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인류를 번성시킨 3대 작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얼 떠올릴까? 답은 쌀, 밀 그리고 옥수수다.
한국의 경우 사실 쌀 문화권에 편입되기엔 원래 있던 쌀의 북방한계선을 뛰어넘는 위치에 존재했지만 우리 선조들은 기어코 쌀을 한반도에서 키울 수 있도록 방법을 궁리한 끝에 마침내 쌀의 재배에 성공했다.
물론 북쪽이냐 남쪽이냐에 따라, 산의 높이에 따라 온도와 습도가 제각기 달라지고 쌀의 북방한계선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천산의 기후는 쌀을 키우기엔 잘 맞지 않았다.
‘딱히 품종변화를 시킬 기술도 없고 말이지.’
신교의 사람들의 주식은 감자와 옥수수 그리고 야크의 젖으로 만드는 추르피 그리고 양고기라고 보면 되었는데 좋은 음식도 하루 이틀이지 향신료도 많지 않은데 이것만 먹자니 내 입장에서는 질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밀을 먹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신교 사람들이 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먹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밀을 재배하기 위해선 엄청나게 많은 지력을 필요로 하는데 옥수수도 못지않게 지력을 많이 소모한다. 두 개의 작물을 한정된 재배지에서 한꺼번에 키우기에는 나일강 하구처럼 지력이 풍부한 게 아니었기에 둘 다 지을 순 없었다.
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신교의 어른들이 선택한 작물은 옥수수였다고 한다. 옥수수는 야크와 양에게도 먹일 수 있는 뛰어난 가축 사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수확 기간이 짧아 처음에 천산으로 도망쳐와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신교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당시엔 어쩔 수 없으면서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벌써 100년이 지났다. 옛날에야 당장 살아남아야 하니 급해서 그랬다지만 이젠 옥수수를 대신해서 충분히 밀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윗대에서 안 먹었으니 관습적으로 안 먹고 있던 것이었다.
왜 밀을 안 먹는지 기록들을 뒤진 끝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스위스에서도 밀농사를 짓는다 이 말이지. 여기 기후랑 비슷한 스위스도 짓는데 우리가 못 지을 이유가 있나. 무엇보다 감자튀김도 아니고 삶은 감자. 으깬 감자만 먹는 건 지겨워. 굳이 경로의존성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
그런 이유로 수장군에게 부탁해서 가져와 지금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것들은 바로 밀과 콩 그리고 보리와 홉의 씨앗들이었다. 밀은 따로 비료를 뿌려준다거나 지력을 올려줄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선 연작을 지을 수 없는 작물이다.
지력을 다시 북돋아 밀의 연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콩과 보리였다. 콩과 보리가 있으면 밀은 2년 3작을 할 수 있는 작물이었다.
“나머지 것들은 대충 왜 구해달라고 하시는지 어느 정도 연유가 짐작이 갔는데 이것 두개만은 뭐하려고 구해달라고 하신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장군이 탁자 아래쪽에 놓여져 있던 것을 가리켰는데 그 두가지 중 하나는 바로 천으로 감싸져 있는 홉이었다. 명나라에서 홉은 비주화(啤酒花), 사마초(蛇麻草), 홀포(忽布)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경련, 방광염, 복창, 불면증, 소화불량, 위장염, 이뇨, 정신분열증, 진정, 최면, 하초습열 등에 사용되는 약재였지만 난 그런 목적으로 이 씨앗들을 구해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
‘보리가 있고 홉이 있으면 다음에 만들 건 하나지.’
다만 홉을 재배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이 접촉시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 피부염증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기에 이렇게 천으로 감싸서 가져온 것이다.
“밀은 우리가 먹을 것이고, 요건 저 중원 놈들에게 배가 터지도록 먹일 것입니다.”
“글쎄요. 중원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비주화를 스스로 배가 터지도록 먹겠습니까? 하하. 약이잖습니까? 누가 약을 배가 터지도록 먹습니까?”
“네, 그것도 제 스스로 돈을 주고 사서 먹을 겁니다. 심지어 약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이죠.”
“하하하, 우리 교주님이 꾸미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감히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배를 불려 우리의 배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기대됩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교주를 보며 수장군은 맞장구를 치면서도 비주화 옆에 함께 있던 빨간색의 ‘저것’은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지 끝까지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기에 저걸 가지고 무얼 하실지가 궁금했지만 언젠가 그 이유를 알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웃차”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 효모로 부풀려서 발효를 시킨 뒤 ‘토마토’를 잘 으깨서 치즈와 함께 먹는 요리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는가. 지금은 이탈리아가 원조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음식.
그렇다. 피자였다. 난 지금 피자를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하는 중이다.
나에겐 화덕이 있고 밀이 있으며, 치즈가 있다. 이제는 수장군을 통해 드디어 토마토까지 들여왔다. 피자를 이루는 위일체가 모두 모인 마당에 내가 피자를 만드는 것은 필연이자 운명이었다.
‘피자 가게에서 알바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피자 가게에서 알바를 할 때는 나중에 집에서 피자 만들 때나 써먹지 피자 가게에서 일하면서 배운 게 다른 일에 써먹을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있었다.
물론 내가 일했던 곳은 화덕 피자 가게가 아니라 기계에 넣으면 자동적으로 벨트를 따라 이동하며 구워주는 곳이었지만 이곳에 떨어진 나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화덕피자를 더 고급으로 쳐주기도 하고.’
