했는데 다진은 이때다 싶었는지 휴게시설 메뉴에 피자를 끼워 넣었다.
‘요게 아주 은근히 고단수란 말이야.’
어떤 식으로 지으면 좋을지에 대해 다진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산비탈 아래쪽에 태걸욱과 그 부하들이 나서게 되었고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서 뭔가를 먹기도 하고 쉴 수도 있는 휴게 공간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거 참 재밌습니다.”
“그래요?”
태걸욱과 대장장이들을 비롯해 목수들까지 나서서 스낵공간을 짓게 된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겨울에 일을 시키게 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육각형으로 된 공간은 4면에는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도록 가마솥을 하나씩 걸어두고 가운데에는 장작을 태울 난로를 두어 물을 끓여 가습도 하고 온기를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입구의 반대쪽 벽에는 다진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화덕이 지어졌다. 가마솥이 걸어지는 곳은 기껏 장작을 데워서 만들어진 열이 아깝다 하여 육각형의 외부엔 다시 5각형의 온돌방 4개가 지어졌다.
“교주님, 이 곳의 이름을 무어라 하면 좋겠습니까? 편액을 만들어서 넣을까 합니다.”
건물을 다 짓게 되자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태걸욱 아저씨는 나에게 이 건물의 이름을 뭐라고 붙여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갑자기 물으면...라운지로 쓰려고 지은 건데...라운지를 라운지라고 하지 뭐라고 해?’
생각만 한다는 것이 당황한 탓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라운지?”
“라운지[鏍(작은 가마솥 라) 賱(넉넉할 운) 址(터 지)]라... 가마솥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넉넉함을 나누는 터라는 거군요....그 의미가 참으로 따뜻해서 좋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이해해준 태걸욱 아저씨 덕분에 편액에는 鏍賱址라는 글자가 새겨져 건물 입구에 매달리게 되었다.
원래의 용도는 스키를 타다가 쉬기도 하고 간단하게 점심같은 것을 먹을 만한 용도로 만들어졌던 라운지는 이곳에선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휴식을 하는 공간이 되어 스키를 타지 않는 사람들도 모여 노는 휴게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경수 어머니도 오늘 라운지에 가세요?”
“그럼, 라운지에 가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겠어. 준보 엄마도 피자 먹으러 가는 거지? 난 교주님이 만드셨다는 건 다 좋아. 이름도 얼마나 이뻐. 피자(사랑을 나누는 음식)라니.”
“전 거기에 들어가는 하얀 치주(欼 씹을 치 咮 부리 주)가 정말 좋더라구요.”
“새부리처럼 축 늘어지는 모양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딱딱해서 이빨이 아픈 츄르피랑은 정말 다르다니깐.”
“그쵸? 겨울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줌마들도 라운지 가시나봐요.”
“그...그러게.”
라운지도 그렇고 피자와 치즈도 그렇고...익숙한 이름이 주변에서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하게 된다.
이윽고 라운지에 도착하자 각자의 집에서 뭔가를 싸온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어 활기가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신교의 사람들에게 겨울은 각자의 집에 처박혀서 죽은 듯이 지내야 해서 지루하기만 했던 계절이었지만 이제 사람들끼리 모여 노는 계절로 새롭게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