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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재벌이 되고 싶다-2화 (2/132)

2화

의식을 차리고 내가 깨어난 공간은 당연히 병원도 아니었고, 특실도 아니었다. 가장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밖에서 부르는 교주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하아...그때 정신을 잃으면서 들었던 목소리가 진짜였던 건가?”

밖에서 부르는 이에게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하고 돌려보낸 나는 현재의 내 상황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마치 만취했다가 깨면서 어젯밤 저지른 일들을 되짚어보듯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자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의 교주, 28대 천마 화용운(火龍雲) 18세. 이게 다시 눈을 뜬 현재의 내 신분이었다. 소설에선 환생하면 재벌집 셋째라든가 행복한 용사로서의 편하고 좋은 로열로드를 걷는다는데 난 눈을 다시 뜨고 보니 천마였다.

천마라고 하니 좋지 않겠냐 싶겠지만 무협지의 먼치킨이라 하면 누구나 다 아는 그 강력하고 막강한 초인 천마가 아니라 나라는 천마는 그런 진짜 천마와 다르게 호칭만 천마인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십만대산(十萬大山). 현재의 천마신교가 위치한 신교의 땅. 보통 천마신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수천의 일류고수와 수백의 절정고수 수십의 초절정고수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기 위해 힘을 키우던 천마신교는 이미 백년도 전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견제를 당한다고 해도 그렇게 막강한 집단이면 중원에 한자락을 먹고 차지하고 있지 이런 산간벽지까지 밀려날 이유가 없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이 빌어먹을 신교...아니 이제는 마교라고 불린지 100년이나 지넨 동네는 자랑할 거라곤 만년설을 품은 거대한 산맥뿐이다.

월세를 내며 근근이 먹고 살던 알바 취준생의 신분에서 다음 생이 되어 넓디넓은 산맥을 물려받았으니 어찌 보면 부동산 부자라는 측면에선 금수저라는 신분으로의 격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이 동네는 오지 산골짜기 동네라 진짜 아무 것도 없다.

창문을 열고 내가 가진 유산에 대해 자랑할 수 있는 거리라곤 신의 축복을 받은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연경관뿐이랄까.

“이거라도 받았으니 감지덕지하는 게 맞는 건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아래로 보이는 운해(雲海)가 만들어지는 광경과 함께하는 만년설만 보자면 대학생 때 구경갔던 스위스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모습이었다. 마을이 위치한 아래로 시선을 돌리기 전까지라면 말이다.

고개를 아래로 돌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스위스에서 봤던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집들이 아니라 아크 떼와 양 떼가 돌아다니고 후줄그레하게 느껴지는 너와집들밖에 없었다.

“휴우...알프스 산맥 느낌은 좋은데 동네 분위기는 강원도 산골 오지마을 느낌이라니. 이 무슨 혼종이란 말인가.”

자연인처럼 언젠가 도시로부터 떠나 산에서 힐링하며 생활하는 것에 대해 로망을 품어보던 적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용운님, 또 한숨 쉬고 있습니까?.”

“어, 왔어?”

“한 여사께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미안 미안. 가자.”

내가 등을 떠미는 이 여자애는 수다진(水多振)이라는 애로 내가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함께 자라서 소꿉친구 비슷한 존재였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면서 10대가 되고선 선을 긋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따라간 곳에는 다진의 어머니께서 손수 차려주신 따끈한 감자와 옥수수 그리고 추르피와 우유가 있었다.

‘강원도냐고. 그리고 감자랑 옥수수는 식어도 별반 차이 없지 않나?’

그러나 굳이 이를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식사를 준비해주신 다진이 어머님께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주님. 우리 신교를 다시 일으키실 분인데 식사가 변변치 않아 죄송합니다.”

“아...그건 아닌데...음...네.”

공치사가 더 길어질 것 같아 잘랐다. 먹기도 전에 체할 것 같다. 차라리 전생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라며 친척들이 던지는 명절 때 덕담 아닌 덕담이 더 낫지.

망해버린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몇배는 힘든 미션을 아침부터 잘 때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수시로 반복해서 들었다는 점에서 용운이 느꼈을 압박감은 시집살이 빡센 며느리들이 느끼는 어지간한 명절 스트레스보다 더 심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은 나도 부담스러운데.’

그건 그렇고 식사를 하기 전에 들이켠 우유는 대한민국에서 먹던 우유보다 훨씬 진하면서 달콤했다.

‘이걸 우유(牛乳)라고 하는 게 맞긴 한가 싶다만.’

고산지대라 당연히 지금 내가 마시는 음료는 당연히 우리가 아는 젖소에게서 짠 것은 아니었다. 야크의 일종인 차우리라는 동물의 젖이 바로 이 것인데 아침에 바로 짠 거라서 따끈따끈한데다 고소했다.

옥수수도 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찐 것을 먹다보니 찐옥수수의 특유의 단맛이 느껴졌는데 안타깝게도 소금이 귀한 동네라서 그런지 감자를 찍어먹을 소금이 없어 아쉬웠다. 그러나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고 생각하는 것도 다 비슷한지 감자하고 함께 먹는 추르피가 있어 그럭저럭 대체할만 했다면 다행일까.