동그랗게 퍼뜨린 발효된 도우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바르고 그 위에 여기에서 자란 푸른 잎 채소를 얼추 뿌려준 뒤 소금에 살짝 저며둔 양고기를 얇게 썰어서 살짝 얹은 나는 길다란 작대기가 달린 철판에 올려 화덕 안으로 넣었다.
시간이 지나자 고기와 토마토가 익고 밀이 구워지면서 나는 냄새가 화덕 밖으로 슬슬 흘러나왔다.
“츄릅.”
“침 나와?”
“네.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데도 군침이 도네요.”
다진은 교주가 생전 처음 듣는 피자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열심히 반죽이던 때부터 귀한 밀가루를 가지고 무슨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는데 지금은 화덕 앞에서 익어가면서 나는 냄새에 환각에 취한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숨을 깊게 몇번이고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안 봐도 뻔해. 저건 맛있어.’
반죽이 익다 못해 타기 시작해서 다진이 자기도 모르게 빼내기 위해서 화덕 옆에 세워둔 작대기를 들었더니 용운이 빼앗아 방향만 슬쩍 돌려놓았다.
‘교주님은 저 귀한 밀가루로 뭘 만드나 싶었는데 이렇게 다 태울 작정인가?’
“기다려.”
“교주님, 저거 타요. 다 탄다니까요?”
“응, 기다려~”
“이씨! 다 타고 잿덩어리만 먹을 건가요?”
피자를 먹어본 적도 없는 녀석이 냄새만 맡고서 안달복달하는 게 퍽이나 귀여웠다. 그러나 고기까지 들어있는데다 밀가루 반죽 안쪽까지 골고루 익히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익지도 않은 거 먹으면 탈 난다. 탈.’
눈으로 기민하게 확인한 끝에 골고루 다 익었음을 확인한 용운은 작대기를 들어 철판을 피자 밑으로 슥슥 밀어 넣은 뒤 밖으로 꺼내 놓았다.
“히잉, 끝부분이 거뭇거뭇해.”
“그게 또 맛이란다.”
“탄 걸 먹으라고요?”
“탔지만 탄 게 아니야. 이게 별미라고.”
볶음밥이 맛이 있고 부침개의 끝부분이 맛이 있는 이유는 바로 ‘마이야르 반응’ 때문이다. 재료가 불과 만나 바삭해지면서 다양한 화학반응이 일어나는데 인간은 이 과정 끝에 나타나는 맛을 무척 좋아한다.
음식을 먹을 때 바삭한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인간은 더 맛있다고 느낀다. 감자칩의 사이즈가 괜히 한입에 먹기 힘들 정도로 커진 것이 아니었다. 감자칩 CF에 하나같이 바삭 소리가 강조되며 나오는 이유도 이때문이었다.
칼로 8조각으로 나누고 먹으라고 하자 막상 다진이는 어떻게 먹을지 모르겠는지 날 쳐다봤다. 젓가락도 없고 포크같은 걸 준비해주지 않았으니 먹을 방법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이거 어떻게 먹어요?”
“그냥. 손으로.”
“그냥? 그러니까 어떻게요?”
“이렇게.”
잘라놓은 조각을 손으로 들어 입으로 넣자 잘 구워진 피자의 향과 맛이 입과 코를 향해 느껴졌다. 그런 용운을 쳐다본 다진은 살짝 머뭇거리더니 용운을 따라서 피자를 맨손으로 집어 베어 문다.
“으음.”
“으음.”
맛있다는 것은 그게 어떻게 맛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먹방이라든가 TV에선 시청자들에게 음식의 맛을 전달하는데 있어 시각과 청각 이외엔 다른 수단이 없으니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리액션을 보이며 자신이 먹은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먹방 너튜버가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가 먹고 있는 피자가 구구절절 얼마나 맛있는지를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본 순간 뭘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부먹과 찍먹을 논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먹는 처먹을 하라고 했지.’
“음음아, 처처히 머거욤. 교중님.”
“다지나, 넌 입 터지게따.”
피자 8조각은 순식간에 각자의 뱃속으로 차곡차곡 4조각씩 들어갔다.
“넌 무슨 여자애가 반판을 먹냐?”
용운의 말을 듣고서 다진은 그제야 용운의 앞에서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고아한 인상을 허무하게 무너뜨릴 정도로 너무 허겁지겁 먹은 것이 떠올라 당황스러웠으나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한만큼 목소리를 키워 감정을 숨겼다.
“맛있는 거 먹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한판이라고 해봤자 별로 크지도 않았구만. 점심도 안 먹었잖아요, 우리.”
“그...그런가?”
‘여자들은 원래 적게 먹는 거 아니었어?’
용운은 여자들과 뭘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 여자들이 얼마나 잘 먹는지 잘 몰랐다. 풀코스로 먹은 여자들이 배를 한껏 채우고서도 디저트 배를 따로 둔 것처럼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다진은 차분해진 안색으로 오히려 피자를 더 구워야 한다고 말했다.
“더 구우라고?”
“겨우 한판 가지곤 부족하죠. 이걸 누구 코에 붙여요.”
“그...그래?”
“그리고 이렇게 맛있는 걸 우리만 먹고 끝내요? 사람들한테도 줘야죠.”
“그런가...?”
‘뭔가 말리는 기분인데...’
용운과 다진은 2판을 더 구워 한판씩 나눠 먹은 뒤에야 마을 사람들에게 줄 피자를 구울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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