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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76/76)

76화

“밥. 먹어요.”

다연의 승낙이 떨어지자 자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연을 안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선 성큼성큼 걸었다.

계속 따라올 것 같던 개는 어디선가 주인이 부르는 휘파람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갔다.

“갔어요. 이제 내려줘요.”

그는 조심스럽게 다연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잊지 말라는 듯 말했다.

“밥 먹기로 한 거 잊지 마.”

“하아…… 네.”

다연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같이 밥 먹자라는 약속을 다연은 철석같이 지켰다. 셀레나가 해준 식사 자리를 다연은 이렇게 이용했다.

못마땅한 표정의 자혁이 다연을 바라보았다.

“나랑 밥 먹는다고 했잖아.”

“이것도 밥이잖아요.”

다연은 셀레나가 만든 요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에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이러는 거 반칙이지.”

“정확하게 몇 시에 어디에서 어떤 밥을 먹자는 말은 없었잖아요.”

“하아.”

당했다는 생각에 자혁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약속을 한 순간부터 자신이 얼마나 설렜는지.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조금이라도 알면 이럴 수 없을 텐데.

“앉아요. 셀레나 요리 정말 맛있어요. 한 달 넘게 먹었으니까 잘 알죠?”

다연뿐만 아니라 셀레나의 얼굴에도 재미있는 것을 본 사람처럼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어서 앉아.]

평소와 같이 셋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였다.

매일 옅은 미소를 짓던 자혁은 억울한 표정이었고, 매일 인상을 쓰던 다연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다연이 잘 먹었다는 말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가 버리자 자혁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셀레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다다, 저런 짓궂은 얼굴 처음 봐.]

[나는 본 적 있어.]

[정말?]

셀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한국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며 식당에 가자고 하더니, 차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곳을 알려줬어. 그때 표정이 오늘처럼 저랬어.]

셀레나는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다다에게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있었다니,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만 있을까.

자혁은 자신만이 보았던 다연의 여러 가지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나만 보고 싶어.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셀레나.]

자혁이 양손을 모으고 부탁했다.

하지만 셀레나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걸 어쩌지? 난 중간에서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어. 전에는 다다 편이었는데 지금은 중립이야.]

셀레나는 자혁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응원은 해 줄게.]

[굉장히 모순된 말인 거 알아? 누구의 편도 아닌 중립이라면서 응원한다니.]

자혁이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눈에 안 보일 때도 미칠 것 같았는데 매일 한집에 있는 지금은 더 죽을 맛이었다.

집안 곳곳 한다연의 향을 맡으며 매일이 고문과 같았다.

[나는 세상 모든 여행자를 응원하거든. 지금 너는 사랑을 찾으러 온 여행자잖아. 그런 의미에서 응원해. 하지만 너와 다다 사이에서 난 중립이야.]

셀레나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식탁에 남은 자혁은 셀레나가 했던 말 중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사랑…… 사랑이라…….”

자혁은 입안에 맴도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단어가 자신이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조금 틈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다연은 여전히 자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자혁은 오늘도 다연을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그럼에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랑’이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잘 걸어가던 다연이 휙 하고 뒤돌아보았다. 자혁은 멈춰서서 다연은 바라보며 웃었다.

뭐가 또 골이 나서 눈에 힘을 주고 보는 걸까.

“한국은 언제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일! 안 해요?”

자혁은 대답 대신 다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이 뽑은 직원들 능력 있고 일 잘한다는 거 알겠는데. 그래도 대표가 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면 어떻게 하냐고요!”

“한다연.”

“제발 당신 자리로 돌아가라고요!”

제 말 만하고 돌아서는 다연의 팔을 잡아서 다시 돌려세웠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다연을 보며 자혁이 천천히 물었다.

“내 자리가 어디인데?”

“한강 기업 구자혁. 거기가 당신 자리예요.”

“넌?”

“……!!”

다연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자혁에게 잡힌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한다연, 당신 자리는 어디인데? 아무리 봐도 여기는 아닌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

“다른 사람 자리는 금방 대답하면서 정작 네 자리는 어디인지, 왜 대답조차 못 해.”

다연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렇다고 한국은 아니에요.”

“맞아, 한국 아니야.”

다연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다연이 있을 곳은 구자혁이야.”

“하아. 기가 막혀.”

“당신이 어디를 가도 다시 돌아올 곳은 나야.”

굉장히 오만한 말이었다. 그리고 뻔뻔했다. 구자혁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이 한국이 아니라고 했을 때는 서러웠다. 알고 있었지만, 구자혁조차 그렇게 말하는 것이 미웠다.

한다연이 있는 곳은 구자혁이라니. 다연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다연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콩콩 때렸다. 그는 가만히 서서 다연이 때리는 대로 맞아주었다.