아, 추르피가 뭐냐면 차우리에게서 짠 젖을 가지고 만든 치즈인데 한번 만들면 최대 20년도 먹을 수 있는 장기보관도 가능한 치즈였다. 물론 오랜시간 버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추측한 이들도 있겠지만 수분 함량이 극도로 낮아 더럽게 딱딱해서 입안에 넣고 천천히 녹여 먹여야 하는 것과 생각보다 짜서 한번에 많이 먹으면 입 안이 소금밭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추르피의 심각한 단점이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감자랑 옥수수랑 다르게 염분을 섭취할 음식이 많지 않아서인지 꽤나 짜게 먹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한 여사(女史)님 , 아저씨가 안 보이네요. 아저씨는 어디 가셨어요?”

다진이 어머님께 같이 식사를 해야할 아저씨가 보이지 않아 여쭤보자 아주머니께서 아저씨가 어디로 가셨는지 설명을 해주셨다.

“교주님, 편하게 그냥 한 여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존칭을 붙이시네요.”

“아...예. 주의할게요. 한 여사.”

“위장군은 소금을 채취하러 가셨습니다. 신교에 비축된 소금이 거의 다 떨어져 가서 말이죠.”

“그렇군요.”

“며칠 전에 분명 말씀드렸는데도 까먹으셨네요. 교주님.”

앞에 앉아서 조용히 오물거리며 옥수수를 조각조각 잘라내어 먹던 다진이가 샐쭉하니 새침한 표정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마니야. 그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어서 교주님께 사과드려라.”

“엄마, 다진이라니까. 내 이름이 수다진이라고. 수다진! 몇 번을 말해.”

“얘 좀 봐? 어찌 해서 지엄한 교의 율법을 따라 지어진 너의 이름을 함부로 바꾸겠다고 하는 것인지 이 어미는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교주님이 앞에 계신데 이 무슨 망발이니!”

방금 전까지 사극모드였던 것과 다르게 사춘기 소녀와 사춘기 소녀의 어머니가 보일 법한 아주 평범한 대화들이 하이톤으로 눈 앞에서 오고가기 시작했다.

‘음, 차라리 이게 편하네.’

눈 앞에 있는 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격렬해져가던 두 사람의 대화는 옥수수를 키다 사레걸린 나 때문에 덜컥하고 멈춰버렸다.

“크크큼. 콜록콜록”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다진이 어머니는 방금 전까지 딸과의 격렬한 대화가 오가던 분은 어디로 가버리고 다시 사극 모드로 바뀌셨다.

“아니에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에 걸린 옥수수 조각을 넘기기 위해 우유를 키고 있는 내게 다진이의 날카로운 눈빛이 와서 박힌다.

‘뭐?’

나의 눈빛이 무엇인지 알아먹었는지 코웃음을 친 다진이는 다시 도도한 척 감자를 잘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무슨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도 아니고 고작 찐감자 먹으면서 그런 표정 지어봐야 느낌이 안 산다. 다진아.’

조용해진 가운데 어느새 아침식사가 끝이 나자 다진이 어머님께선 내가 다 먹었는지를 살피고 인사를 하시더니 조심스레 접시와 젓가락을 챙겨 설거지를 하러 가셨다. 그리고 다진이도 자연스레 어디론가 움직이길래 나도 따라나섰다.

“왜 따라 오시는 건가요?”

“어?”

사실 아무 생각 없었다.

“이제 진짜 무공수련 안하시나요, 교.주.님?”

“무공수련?”

다진은 얼마 전에 절벽 앞에서 미친놈처럼 울부짖고 가진 바 무공을 쏟아내며 절규하던 용운이 탈진해서 쓰러졌다 일어난 뒤로 온순(?)해진 용운이 걱정되서 한 말이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라 세상을 발 아래 둘 것처럼 호기롭던 용운은 어디로 사라지고 다정해진 용운의 모습은 한편으론 좋았지만 내심 용운을 소꿉친구로 생각하는 다진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 다르게 말은 차갑고 퉁명스럽게 나왔다.

“그냥 동네 좀 한바퀴 둘러볼까 해서. 그 전에 너 뭐하나 싶어 확인도 할 겸.”

“저는 교.주.님과 다르게 꽤나 바쁜 몸이라서요! 우리 동네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 먹는 사람은 교.주.님밖에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따라오건 말건 고개를 돌려서 코끼리처럼 쿵쾅거리며 감정을 드러내는 스텝을 밟으며 다진은 어딘가로 이동했다.

“가버렸네...”

멍하니 자리를 떠나는 다진을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내 머리 속으로 떠오른 용운의 기억에서 지금 시간에 난 무공수련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내 기억이 깨어나기 전 용운이 절망했던 것은 이제 고작 절정고수(?) 밖에 안되는 본인의 수준과 동네에 남은 몇 안되는 이들을 모아선 결코 신교를 다시 부흥시켜 오랜 신교인들의 꿈인 권토중래를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용운이 느꼈던 절망감이 어찌나 컸냐면 절정고수답지 않게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일으키며 쓰러졌던 것이었다. 뭐, 덕분에 전생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내가 이 곳에 있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근데 진짜 나도 막막하긴 하다. 갑자기 이런 세상에 던져 놓으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싶으니까. 그때 그 양반이 뭘 챙겨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딱 하고 눈에 띄는 게 있어야지.”

보통 이렇게 혼자 있을 때 소설 속 주인공들이 클리셰처럼 하는 대사가 있어 나도 혹시나 될까 싶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내뱉었다.

“상태창”

주)위에서 말하는 여사(女史)는 요즘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김여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후의 지시를 받아 육궁의 내정을 다스리며 부관 역할을 하는 궁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궁이란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사는 육궁의 지출결산서를 살펴보고 왕후의 명령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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