“화내. 하고 싶은 만큼 다 해.”

“당신이 뭘 잘 못 한 건지는 알아요?”

“알아. 그러니까 다 받아줄게. 나한테 다 해. 그리고 나한테 와.”

“싫어요.”

다연은 단호하게 대답하고선 뒤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자혁의 따라오는 발소리를 듣고선 다니 뒤돌아보았다.

“따라오지 말아요.”

“그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면서요. 이런 것도 못 들어주면서.”

다연이 다시 찬바람을 일으키며 뒤돌아섰다. 더는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다연은 더 속도를 내어 걸었다.

큰 거리로 나와 다연은 택시를 잡았다.

* * *

늦은 밤 셀레나의 집으로 돌아온 다연은 2층으로 올라가 자혁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다연은 5초 정도 기다린 후 문을 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자혁이 보였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자혁은 화상 회의를 종료하곤 다연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었어. 걱정….”

그가 하는 말이, 걱정이 듣고 싶지 않아 다연은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이틀 뒤에요. 여기서 직원들 괴롭히지 말고…… 가요. 제발.”

그는 느릿하게 티켓을 받아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찢어버렸다.

잘게 찢어진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는 것을 본 다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뭘 원하는 거냐고요!”

“그런 거 없어.”

“하아…… 진짜 미치겠어.”

벽이랑 이야기하는 게 지금보다 나을 것 같았다.

다연 진짜 벽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얘기했잖아. 보고 싶었다고.”

“뻔뻔해.”

“사랑해.”

다연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쁘다. 보고 싶었다, 와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지난 말이었다.

단 세 음절의 말이 다연을 송두리째 흔들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연은 그대로 그의 방을 나갔다.

다연은 며칠째 두문불출했다.

셀레나의 성화에 식사 시간에는 내려와 아무 말 없이 음식만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혁이 피렌체에 온 지 두 달이나 되었다. 다연은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다연은 옷은 든든히 챙겨 입고 광장으로 나와 7번 버스를 탔다.

자혁이 따라왔지만, 다연은 그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돌담에 서서 다연은 아래 풍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맴도는 세 음절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해.”

다연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떨쳐내려 했다. 돌담을 따라 걸으며 다연은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짙어질 때쯤 지난번 보았던 큰 개가 다연의 앞에 나타났다.

꼬리를 흔들며 뛰어오는 개를 보며 다연은 뒤돌아서 구자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짙은 우드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향기에 안도하는 자신을 보며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거봐. 당신이 있는 곳은 나 맞는다니까.”

그는 다연을 품에 꼭 안았다.

주인이 부는 휘파람 소리에 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다연은 계속 그에게 안겨 있었다.

어쩌면 개가 나타난 것은 핑계였을 지도 모른다.

그의 고백에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다급한 순간 다연은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구자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가 그가 말한 것과 같은 이유라는 것을.

“아까 그 개 이름도 메리래.”

“…….”

“메리 핑계로 이번에도 같이 밥 먹자고 하려 했어. 이번에는 시간, 장소 다 정해서.”

이미 눈물이 쏟아지고 있어서 다연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어떻게 해야 너와 잘 지낼 수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어. 내 방식대로 네가 따라와 주기만 바랐지.”

한국에 있는 메리도 아는 걸 당신은 왜 몰랐는데.

“그러니까. 참지 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알 수 있도록. 기다릴게.”

결국 다연이 제품에 올 수 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었다.

진짜 뻔뻔하고 오만한 남자였다.

-투툭. 툭툭.

다연이 쏟아내는 눈물이 부족했는지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자혁은 우산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다시 다연은 품속으로 당겨 안았다.

“이제 우기가 시작됐나 보네.”

“……흐흑.”

참지 못한 흐느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내가 다 잘못했어.”

“흑…….”

여자가 울면 무조건 사과하라고 했던 미미의 충고는 이렇게나 잘 따르면서.

다연은 고개를 들어 구자혁을 바라보았다.

“거짓말하지 않기. 내 일에 나 빼고 처리하지 않기.”

“알았어.”

“계약서 써줘요. 내가 원하는 조항 다 넣어서.”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또.”

“…….”

“원하는 거 다 말해봐.”

그가 고개를 숙이자 짙은 눈 안에 다연의 모습이 비쳤다.

“추가 조항이 생길 때마다 말할 거예요.”

“또.”

“지금은…….”

“지금은?”

다연은 뒤꿈치를 들고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우산을 잘 들고 있어 줘요.”

그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다연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서로의 몸이 가까워지며 다연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뜨거운 숨을 내쉬는 입술이 닿기 전 그가 말했다.

“사랑해.”

뜨거운 입술이 맞닿았고, 그는 다연이 시키는 대로 우산을 잘 들고 있었다. 주변에 짙은 어둠이 내릴 때까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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